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책을 많이 빌려 보게 되면, 완독하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에서 만난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미술문화)도 처음에는 잠깐 보고 마는 책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는 ‘초현실주의 운동과 초현실주의 회화’였다.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는 초현실주의 회화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받은 조형미술, 사진, 영화 등도 살피고 있다.

 

 

 

 

 

 

 

 

 

 

 

 

 

 

 

 

 

* 요아힘 나겔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2008)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끝까지 다 읽었다. 책을 끝까지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소개된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들이 아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의 자화상은 내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 작품이었다.

 

 

 

 

 

사진 속 카엥의 모습은 마치 신성한 아우라(Aura)를 발산하는 신과 같다. 아마도 이 사진을 보는 관객들은 한번쯤 이런 생각을 했지 싶다. “사진에 나온 작가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관객이 사진 속 작가의 성별을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름과 짧은 머리를 보고 카엥을 남자라고 추측하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 조현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행성B, 2018)

 

 

 

사실 카엥은 여성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작가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클로드 카엥’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에이젠더(agender)에 가깝다. 에이젠더란 성 정체성이 없다고 믿는 사람, 즉 자신이 어느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거나 혹은 ‘젠더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이다. ‘젠더가(성별이) 없는 사람’이라니. 인간을 ‘남성’, ‘여성’, 딱 두 개의 성별로 나누려는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에 익숙한 사람들은 젠더 없는 삶이 정말로 가능한지 의문을 드러낸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성 구분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문화 · 종교 · 정치권력 등의 영향으로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남성성, 여성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cisgender)가 ‘정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스젠더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성 정체성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격리와 치료의 대상이 된다. 카엥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나면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로 태어나면 여자로 살아간다’라는 고정된 젠더 이분법적인 삶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카엥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가족은 카엥의 동성애를 반대했다. 카엥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수잔네 말레르브(Susanne Malherbe)와 함께 작업을 했다. 카엥은 여러 편의 글도 썼는데, 그녀가 글을 쓰면 말레르브가 글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그런데 1917년에 카엥의 아버지는 미망인이었던 말레르브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졸지에 카엥과 말레르브는 연인에서 의자매가 되었다. 그러나 카엥은 말레르브와의 동성애 관계를 분명히 드러나도록 행동했다. 그 후로 카엥은 ‘전통적 여성성’을 거부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삭발한 모습으로 자화상을 촬영했으며, 남자들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클로드 카엥’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파리의 유명한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의 주인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등과 어울렸다.

 

 

 

 

 

 

 

 

 

 

 

 

 

 

 

 

 

 

 

 

* [2018년 레드스타킹 네 번째 선정도서]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카엥의 자화상을 보면서 그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외모나 품행만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한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카엥의 자화상을 보는 관객들은 젠더 귀인으로 자화상 속 카엥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카엥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문하는 듯한 관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거부한다. 사진 속 카엥은 관객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낸다.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함부로 판단하지 마!”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관객들은 ‘젠더가 없는 사람(카엥)’의 등장에 당혹스러워 한다. 카엥은 자신을 비웃는 젠더 이분법 세계를 위반하면서 거기에 갇힌 사람들을 사진으로 조롱한다. 카엥의 자화상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설명했던 ‘캠프(camp)의 미학을 보여준다. 손택은 『‘캠프’에 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캠프’를 진지함을 거부하는 과장의 미학 양식으로 설명한다. 캠프는 고급과 저급을 가르는 기존의 가치 판단에 따르지 않으며 과장성과 연극성에 초점을 맞춘 미학 양식이다. 그래서 캠프는 탈권위적인 특성을 띤다.

 

캠프는 더 나아가 퀴어(queer)의 정신을 대변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은 젠더 이분법의 위계 방식을 흔드는 주제 의식을 담은 연극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본인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 본스타인은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의료적 트랜지션(transition)을 통해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그녀를 트랜스젠더라 부르면 되겠지만, 그/그녀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본스타인은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성별을 분류하고, 성별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멋대로 판단하는 젠더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그녀는 자신을 젠더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자유롭게 다양한 성별 또는 젠더로 살아가는 ‘젠더 무법자(gender outlaw)라고 소개한다. 사실 본스타인보다 훨씬 전에 ‘젠더 무법자’로서 살아가면서 캠프 미학을 사진으로 구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클로드 카엥이다. 퀴어 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클로드 카엥의 작품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카엥의 작품이 국내에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 Trivia

 

 

 

 

 

 

 

 

 

 

 

 

 

 

 

 

* 엘리슨 나스타지 《예술가와 고양이》 (디자인하우스, 2015)

 

 

 

‘Claude Cahun’의 표기명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클로드 카훈’, ‘클로드 카운’으로 부르기도 한다. 클로드 카엥의 약력을 볼 수 있는 책은 두 권뿐인데, 《위대한 사진가들》《예술가와 고양이》(디자인하우스)가 있다. 필자가 카엥의 삶을 요약했을 때 참고한 책은 전자의 책이다. 《예술가와 고양이》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아주 짧게’ 쓴 책이라서 카엥의 사진 예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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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2 17:43   좋아요 0 | URL
삶의 시작을 본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죠. 그래서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