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으로 그림을 읽다
미야시타 기쿠로 지음, 이연식 옮김 / 재승출판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보통 언어의 교환만 대화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사소한 몸짓이나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 역시 언어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애절하게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사랑하는 이의 표정 하나,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겁고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의미의 교환이 일어나지 않을 때 싸움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무심코 사용하는 몸짓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마음의 유리창과 같다. 우리는 말 이외에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말보다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인간의 속내를 더 잘 나타낸다. 왜냐하면 말은 의식적인 통제 아래 표현되지만, 몸짓은 무의식 상태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몸짓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숨어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1인 가구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이웃이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의 몸짓을 응시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연예인의 몸짓만 응시할 뿐이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보다 몸짓으로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한다. 하나의 영토에 여러 민족과 어울려 살아온 역사가 긴 탓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단일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몸짓 언어를 잘 쓰지 않는다. 말보다 ‘몸’이 위주가 되는 공연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 몸 중심 공연 형식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마임(mime)이다. 마임은 ‘흉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마임은 사람이나 사물을 몸짓으로 흉내를 내는 희극배우를 지칭했다. 이 마임이 중세에 이르러 언어를 배제한 채 몸짓으로만 이뤄지는 공연 양식을 지칭하게 된다. 교회가 연극의 현실 비판 기능을 누그러뜨리려 언어 사용을 금지한 데 대한 대응으로, 대사를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표현하는 마임의 양식화가 이뤄졌다. 마이머(mimer, 마임 배우)의 몸짓 자체가 언어이다. 연극의 대사만으로도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의 모호함을 언어 없이 몸짓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행위예술의 기본이다. 결국 마임은 몸에서 시작하지만, 환영(幻影)으로 끝나는 예술인 셈이다. 마이머가 침묵과 몸짓으로 건네는 말을, 관객들이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대사 없이 인물의 몸짓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림은 마임과 무척 닮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몸짓 하나하나에 주목해야 하는 마임과 달리 그림으로 표현된 몸짓은 영구 보존된다. 감상자는 그림 속 등장인물의 몸짓을 천천히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림 속 등장인물은 몸짓을 통해 의미를 전하고, 그림 밖 감상자는 인물들의 몸짓을 따라가면서 그림 속에 있는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대사 없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인간들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문화와 정서 속에 녹아들 때, 그 그림은 여전히 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서 있지 않을까 싶다.

 

《몸짓으로 그림을 읽다》는 서양미술과 일본 미술에 표현된 다양한 몸짓에 주목하여 그림 속 이야기를 풀어낸다. 저자에 따르면 미술에 등장하는 몸짓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표정도 포함된다), 둘째는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몸짓(정적인 몸짓), 셋째는 어떠한 특정 행동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몸짓이 있다. 그림은 전문가가 아니면 정확하게 화가의 의도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알려준 40가지의 몸짓과 동작의 의미를 그대로 그림에 얹어 감상하기만 해도 온전히 그림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은 미술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몸짓과 동작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동서양의 몸짓 언어 가운데 특히 수신호는 상반되는 것이 많다. 동양에서는 손가락을 굽히면서 수를 세지만, 서양에서는 손가락을 펴면서 셈을 한다. 우리가 승낙이나 돈의 사인으로 엄지와 중지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선 비슷하나 브라질 등 일부 남미국가에선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승리’를 뜻하는 V자 손가락 동작을 하면서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 그러나 V자 손가락 동작을 할 때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해야 한다. 손등을 보이는 V자 손가락 동작은 욕설이다. 이 책은 같은 몸짓과 동작이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풍부한 도판을 소개하면서 비교한다. 일본인 출신 저자의 집필 특성상 책에 실린 도판 중에 국내 독자들이 자주 접하기 힘든 일본 전통 미술 작품과 일본 근현대 미술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저자가 동양 문화의 특징을 일본 문화로 한정하여 설명했기 때문에 한국, 중국 미술에 대한 언급이 적은 편이다. 이 책에 유일하게 (아주 잠깐) 언급된 한국 미술 작품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저자가 쓴 후기는 책을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책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서 잡지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이다. 글이 연재되는 기간에 저자의 외동딸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 딸이 병원에서 지냈을 때, 가장 흥미롭게 본 글은 이 책에 실린 『기도하다』 편이었다. 기도는 ‘침묵의 언어’이다. 고백과 참회의 기도든, 희망과 염원의 기도든 극도의 진지함을 담은 침묵으로 기도를 한다. 기도하거나, 기도하는 사람(orans, 오란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딸은 아버지가 쓴 글과 그 속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림은 그 자체가 치유이다. 미술을 감상하며 보내는 시간이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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