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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어머니
데일 살왁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9년 5월
평점 :
첫 아이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통’이다. 출산 중 진통은 고통스러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작가들도 자신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아이 낳는 고통에 견주겠는가. 산모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진통은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아기가 질 밖으로 쑥 빠져나오면 그 길었던 통증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단한 성취감과 감동을 안겨준다. 산고 끝에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은 대개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작가들은 산고를 거쳐 탄생한 작품에 애착을 느낀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계속 던짐으로써 제자들 스스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다. 그가 진리의 탄생을 도왔기 때문이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답을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산파술의 핵심이다. 작가가 창작의 산고를 치르는 ‘산모’라면, 작가의 어머니는 산모의 출산(작품의 탄생)을 돕는 ‘산파’라 할 수 있다.
작가와 작가 어머니의 관계를 산파술에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와 창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 어머니의 존재감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서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까지 여덟 명의 영미 소설가 및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전기(biography)이다.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메리 아든(Mary Arden)은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기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에서 여성의 우위를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극의 전개를 쥐락펴락하는 가모장(家母長)으로 그려진다. ‘애바(Abba)’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애바는 루이자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애바는 루이자가 글을 쓸 때마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이자는 자신이 쓴 글을 애바에게 보여주었고, 애바는 루이자의 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루이자는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편지 한 통과 함께 어머니에게 보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양말에 나의 ‘첫 아이’를 넣어두었어요. 아무리 결점 투성이라도 엄마가 받아주실 걸 알아요. (할머니는 늘 자상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하게 해낸 일로 봐 주실 것도요. …‥ 이 책이 엄마를 기쁘게 해준다면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할 거예요.
(「야심만만한 딸: 루이자 메이 올컷와 어머니」 중에서, 55쪽)
애바는 루이자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녀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루이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물론 모든 작가의 어머니가 글 쓰는 자녀를 늘 자상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녀의 글쓰기를 매정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어머니는 아들이 극작가가 아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길 원했다.
2부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한 명의 작가들이 자서전 형식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쓴 글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언 매큐언(Ian McEwan)도 이 책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매큐언의 「어머니의 말: 회고록」은 작가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알 수 있는 글이므로 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글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으로,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은 여성을 의미한다. 이 뮤즈를 거론할 때 대부분은 ‘남성’ 작가의 아내이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은 늘 남성 작가를 보조하는 뮤즈로 호명되곤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예술사와 문학사 속에서 구축되어온 정형화된 뮤즈 이미지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성애 관계로 맺어진 남성 작가와 여성 뮤즈’ 이미지는 어린 시절 작가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자녀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보살펴준 어머니의 존재감을 가린다.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신이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자기 대신에 어머니를 같이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한 편의 글은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그녀의 말과 일정 수준의 문학적 능력을 물려받으면서 자란 작가들도 있다. 위대한 작가의 곁에는 문학을 좋아한 신과 같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창작에 몰두하는 자녀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촉진자’ 역할에 충실한 산파가 될 수 있다. 어머니가 촉진자 역할에 충실하려면 ‘갑’의 위치에 서지 않아야 한다. 구석구석 참견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친 애정도, 너무 애정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극단은 양자 모두에게 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