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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인생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매번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어떤 이는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한 성취욕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내 집을 마련해서 예쁜 마누라 혹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Nora)는 우리의 이런 세속적인 물음에 “그래, 네가 원하는 데로 사니까 행복하니?, 행복하게 살고 있는 너는 ‘인형’이니, ‘인간’이니?”라고 다시 질문한다.
《인형의 집》은 여권신장운동에 불을 댕긴 사회극이다. 노라 헬메르(Nora Helmer)는 변호사인 남편 토르발 헬메르(Torvald Helmer)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지난 8년간의 결혼생활을 보낸 ‘아내’이자 ‘어머니’다. 그녀는 중병이 걸린 남편이 이탈리아에 요양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남편의 동료 변호사 닐스 크로그스타드(Nils Krogstad)에게 돈을 빌린다. 그 당시에 여성은 돈을 빌릴 수 있는 경제적 권한이 없었다. 노라 헬메르는 친정아버지의 연대 보증을 받아서 돈을 빌리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서 자신이 대신 서명하는 위증을 했다. 남편이 총재로 취임할 은행에 몸담고 있었던 크로그스타드는 해임 통고를 받아 실직자가 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는 자신과 노라와의 거래를 빌미로 노라 헬메르에게 자신의 해임을 번복시켜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내의 뒷거래와 위증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오직 자신의 출세와 명예에만 집착한다. 이에 노라 헬메르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아내란 인격도 개성도 없는 존재이며 종달새나 같은 한낱 인형에 불과한 것인가? 마침내 노라 헬메르는 인간으로서의 ‘노라’가 되고자 집을 박차고 나간다. 시민사회가 기대했던 ‘예쁘고 상냥하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조건을 완벽히 갖췄던 노라가 자아를 찾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는 결말은 당시로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인형의 집》이 초연된 지 올해로 140주년이 된 지금 자신의 자아를 찾아 집을 떠나는 노라의 결정은 우리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노라를 ‘여권주의자’로 바라보는 해석은 다소 진부하다. 노라는 주체적인 자아를 자각해가는 한 여성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또는 연극 공연을 보면서) 봉건 윤리와 사회적 인습에 순응하여 살아 온 ‘헬메르의 인형 아내’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에서 깨달음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노라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외침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옳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책에도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인형의 집》 3막 중에서, 164쪽)
※ 글꼴을 굵게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가부장제 사회 속에 사는 여성은 너무나 수동적이었고, 인형 같은 존재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나만의 생각’, ‘나만의 꿈’,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여성들은 ‘자기 삶의 의미’ 또는 ‘삶의 목표’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뚜렷한 언어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타자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는 것.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궁극에 절대적 자유를 얻는 주체적 존재가 되는 것.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삶에 관한 어떠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노라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기 전에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종의 성장 소설 같은 희곡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