3주째 집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보는 책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소설이다. 독서를 시작하게 된 발단이 된 책은 앤 브론테(Anne Brontë)의 《아그레스 그레이》다. 유튜브(Yutube)에 영상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이와 연관된 추천 영상들이 줄줄이 나온다. 어떤 주제와 관련된 독서를 하는 과정은 유튜브 영상 알고리즘 방식과 유사하다. 앤 브론테의 소설을 읽었으면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의 소설을 읽고, 세 자매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소설에 관심이 가게 된다.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면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소설들 이것저것 동시에 읽는다. 어쩌다 보니 레 파누(Le Fanu)의 소설도 읽었다.
* [품절]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걸작선 2》 (책세상, 2004)
* 안길환 엮음 《영국의 괴담》 (명문당, 2000)
예전에 레 파누의 대표작 《카르밀라》 리뷰와 그의 단편소설을 소개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레 파누에 대한 글을 썼을 때 우리말로 번역된 레 파누의 단편소설 두 편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두 편의 단편소설은 『유언의 저주』(Squire Toby’s Will, 1868)와 『손에 대한 고찰』(Narrative of the Ghost of a Hand, 1863)이다. 『유언의 저주』는 《영국의 괴담》(명문당)에, 『손에 대한 고찰』은 《세계 호러 걸작선 2》(책세상)에 수록되어 있다.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에 수록된 레 파누의 소설을 확인하지 못했다.
『유언의 저주』는 재산 상속 문제로 앙숙이 된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대지주 토비 매스턴(Toby Marston)은 두 아들 중 유독 차남 찰리 매스턴(Charlie Marston)을 좋아한다. 장남 스클루프 매스턴(Scroope Marston)은 척추 장애인(꼽추)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은 일이 없다. 토비는 못생긴 장남을 매스턴 가문의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생긴 찰리를 재산 상속자로 정한다. 찬밥 신세가 된 그는 자신을 싫어하고 동생만 편애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토비는 죽기 전에 유서를 썼다. 유서에 자신이 소유한 길린덴 저택(Gylingden Hall)과 전 재산을 장남에게 상속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스클루프는 장자가 가문의 지위와 재산을 독점하는 장자상속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동생에 대한 스클루프의 증오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스클루프는 장남으로서 자신이 저택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찾기 위해 상속 재판 소송을 신청했으나 패소한다.
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찰리의 눈앞에 ‘꽃길’ 인생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찰리는 낙마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친다. 낙마 사고 이후로 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두려워하고, 성격이 음울해지면서 고독한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된다.
찰리는 죽은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찰리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예배당에 가다가 기분 나쁘게 생긴 개를 만난다. 찰리와 동행한 집사는 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찰리는 그 개를 관리인에게 맡겨 키우기로 한다. 개를 만난 이후에 찰리는 기묘한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개가 나타난다. 기분 나쁜 꿈을 꾼 찰리는 개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헤롯왕의 방(King Herod’s chamber)’이라는 곳에 내보낸다. 찰리는 그 방 내부를 살펴보다가 몇 통의 편지와 양피지 증서를 발견한다. 증서는 토비가 결혼하기 전에 작성된 것이며 글린덴 저택을 장남에게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증서가 스클루프에게 알려지면 스클루프는 찰리에게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는 이 증서를 당장 파기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죽은 뒤에 형에게 재산이 돌아갈 수 있도록 증서를 보관할 것인지 고민한다. 찰리는 오랜 고민 끝에 증서를 파기하지 않기로 한다.
찰리는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짖어대는 개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꾼 악몽을 떠올린다. 그는 관리인에게 개를 사살하라고 명령한다. 개는 관리인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죽는다. 찰리는 악몽에 계속 시달린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한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찰리에게 “얼른 저택을 떠나라. 스클루프가 너를 목매달아 죽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점점 개의 형상으로 변한다.

찰리는 형의 부고를 확인한다. 찰리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형과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형에게 앙금이 남아 있던 찰리는 죽은 형을 모욕하기 위해 장례식을 대충 치른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길린덴 저택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다. 집사는 검은색 망토를 입고, 모자에 상장(喪章)을 단 두 명의 신사가 저택에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한다. 하인과 하녀들은 저택 안에서 발소리와 여러 사람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두려워한다. 찰리는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을 애써 무시해보려고 하지만, 한동안 잠잠했던 불안감이 또 한 번 그를 덮친다.
『유언의 저주』에 나오는 두 형제는 모두 불행한 인물이다. 스클루프는 ‘꼽추’, 즉 ‘장애인의 몸’으로 태어나 장남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토비의 자식일 수 있다. 찰리는 실질적으로 상속자가 되었지만, 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스클루프는 장자상속 권리를 내세워 찰리를 압박한다. 찰리를 ‘차남’이라서 형의 존재에 큰 부담감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낙마 사고를 겪은 이후로 찰리는 말을 타지 못한다. 말을 타지 못하는 찰리가 병약한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은 ‘남성성 상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할 수 있게 해준 매력인 ‘장남으로서의 활동적인 면모’까지 사라진다. 그 후로 아버지와 형은 찰리의 꿈에 나타나 그를 비난한다. 심지어 꿈속의 아버지는 장남의 재산까지 독차지한 찰리를 꾸짖는다. 찰리의 꿈에 형을 이기려고 하는 ‘차남 콤플렉스’가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찰리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개를 죽이고, 형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의 증서를 파기한다. 또 형을 증오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찰리는 형의 장례식을 성의 없게 치른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민음사, 2004)
『유언의 저주』와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Rochester) 형제도 재산 상속 문제로 갈등을 빚는데, 이 갈등의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버지다. 차남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전 재산을 장남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면 에드워드는 빈털터리가 된다. 친자식이 가난하게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아버지는 에드워드를 부잣집 딸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아버지와 장남은 메이슨(Mason) 가의 재산에 눈독 들이고, 에드워드를 메이슨 가의 딸과 결혼하도록 추진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학을 갓 졸업한 에드워드를 자메이카로 보낸다. 에드워드는 그곳에서 만난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Bertha Antoinetta Mason)과 결혼한다.
* 백승종 《상속의 역사》 (사우, 2018)
두 편의 소설에 묘사된 형제 갈등은 단순히 재산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상황으로만 볼 수 없다. 형제 갈등의 원인에는 탐욕이라는 개인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간의 불평등과 가족 해체를 야기하는 상속제의 폐단도 형제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다. 유럽 사회의 장자상속제를 이해하려면 《상속의 역사》(사우)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동서양의 다양한 상속제에 나타난 여러 가지 폐단을 보여준다. 상속제는 단순히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사회적 제도로 작용하지 않는다. 《상속의 역사》의 저자는 상속제를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적 생존 전략’으로 이해한다. 상속제 사회에 부와 권력을 얻는 사람과 반대로 부와 권력을 잃는 사람이 있다. 상속제 때문에 가족 싸움이 피 튀기는 살육전으로 확산하기도 했다.
『유언의 저주』의 찰리와 《제인 에어》의 에드워드 로체스터는 장자상속제의 폐단을 피하지 못해 불행한 일을 겪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파멸’이라는 도착지에 이르는 가시밭길뿐이었다.
※ Trivia
《영국의 괴담》의 번역문에 한자로 된 낱말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유언의 저주』의 ‘대지주 토비(Squire Toby)’를 ‘향사(鄕士) 토비’로 번역한 것이 눈에 띈다. 향사는 시골 선비, 또는 시골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 무인(武人)이다. 대지주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다. 대지주와 향사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squire’를 향사로 번역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