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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경제학 - 폴 새뮤얼슨의 20세기 경제학을 박물관으로 보내버린 21세기 경제학 교과서
케이트 레이워스 지음, 홍기빈 옮김 / 학고재 / 2018년 9월
평점 :
올해 50주년을 맞은 노벨 경제학상은 미국의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뉴욕대의 폴 로머(Paul Romer)가 공동 수상했다. 노드하우스는 기후 변화의 경제적 효과에 관해 연구했으며, 로머는 지식 기반 기술 혁신을 통해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는 ‘내생적 성장 이론’을 제시하여 주목받았다. 노드하우스의 스승은 1970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이다. 새뮤얼슨이 1948년에 발표한 《경제학》은 거의 반세기 동안 전 세계 주류 경제학의 표준이었다.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원론 교과서가 됐으며 2009년까지 19판을 찍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19판은 새뮤얼슨의 마지막 저서이다. 《경제학》은 그에게 노벨상 수상의 명예보다 훨씬 실속 있는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을 안겨줬다. 노드하우스는 1985년 12판부터 《경제학》의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경제학은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새뮤얼슨이 즐겨 썼던 말이다. 경제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그 처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지만 꼭 어떻게 된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경제현상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끝없는 욕망과 완벽한 합리성을 갖춘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본다. 경제학 교과서의 설명에 따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정확한 판단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앞서 언급한 새뮤얼슨의 말을 돌이켜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실체에 갸우뚱해진다. 인간은 항상 합리적인 예측을 하면서 항상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다. 또 인간은 때에 따라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현실 속 인간은 경제학 교과서에서만 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전혀 다르다.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인간상과 현실의 인간상이 다를 때 교과서 속의 경제이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이런 경제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경제정책 역시 현실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기도 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해온 주류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소득이 많고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그 사람은 많은 이익을 얻고 더 행복해진다는 논리다. 소득이 많으면 직장과 사회에서 더 나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한 국가의 국부(國富)를 평가할 때 경제성장률과 GDP(국내총생산)를 핵심 도구로 사용한다. 그런데 세계는 수백 년 동안 물적, 양적 성장 신화로 엄청난 부를 얻었지만, 금융, 식량, 윤리, 인권, 기후 등 사회 곳곳에선 부작용이 일어났다. 자원 고갈과 환경오염, 금융 위기 등 성장의 한계가 분명해졌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성장’을 말한다. 과연 부를 더 많이 축적해서 경제가 하늘을 찌르듯 성장하는 것, 그것만이 인간 모두 잘 살게 해주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도넛 경제학’을 제시하면서 현실 경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만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20세기에 나온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 교과서와 이별하자고 말한다.
《도넛 경제학》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다른 경제이론을 소개한다. 그것도 경제학 전공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책이다. 레이워스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공정무역 거래에 대해 연구했으며 국제구호단체 옥스팜(Oxfam)에서 일했다. 그녀는 인류의 번영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중점을 둔 경제학을 ‘도넛 그림(한가운데에 구멍이 있는 도넛)’으로 시각화하여 설명한다. 도넛 경제학이 강조하는 것은 성장이 아닌 ‘분배’와 ‘균형’이다. 도넛의 안쪽 원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기초’를 나타내는 부분이다. 도넛의 구멍은 물이나 식량, 교육, 에너지 등 인류가 살아가는 데 절대로 없어선 안 될 필수 요소들이 고갈된 세계를 뜻한다. 바깥쪽 원은 ‘지구 생태 한계선’이다. 이 한계선을 넘으면 치명적인 환경 문제가 일어나 지구 생태계는 인류가 살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인류가 잘 살려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최적의 도넛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인류는 도넛 안팎으로 한계에 직면한 상태다.
저자는 사람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처럼 완전히 이기적이거나 금전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경제적 인간의 초상화를 제시한다. ‘새로운 경제적 인간’의 정체성은 다양하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비용과 혜택을 정확하게 계산할 능력도 없고, 완벽한 자기 통제력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 경제적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저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20세기 경제학 교과서의 숱한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발상 일곱 가지를 제안한다. 저자는 인류 발전을 설명할 때 주류 경제학처럼 높은 소득이 결정적 요인이 된다고 강조한다면 경제와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된다고 지적한다. 도넛 경제학은 복잡계 경제학, 생태경제학, 여성주의 경제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최신 경제 이론에 근거한 종합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도넛 경제학의 주연은 경제학자, 기업인이 아니라 소비자, 노동자 등 현실적인 경제적 인간이다. 저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한계가 있다며 행복과 경제, 부의 분배 정도, 환경 및 건강 등 인간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그간 우리를 지배해온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 같은 요소들이 지나치게 무시했다. 이제 경제적 부는 기업을 위한 이윤보다 인간 위주로 재편성돼야 한다.
모든 인간은 충분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 단, 지역 공동체와 인간적인 유대 관계가 확장된 사회를 만들고 스스로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노력을 갖출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지나치게 커진 이기심을 눌러야 한다. 도덕과 연대의식을 회복한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처음으로 설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 어느 때보다 공동체 의식과 상호성의 행동이 필요한 우리 사회에서 《도넛 경제학》이 주는 메시지는 새길 만하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는 ‘착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Trivia
* 70쪽에 있는 이 문장은 비문이다.
“하지만 도넛 그림은 사실상 거의 같은 않은 이야기를 과학에 기초해 설명한다는 걸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