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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오디세이 - 휴머니즘에서 포스트휴머니즘까지, 인류의 미래를 향한 지적 모험들
홍성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1월
평점 :
작년 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정말로 춥다고 느껴진 날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전혀 춥지 않은 겨울을 이상기후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저지른 업보는 생각 못 하면서 예전과 다른 날씨를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이 초래한 환경 변화를 돌아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현상을 ‘이상기후’ 또는 ‘기상 이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지구가 ‘가이아(Gaia)’처럼 살아있는 존재라면[주] 자연을 착취하면서 파괴하는 인간들을 한심하게 바라볼 것이다.
과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인류세(Anthropocene)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인류의 시기(世)라니. 이름만 보면 인간이 지구의 중심에 당당히 우뚝 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용어를 언급하면서 자랑스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인류세는 인류의 자연 파괴로 인해 지구 환경 체제가 급변한 시대를 뜻한다. 인류세의 특징은 이산화탄소와 메탄 같은 기체의 대기 중 농도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지구의 기후 변화는 대기 중 극히 미량으로 존재하는 기체들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는 온실 효과를 초래한다. 온실 효과의 영향으로 양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증가한다. 그 결과로 섬과 해안 지역에 잦은 홍수가 일어나면서 수억 명의 삶의 터전이 바다에 잠긴다. 인류세는 인류의 탐욕이 만들어낸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해온 인류의 역사에 대자연은 그렇게 앙갚음하고 있다.
폭설과 집중호우, 가뭄과 홍수, 예측 불허의 태풍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예외가 없다. 대자연의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파괴적인 욕심은 그칠 줄 모른다. 이 위기의 본질을 통찰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려면 지구를 자신의 것인 양 사용한 인류에 대한 자성이 깔린 ‘감수성’이 필요하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 《포스트휴먼 오디세이》는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필요한 감수성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감수성은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핵심 정신이다. 대부분 사람은 ‘휴머니즘’을 선호한다. 그 사람들은 휴머니즘을 따뜻한 인류애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휴머니즘은 말 그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다.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주의라서 다른 생태계의 생명체를 도구화하고 정복하는 어두운 면을 지닌다. 근대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자연 정복 욕망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휴머니즘으로 포장했다. 서구 근대에 완성된 휴머니즘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정복 지향적인 남성에 가깝다.
《포스트휴먼 오디세이》는 시대별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감수성의 역사를 보여준다. 저자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 발표 이후를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점으로 본다. 다윈은 진화론을 통해 인간이 온갖 위기에도 끝없이 진화하고 생존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을 강조했다.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진화해온 인간은 트랜스휴먼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수명, 지능, 감각 등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신념을 가리킨다. 기술의 힘으로 인간의 능력을 무한대로 계발한다는 의미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과학기술이 발전되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종종 트랜스휴머니즘과 겹친다. 그러나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 이후의 감수성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지금 우리가 포스트휴머니즘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찬양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공장기로 교체하거나 유전자 조작 기술 등을 통해 신처럼 오랫동안 살거나 고통받지 않고 사는 미래의 삶은 트랜스휴머니스트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인류의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자는 욕망은 정복적인 인간중심주의에 가까운 휴머니즘의 연장선에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인간과 생명체는 실험대상이 되어 착취된다. 과학기술은 효용도 있지만, 위험과 문제점도 뒤따른다. 이를 무시한 채 자연과 동물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욕망에 희생되어야 하는 미래가 찾아온다면 과연 그것은 장밋빛 미래라 볼 수 있을까.
포스트휴머니즘은 장밋빛 미래만 내다보는 트랜스휴머니즘에 제동을 건다. 포스트휴머니스트도 트랜스휴머니스트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나가며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의 의미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포스트휴머니스트는 인간과 과학기술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미래에 회의적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동반자 관계임을 강조한다. 포스트휴머니스트가 지향관계는 인간을 위한 일방적인 관계와 거리가 멀다.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과학기술, 인간과 자연, 인간과 과학기술(기계, 로봇, 인공지능)이 어떻게 공생해 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홍 교수가 생각하는 감수성은 외부 세상을 받아들여서 인지하고 느끼는 정신적 능력이다. 그리고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머리로 느낀 감수성을 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알려주지 않는다. 2%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단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책에서 보여주지 못한 2%는 독자들이 찾아서 채워야 한다. 포스트휴먼 감수성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은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공통 과제이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과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맡을 순 없다.
[주]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1972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입장인 ‘가이아 가설’을 제시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지구는 생명이 번성하는 데 완벽하게 알맞은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이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대부분 사람(전문가 및 학자들도 포함된다)은 러브록의 주장을 ‘가이아 이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가이아 가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이론’은 논리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것이다. 러브록의 주장에는 지구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실제로 러브록은 자신의 주장을 ‘가이아 가설’이라고 불렀다. 제임스 러브록은 1919년생이며 올해로 100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