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타그뤼엘 제5서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권국진 옮김 / 신아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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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팡타그뤼엘 제5서》가 번역돼 나왔다. 이 작품은 1979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뒤 오랫동안 절판됐다. 라블레의 대표작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가르강튀아 대연대기’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라블레는 1532년에 ‘팡타그뤼엘’을,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는데, 이 두 작품을 합본한 책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익숙한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거인국의 왕 팡타그뤼엘(Pantagruel)과 그의 아버지 가르강튀아(Gargantua)의 행적을 다룬 연대기 형식의 소설이다. 거인 부자는 음식을 실컷 먹고, 술을 벌컥 마시고, 실없는 대화를 하는 등 소란스러우면서도 유쾌하게 살아간다. 지상의 기쁨을 누리는 데 여념이 없는 거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보는 금욕적이고 천상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던 중세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는 외설스럽고 반종교적인 작품으로 낙인찍혔지만, 그때는 중세의 낡은 관행들을 뚫고 근대 세계가 서서히 움트던 시대였다. 대중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이 담긴 라블레의 소설을 좋아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라블레는 1546년에 《팡타그뤼엘 제3서》, 1552년에 《팡타그뤼엘 제4서》를 발표한다. 라블레는 155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564년에 저자명이 라블레로 되어 있는 책이 나온다. 그 책의 제목은 ‘선량한 팡타그뤼엘의 영웅적 언행록에 관한 다섯 번째 그리고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이 바로 《팡타그뤼엘 제5서》이다. 라블레가 쓴 거인 연대기는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제5서》가 전작들과 비교해 많이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동안 《제5서》가 ‘위작’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현재 《제5서》와 관련된 판본으로 확인된 책은 총 세 권이다. 세 권 모두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왔다. 세 권의 판본을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1562년에 ‘종이 울리는 섬’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고, 1564년에 결정판인 《제5서》가 나왔다. 나머지 판본은 연대 미상의 필사본이다. 이 필사본은 라블레 사후에 활동한 무명작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5서》의 진위에 대한 학자들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제5서》는 라블레가 쓴 작품이 맞다. 두 번째, 라블레가 《제5서》를 쓰는 도중에 세상을 떠난 바람에 《제5서》는 미완성된 작품이 된다. 그러나 라블레의 필체를 잘 이해하고 있고, 종교개혁 정신을 가진 무명작가가 소설을 완성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가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 번째, 전작과 너무나 다른 문체로 봐서는 《제5서》는 위작이다. 세 번째 입장은 오랫동안 《제5서》를 설명할 때 꼭 거론되었고, 다수의 학자에게 지지받아왔다. 이렇다 보니 《제5서》는 읽을 가치도, 연구할 가치도 없는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5서》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가 달라진다. 《제5서》가 라블레의 초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위작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제5서》는 《제3서》와 《제4서》의 주인공이자 팡타그뤼엘의 친구인 파뉘르주(Panurge)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병 신(神)의 신탁을 받으러 항해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당연히 이 책도 기존에 나온 전작처럼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대화가 전개되고, 인물들은 기이한 섬에 당도하면서 황당한 소동에 휘말린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섬 주민들은 ‘새 인간’에 가까운 모습인데, 권력을 남용한 종교인들을 풍자하는 알레고리(allegory)로 볼 수 있다.

 

《제5서》에는 전작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칼리그램(calligram, 상형 시)이다. 칼리그램이란 ‘글자로 만든 그림’을 뜻한다. 라블레가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제5서》를 가필한 무명작가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독특한 글임은 분명하다. 《제5서》 44장에 ‘에필레미’라는 노랫말이 술병 형태의 그림 안에 들어 있다. 에필레미는 포도를 수확할 때 주신 바쿠스(Bacchus)를 찬양하면서 부르는 익살스러운 노래를 말한다.

 

 

 

 

 

 

“오, 신비로 가득 찬 술병 신이여,

난 한쪽 귀로도 그대의 목소리를

듣겠나이다. 당장에, 내 마음이 간구

하는 말을 베풀어주소서. 이처럼

거룩한 성수(聖水)에 인도를 정복한 바커스를 모든 진실을 간직하도다. 성스러운 신주(神酒)여, 그대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시오. 모든 허위와 모든 기만은 노아의 시대에는 극도의 기쁨이 되지만 그대가 그 비법을 우리에게 베푸나이다. 원하건대, 내 고통을 삭혀주는 아름다운 말을 베풀어주소서.

                 이처럼 한 방울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나이다.

                                흰 것이나 붉은 것이나 모두.

오, 신비로 가득 찬 술병 신이여,

난 한쪽 귀로도 그대의 목소리를

듣겠나이다. 당장에.”

 

 

(권국진 옮김, 212~213쪽)

 

 

 

그런데 《제5서》의 역자는 《제5서》의 실제 판본에 실린 칼리그램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제5서》가 번역되기 한참 전에 유석호 연세대 불문과 교수는 자신의 라블레 연구서에 《제5서》의 칼리그램을 언급한 적이 있다.[주] 책 14쪽 역주에 ‘호메르스’라는 이상한 단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오자이다.

 

 

 

[주] 유석호 《라블레,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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