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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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올해의 절반이 지났지 않았지만, 내년도 올해만큼이나 특별히 기념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 내년이면 하퍼 리(Happer Lee)가 쓴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발표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소설은 경제 대공황으로 악화하여가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 위치한 앨라배마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무고하게 체포된 흑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의 이야기를 그의 어린 딸인 진 루이지 스카웃핀치(Jean Louise “Scout” Finch)의 시선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앵무새 죽이기미국을 대표하는 국민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소설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흉내지빠귀 죽이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흉내지빠귀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양서류의 울음소리까지 흉내 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능력이면 흉내지빠귀는 조류계의 주크박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능력은 앵무새를 따라갈 수 없다. 흉내지빠귀는 앵무새와는 전혀 다른 새이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서식지도 다르다. 흉내지빠귀는 미국에 서식하고, 앵무새는 열대 지방에 서식한다.

 

‘To Kill A Mockingbird’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진 해는 1990년이다. ‘청담문학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은 저작권자와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은 해적판이었다. 해적판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이다. 1992년에 앵무새 죽이기라는 익숙한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한겨레출판사)이 나온다. 혹자는 하퍼 리의 소설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로 잘못 알려진 것을 오역이 낳은 폐해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To Kill A Mockingbird’ 제목 오역 사례를 너무 나쁘게 볼 필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원문을 직역하는 것보다 국내 문화와 국내 독자의 성향을 고려한 초월 번역이 필요하다. 만약 흉내지빠귀 죽이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이 서점에 비치되었다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어느 정도 판매되었다고 해도 책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 제목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흉내지빠귀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중에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골라 보시라. 소설 제목을 직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의 익숙함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앵무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새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제목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번역 문제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건 시간 낭비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작 소설과 영화 둘 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간략한 줄거리와 애티커스 핀치의 명대사를 기억한다면 어디 가서도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밑줄을 좍좍 그어 종이가 더럽혀져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애티커스는 명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훌륭한 말을 여러 개 남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애티커스의 명대사는 아빠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스카웃을 다그치면서 했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김욱동 옮김, 64~65)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미국 남부 사회에서 흑인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다. 따라서 백인 여자를 해코지한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예상대로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학교에서 스카웃은 아빠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수군대는 친구의 말을 듣는다.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애티커스는 정의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묵묵히 변호 업무에 열중한다.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제대로 타인에 향해 다가서는 간단한 방법이다.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 도덕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다. 말로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어도 살아가다 보면 자꾸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이다. 편견은 차별, 혐오,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이겨내려면 타인의 경험을 똑바로, 그리고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심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작가 은유의 말을 빌리자면 온몸이 귀가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는 행위와 타인의 입장을 듣는 행위는 방법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타인을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말, 그것은 실천하는 자세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공허한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는 타인에 향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존중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애티커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207)고 말한다. 그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집중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서 확산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소설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팁(tip)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을 보면서 타인의 경험을 보고 있기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속을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러면 그 인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타인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소설에도 한계가 있다. 소설 역시 작가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스며들기 좋은 장르이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강렬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 묘사한 흑인은 백인우월주의 앞에서 제대로 힘쓰지 못하며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 흑인을 억압받고 고통 받는 피해자로 그려진 것이다. 소설 중반부에 흑인들만 드나드는 교회가 나오는데, 톰 로빈슨이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인은 핀치 집안의 유모 캘퍼니아(Calpurnia). 그녀는 교육을 받을 정도로 똑똑하며 흑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흑인 영어를 쓰기도 한다. 그녀의 행보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백인 가정의 흑인 유모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틀에 벗어나지 못한다. 흑인 여성에게 부여된 충실하고 순종적인 가사노동자 이미지는 백인들이 흑인 여성을 유모로 부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캘퍼니아를 집 밖으로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애티커스의 말에 확인할 수 있다.

 

 

오빠, 마음이 상냥한 것까진 좋아요. 오빠가 인정이 많은 건 알지만 생각해야 할 딸이 있잖아요. 점점 자라고 있는 딸이에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야.

회피하지 마세요. 조만간 직면해야 할 문제예요. 어쩌면 오늘 밤에 하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이제 우리에겐 그 여자가 필요 없어요.

아빠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알렉산드라, 캘퍼니아가 원할 때까지는 내보낼 수 없어. 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그녀 없이 살림을 꾸려 올 수 없었어. 그녀는 이제 어엿한 집안 식구고, 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 게다가 난 네가 우리 일로 골치를 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린 여전히 캘퍼니아가 필요해.

하지만 오빠―」

더구나 그녀가 애들을 키우면서 애들에게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엄격했으면 엄격했지‥…. 애들이 잘못하면 벌하지 않은 적도 한 번도 없었어. 흑인 유모들이 흔히 그러듯 애들은 버릇없게 그냥 내버려 둔 적도 없었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키우려고 애썼단 말이다. 그리고 캘퍼니아의 견해란 꽤 훌륭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 애들이 그녀를 좋아해.

 

(김욱동 옮김, 256~257)

 

 

애티커스는 캘퍼니아가 똑똑한 여성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집안에 있는 캘퍼니아를 똑똑한 흑인 여성이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우는 착하고 모성 본능이 강한 흑인 유모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 아니면 가사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쫓겨날 위기를 처한 캘퍼니아를 지켜준 애티커스를 훌륭한 아버지의 귀감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애티커스의 백인가부장적 온정주의는 위계적인 주인-노예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인지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맡은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녀도 흑인이라면 톰 로빈슨의 처지를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온 사람처럼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해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스카웃과 젬에게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집안일을 열심히 하느라 톰 로빈슨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신 발언이 백인 주인의 귀에 들릴까 봐 마음속으로 삼켰던 것일까. 스카웃과 젬(“Jem” Finch, 애티커스의 아들이자 스카웃의 오빠)에게 타인을 손님처럼 공손하게 대하라고 따끔하게 가르치던 소설 초반부에서의 모습과 무척이나 상반된다.

 

독자들은 애티커스를 인종 차별에 맞선 정의로운 변호사로 기억한다. 그의 이미지에 따라오는 단어는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이다. 독자들은 흑백영화 속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는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들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는 인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만 보고 남부인들을 인종 차별을 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북부인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개혁가로 추켜세웠고, 남부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종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북부인과 남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인종적 편견에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늘어났다. 남부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종종 남부인들의 인종주의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역사적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을 땐 등장인물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애티커스의 품성에 주목하면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방식은 낡았다. 출간 6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을 기점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풍성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1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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