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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The Catcher in the Rye》(‘호밀밭’)는 사춘기 소년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의 방황을 그린 소설이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는 학교 밖 ‘어른들의 세계’에 눈 떠가는 소년의 감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몇몇 독자와 비평가들은 《호밀밭》을 ‘청소년들의 필독서’라고 추켜세운다. 이 책이 좋은 반응을 얻은 까닭은 ‘참을 수 없는 젊음’을 분출하는 홀든의 모습이 같은 세대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 정치적으로 우파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1950년대 미국에서 젊은이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방황하는 홀든의 여정은 소년에서 성인으로 거듭나는 ‘성인식’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호밀밭》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형식을 빌린 소설이다. ‘청소년 독자를 위한 성장소설’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샐린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가 청소년 독자를 겨냥한 소설을 쓸 리가 없다. 샐린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썼다. 그는 1963년에 발표한 작품집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문학동네)에서 “난 집필이 좋고, 집필하는 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만을 위해,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글을 쓸 뿐이다”라고 언급했다[주]. 샐린저는 사춘기의 불안정한 정서와 반항적 행동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싶어서 《호밀밭》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떨게 한 내밀한 두려움과 불안, 자신을 슬프게 한 외로움과 좌절 등을 문장들 뒤에 살짝 숨기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 청소년들이 홀든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열광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호밀밭》은 대중문화 속에서 ‘반항하는 젊음’을 상징하는 책으로 등장한다. 1980년 존 레넌(John Lennon)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Mark Chapman)의 손에 들려 있었던 《호밀밭》은 그의 암살 동기가 바로 거짓과 위선에 대한 주인공의 절규 때문이라는 증언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지고, 급기야 서구 문화권에 기성 사회에 향한 냉소와 반항심을 뜻하는 ‘콜필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홀든이 본 ‘어른들의 세계’는 공허하고 모순적이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어른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거부하고 순수함을 간직한 어린아이, 특히 자신의 여동생을 지켜주는 ‘Catcher(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는 선수 또는 무엇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가 싶어 한다. 홀든은 희망 없는 세상 속에 ‘순수’라는 것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홀든의 소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순수한 세상’, ‘순수한 삶’은 허상(fantasy)에 불과하다. 홀든은 ‘순수함’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현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순수성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순수’에 집착하는 욕망은 엄청난 편협성과 배타성을 낳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홀든의 몸부림은 ‘여성’의 순수성을 찬양하는 ‘서양 백인 남성’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서양 백인 남성’의 남성성은 여성의 순수함이 변질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남성성이 부추기는 저항성과 폭력성은 외부의 오염과 위험으로부터 여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중요 수단이 되고, 소년이 ‘어른 남자’가 되기 위해 당연히 한 번쯤 허용할 수 있는 ‘통과의례’가 된다. 순수성에 집착하는 남성의 심리는 이중적이다. 순수성을 좀먹고 오염시키는 타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 순수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차지(지배)하려고 한다. 사회적 지휘가 낫거나 자신이 권력이 없다고 느끼는 남성은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한다. 부모와 교사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제대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홀든은 여성을 (성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어른’이 아닌 ‘남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여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춘부를 만나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 또는 확인한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은 ‘남자다움’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 홀든은 매춘부 포주 모리스에게 돈을 빼앗긴 후에 그를 총으로 죽이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소심한 복수를 하는데, 그 판타지에는 ‘승자’와 ‘강자’로서의 남성이 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그동안 독자들(특히 소년들)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홀든의 반항을 ‘듬직한 백인 남성’과 동일한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반항하는 태도를 ‘멋진 남성’의 표본으로 찬양하면서 그것에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바로 홀든 콜필드다’라고 주장했고, 《호밀밭》을 읽어보라고 말했던 존 레넌 암살범의 말이 ‘미친놈의 헛소리’로 들리는가. 내가 보기엔 코웃음 치면서 가볍게 흘러 들릴 말은 아닌 것 같다. 공격 성향, 무언가를 지배하려는 성향의 남성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 ‘마초’가 되고 싶은 홀든 콜필드는 더 많아질 것이다. 홀든 콜필드를 ‘저항의 상징’, ‘매력적인 성장소설의 주인공’으로 보는 진부한 평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콜필드 신드롬’은 지배적 남성성이 만들어 낸 신화의 일부에 불과하다. 무조건 남자들이 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는 건 아니잖은가. 여성들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드는 세상에 맞서 반항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남성들은 그런 여성을 히스테리 부리는 ‘위험한 존재’, 상종하기 싫은 사람으로 생각할까.
[주] 심상욱, 《J. D. 샐린저 생애와 작품》, 동인, 2011,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