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여행 -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신비한 여정, 2019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말린 쉬위 지음, 김창호 옮김 / 산지니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픔과 우울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이 아플수록 더욱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릿속을 꽉 채운 잡다한 상념을 비우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만의 방법을 사용해 슬픔을 잊어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 마음의 상처는 과연 모두 사라진 걸까?” 자아 성찰적인 질문을 나에게 던질 때 ‘그렇다’고 확신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힘든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도움이 되는 방법을 위급하게 찾아 헤맨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다짐과는 다르게 고통과 두려움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은 반복된다.

 

치유(healing). 우리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만,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일단 치유의 정의를 내리기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픈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일기 여행》은 자아 성찰에서 치유로 이어지는 내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다.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저자는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기는 글쓰기를 이용해 심신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치료법(therapy)이다. 마음속이 복잡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이에 뭘 쓰거나 낙서를 하면 마음이 진정되던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일기 쓰기 숙제를 하느라 끙끙대던 추억에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기는 누구나 혼자서 쓸 수 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날짜를 기록하며 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일기조차 남을 의식하고 써온 사람들에게는 이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때 《일기 여행》이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기 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일기 쓰기’란 무엇일까. 저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삶을 기록하려는 여성의 정신적 여행”이라고 말한다. 일기라는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 즉 종이 위에 단어가 되어 나타난 내 모든 감정은 ‘나’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진솔한 목소리에 대한 확인이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은 내 목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이런 멋진 행위를 여성이 마음껏 누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자와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책에 접근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 사회는 대부분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읽을거리도 제한했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필명을 만들어 작가 활동을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여성들은 자신만의 비밀 노트에 글을 쓰거나 일기 쓰기에 몰두했다. 수많은 여성이 남긴 일기장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고, 마음껏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었다.

 

‘일기를 읽는 행위’도 장점이 있다. 일기는 그것을 쓴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일기를 보면서 타인의 삶이 되어 그 사람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를 읽는 행위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일기는 타자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타자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일기를 보는 독자는 일기의 주인공 속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큰 도움과 위안, 나아갈 방향을 얻을 수 있다. 일기는 글쓴이의 사적 성찰에 대한 단순한 기록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경험과 깨달음을 들려준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를 쓰는 행위는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어차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대개의 기록이 사회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뭐라도 써야 한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 쌓여갈수록, 사회 전체의 표준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휜다. 그래서 특출한 경력이 없는 사람, 즉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많이 배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고상한 행위’라는 통념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말로 이익을 누리는 이들은 글쓰기로 밥을 버는 이들뿐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노동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밥을 챙겨 먹는 자신들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쓰기가 마치 대단히 신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인 양 꾸미곤 했다.

 

글쓰기는 ‘수준 높은 정신적 노동’이 아니다. ‘정신적 노동’임에는 분명하지만, 높은 수준의 지식과 사고력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대단한 교양인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교양인이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글의 본질적인 용도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과감히 들춰보자. 그런 다음에 마음을 편히 하고 종이 위에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사무치게 미웠던 사람에 대한 감정,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사건, 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되었던 일, 내년엔 꼭 하고 싶은 계획 등 주제를 잡아도 좋다.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데서 나온다. 일기 쓰기를 통해 여러 개의 나를 돌아보면 진짜 옹골찬 내면의 힘을 가진 새로운 내 모습이 정체를 드러낸다. 여러 개의 감정이 있던 내가 하나의 ‘나’로 합체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힘겹게 살아온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글쓰기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기를 쓰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일기는 새로운 글을 낳게 만드는 모태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쓰면서 글쓴이 스스로 자신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일기 쓰기는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그 ‘기록하는 과정’에 가치가 있다. 일기는 진정한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위한 지름길이다.

 

 

 

 

 

※ Trivia

 

역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국인 이름을 영어로 발음하는 방식대로 썼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소설 《빌러비드》를 직역하는 세심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표기에 맞게 쓰면 다음과 같다.

 

 

* 31쪽: 크리스타 울프(Christa Wolf) → 크리스타 볼프

 

* 71쪽: 리처드 바그너(Richard Wagner) → 리하르트 바그너

 

* 171쪽: 오더 로드(Audre Lorde) → 오드리 로드 (‘오드르 로드’라고 쓰는 사람도 있음)

 

* 295쪽: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 로베르트 슈만

 

* 310쪽: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사랑하는(beloved) → 《빌러비드》

 

* 317쪽: 조지아 오케이프(Georgia O’Keeffe) → 조지아 오키프

 

* 320쪽: 마리 배쉬커트세프(Marie Bashkirtseff) → 마리 바시키르트세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7-1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3   좋아요 1 | URL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일기와 독후감을 많이 썼어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잃었어요. 사실 공부만 하느라 글을 쓸 기회가 없었죠. 이상하게도 군인이 되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남겼어요. 오랜만에 글을 썼던 시기라서 저도 글을 어떻게 쓸지 막막했었습니다. ^^

2019-07-10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기와 리뷰의 공통점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

2019-08-1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30   좋아요 0 | URL
원래 그 분 강연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 분의 강연을 처음 분들은 당혹스러울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