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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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Marx)《공산당 선언》에서 구체제를 뒤흔드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여 결국은 전 세계적인 권력을 잡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수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공산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전 세계적인 권력을 잡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의해 주도되는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식이다. 시장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거래와 교환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선택, 서열화,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 결과 상품 및 인간관계를 특권화하거나 황폐화한다. 특히 자본 축적을 위해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포섭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착취를 이윤으로 바꿔버린다. 인간의 노동력은 자본이 유통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핵심은 자본의 자유가 역사상 어느 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화되었고,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축적 과정이 허용됨으로써 인간적 삶의 틀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본 축적은 자본주의가 이행되는 역사와 함께할 만큼 오래됐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이 피와 오물을 뿜어대면서 지상에 나타났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자본의 태동 과정인 ‘시초 축적(primitive accumulation)농민 공유지에 대한 야만적 약탈에서부터 시작된다. 자본 축적 역사의 첫 장면에 나오는 공유지 약탈은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알려진다. 역사적으로 인클로저 운동은 크게 두 차례 일어났다. 15세기 지주들은 자기 땅을 가지기 위해 공유지에 울타리를 쳤고 그 땅에서 일하던 농민들을 쫓아냈다. 땅을 강제로 빼앗긴 농민들은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19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도시로 건너갔다. 이들이 직면한 도시는 이미 자본주의의 물결이 퍼지고 있는 세계였다. 즉,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 생존이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시초 축적 개념을 언급하면서 궁핍과 실업의 공포에 떠는, 도시 노동자와 빈민 들이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농민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가차 없이 때려 부수고 공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빈곤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마르크스가 시초 축적을 설명하면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그 중대한 사실이란 15~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럽에 행해진 마녀사냥을 악마와 마법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이 만들어 낸 광기의 역사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을 자본주의의 도입과 이행 과정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존에 알려진 마르크스의 시초 축적 개념을 보충한다.

 

그동안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자본주의를 연구한 학자와 역사가들은 농민이었던 남성들이 도시 노동자가 되어 가는 과정들만 언급했다. 그러나 인클로저 운동 이후 여성은 임신과 육아, 그리고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여성은 남성처럼 상업 공간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여성의 활동은 재생산 노동(출산, 보육, 가사 노동)에 한정되었고, 여성이 남성처럼 일한다고 해도 그에 따른 임금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무산계급)이나 다름없었으며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태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여성의 노동이 착취된 사례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데리치는 마녀사냥이 자본주의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 즉 ‘시초 축적’의 사례라는 점에 주목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남성의 노동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임금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남성과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생산 기계’가 되었다. 여성의 역할은 그저 집에서 머무르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재생산 노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출산과 무관한 성행위와 피임을 막아야 한다. 중세의 여성들은 약초를 이용한 피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출산 통제를 위한 지식은 여성 공동체 내부에서 공유되어 전해졌다. 그렇지만 공유지가 사라지면서부터 여성의 출산 통제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삶의 희망을 잃은 농민들은 땅을 강제로 약탈한 지배 계급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픈 지배 계급은 여성을 탄압하는 전략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농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로 인해 빈민 또는 범죄자가 된 남성들은 자신들이 불행해진 이유를 ‘마녀의 사악한 힘’에서 찾으려고 했다. 남성들은 여성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비난했고, 죄 없는 여성을 마녀라고 지목하면서 화형대 위로 올려세웠다. 그 결과, 국가는 여성의 신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노동하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여성의 사적 영역인 출산에 개입하는 근대적 통치술이 등장한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개인의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실체를 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마르크스처럼 마녀사냥을 주목하지 못했다. 페데리치는 푸코의 입장도 비판한다.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통치술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장될수록 위력을 떨친다. 제국주의의 기세가 만개를 떨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토착민을 강제로 몰아내어 식민지를 약탈할 때도 이 통치술을 이용했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캘리번(Caliban)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마녀의 아들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자본주의적, 반식민지적인 세력을 ‘캘리번’과 같은 괴물로 묘사했다. 자본주의는 자신들이 착취하는 대상을 깎아내릴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마저 지우려고 했다. 자본주의는 부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적인 괴물은 수많은 사람을 몰아내거나 잡아먹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빼앗은 것은 안정적인 삶뿐만 아니다. ‘희생양’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공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괴물들을 태어나게 했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확산하면서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난민 차별 문제가 더해지고 있다. 여성, 성소수자, 난민이 '괴물'로 오해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로 인해 정의롭지 못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연대의식과 응집력,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인간성마저 괴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캘리번과 마녀》는 신자유주의가 가져다준 풍요에 눈멀고, 신자유주의가 만든 희생양에 속기 쉬운 이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이 우리의 삶을 좀 더 성찰하게 하고 거대한 세상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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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9 11:28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도 그 점을 지적했고, 여성 간의 경제력 차이가 여성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2018-10-1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9 11:30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푸코의 이론이 언급된 책이라 내용이 어려울 수 있지만, ‘마녀사냥’을 재해석한 책의 3, 4장을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