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별명 중 하나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이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오래전 지구를 주름잡았던 최강의 육식공룡이다. 엄청난 양의 독서와 다양한 지적 편력을 자랑하는 에코에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는 별명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에코의 책 속에는 또 다른 책이 들어 있다. 책을 많이 읽은 독자일수록 에코의 소설 속에 암시하고 있는 책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에코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글쓰기에 여러 번씩 감탄하게 된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열린책들, 2009)

 

 

 

 

에코는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라는 글(문학과 관련한 에코의 강의록과 글을 엮은《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자신의 글쓰기 습관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그는 글을 쓰기에 앞서 책을 읽고 나면 소설에 나올 등장인물들의 초상화, 소설에 묘사할 장소들을 표시한 지도 등을 그린다고 한다. 에코는 이미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에서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밝힌 적이 있다.

 

 

 소설의 집필을 시작한 첫 해를 나는 바로 이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에 바쳤다. 중세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방대한 서명 목록을 뒤적거리는 일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어서 나는 등장인물이 될 만한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과 성격의 자료까지 준비했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41쪽)

 

 

에코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그저 소설 하나 써보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고 한다. 에코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어느 수도사가 도서관에서 살해됐다’는 상황이었다. 그는 소설을 쓸 땐 언제나 ‘씨앗’ 같은 사소한 생각에서 출발해 인물들이 움직이는 소설의 전체적인 배경을 만들어내고, 글 쓰는 작업은 맨 나중에 한다고 밝혔다. 에코는 한 권의 소설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을 ‘자신만의 세계(소설)를 구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비유하면서 길게는 8년이나 걸린다고 했다. 작가는 지금 존재하는 세계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세계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작가는 종이 위에서 현실을 부수고 새로운 언어의 집과 세계를 만들어 낸다. 에코는 일 년에 한 편씩 장편소설을 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일 년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코가 생각하는 문학은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에코는 오로지 독자를 위해 소설을 썼다. 그는 설혹 우주의 종말을 앞둔다고 해도 글을 계속 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주의 종말에서 살아남은 미래의 누군가가 자신이 쓴 글의 기호들을 해독할 것으로 기대했다. 에코가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알고 나서 다시 그의 소설들을 다시 읽으면 그 책에서 한번 봤던 부분을 다시 보게 된다. 에코는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요소, 즉 이스터 에그(easter egg: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숨겨 놓은 재미있는 것들)를 아주 살짝살짝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 움베르토 에코 《제0호》 (열린책들, 2018)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 2009)

 

 

 

독자를 위한 에코의 장난기 어린 애정은 그의 마지막 소설 《제0호》에서도 변함없이 보여준다. 에코가 문장 곳곳에 숨겨둔 이스터 에그를 찾아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에코의 수필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은 《제0호》의 이스터 에그를 찾는 데 유용한 단서 중 하나이다. 이 수필집에 수록된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셰틀랜드의 가마우지를 가지고 특종 기사를 만드는 방법』을 읽으면 《제0호》의 이스터 에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문학과지성사, 2018)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민음사, 2017)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1 : 미스터리 편》 (코너스톤, 2015)

*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바다출판사, 2010)

 

 

 

 

 

 

 

 

 

 

 

 

 

 

 

 

 

 

 

 

 

 

 

 

 

 

 

 

 

 

* 코난 도일 《셜록 홈스의 모험》 (엘릭시르, 2016)

*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모험》 (코너스톤, 2016)

* 코난 도일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현대문학, 2013)

*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모험》 (문예춘추사, 2012)

*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모험》 (황금가지, 2002)

 

 

 

 

《제0호》 1장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추리소설 『모르그 거리의 살인』『도둑맞은 편지』, 그리고 코난 도일(Conan Doyle)셜록 홈즈 시리즈와 관련된 문장이 나온다.

 

 

 

 내 아파트에 벽난로가 있다면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 나오는 커다란 원숭이가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에는 그런 벽난로가 없다.

 

(13쪽)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친애하는 와트슨, 급수관의 손잡이는 밤중에 잠긴 거야. 물론 자네가 잠근 건 아니지.

 

(13쪽)

 

 

  그들은 무엇을 찾아내리라고 기대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우리 신문에 관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우리가 편집부에서 하고 있던 모든 일에 관해서 내가 메모를 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브라가도초 사건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어딘가에 적어 놓았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모든 것을 디스켓에 보관하고 있으니까. 분명 그들은 간밤에 편집부 사무실에도 들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디스켓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쯤 디스켓이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고 결론을 내고 있으리라. 우리가 멍청했어, 그자의 재킷을 뒤져 보았어야 하는데, 하고 그들은 푸념하고 있을 것이다. [중략]

  이제 그들은 다시 올 것이다. 적어도 탐정이 <도둑맞은 편지>를 찾으러 오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가짜 소매치기들이 길거리에서 기습을 가할지도 모른다.

 

(14~15쪽)

 

 

 

‘친애하는 왓슨(My dear Watson)’은 홈즈가 자주 쓰는 말 중 가장 유명하다. 내가 인용한 《제0호》 14~15쪽 문장은 포의 『도둑맞은 편지』와 홈즈가 나오는 단편 『보헤미안 스캔들(《셜록 홈즈의 모험》에 수록되어 있다)와 관련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인 탐정이 비밀 편지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둑맞은 편지』의 범인은 별다른 장치 없이 훔친 비밀 편지를 숨기는 트릭(속임수)을 쓴다. 『보헤미안 스캔들』에서 홈즈는 편지를 가지고 있는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에게 접근하기 위해 목사로 변장하여 자신이 고용한 가짜 소매치기들과 함께 ‘연극’을 펼친다. 에코는 추리소설이 탄생하는 데 기여한 두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한 이스터 에그를 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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