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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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이 말은 일본 추리문학의 대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의 시그니처(signature)다. 그는 사인할 때 이 시그니처를 썼다고 한다. 란포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필명인데,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에서 따온 것이다. 포는 추리소설과 심리적 공포소설의 창시자다. 미국 문학의 약사(略史)를 쓴 적이 있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포가 끼친 문학사적 영향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포는 보들레르(Baudelaire)를 낳고,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자들을 낳고, 상징주의자들은 폴 발레리(Paul Valery)를 낳았다.”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포는 에도가와 란포를 낳았다.

 

에도가와 란포 작품의 매력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이 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의 작품에 빠져들면 어디까지가 상상의 세계이며 어디서부터 현실 세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독자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외줄에서 쉽사리 내려오지 않는다. 란포가 그려 보이는 작품 속 상황들은 마치 현실 속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불안, 공포, 경악 등의 혼미한 상황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권(도서출판 두드림, 2008)탐미적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grotesque: 기괴함), 그리고 환상성난센스 요소가 가미된 묘사가 주를 이룬 총 2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란포의 단편을 읽으면 소재의 창발성에 놀라고, 때론 광기 어린 감정 묘사에 혀를 내두르고, 때로는 기발함에 멈칫하게 된다. 물론 일본 추리 · 미스터리 문학 작품의 범람 속에서 란포의 작품도 진부한 고전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란포는 진지하게 인간의 무서운 환상과 가학적인 충동을 파고듦으로써 공포 문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고구마 벌레』는 음울하고 어두운 인간의 극단적 욕망과 광기를 현실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나기 중위는 전쟁으로 양손과 양다리를 잃어 몸체만으로 생활하는 장애인이다. 란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긴 정신적 외상의 고통도 보여주는데, 자신만의 색다른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전쟁의 참상을 전달한다.

 

란포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30년대의 일본의 문화적 분위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문화계를 지배하던 키워드는 ‘에로 그로 난센스’였다. 『인간 의자』『복면 무도회』는 공통으로 ‘신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신여성’은 여성에게 한정됐던 사회, 정치, 제도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근대에 새롭게 나타났다. ‘에로 그로 난센스’ 시대 속에서 신여성은 남성들의 에로틱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었다. 남성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신여성들을 마음껏 조롱하거나 성적인 자극을 은밀히 즐겼다.

 

『인간 의자』의 요시코는 소설가로 활동하는 신여성이다. 가난한 가구공은 여성의 몸에 과도하게 애착을 보인다. 그는 ‘서양식 의자’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서 지낸다. 가구공의 의자 위에 여성이 앉으면 가구공은 의자 안에서 여성 몸의 접촉을 통해 나오는 쾌락을 즐긴다. 호텔에 있던 가구공의 의자는 요시코의 집으로 옮기게 된다. 가구공은 요시코의 몸을 탐할수록 점점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가구공은 ‘에로틱한 일탈’을 통해 결핍된 욕망을 채운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변태성욕자’라고 부른다. ‘에로 그로 난센스’ 시대는 비정상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변태’로 분류했고, ‘변태성욕자’는 그 시대 언론이 폭넓게 쓰면서 대중에게 깊이 각인됐다.

 

『복면무도회』에 묘사된 신여성은 퇴폐와 타락의 이미지다. ‘20일회’는 에로틱한 유희를 즐기는 비밀 사교 모임이다. 친구 이노우에 지로의 소개로 20일회 정식 회원이 된 화자는 ‘가면무도회’를 가장한 섹스 모임에 참석하는데, 실수로 친구의 아내 하루꼬를 선택해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다. 의도치 않게 불륜을 저지른 화자는 도리어 친구의 아내를 탓한다.

 

 

  엄연히 남편이 있는 여자가 어떻게 낯선 남자랑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이런 장소로 올 때가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루꼬 씨가 그런 여자일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주]

 

 

하루꼬는 남편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다. 그러나 ‘결혼’은 신여성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다. 그녀가 사교를 가장한 퇴폐적인 모임에 참석한 것이 기존의 가부장적 가치관(‘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는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에 균열을 내고 틈을 만드는 전복적인 일이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여성들은 여성 자신의 인격과 개성에 대한 존중, 자유연애 등을 외치며 당당하게 구습의 족쇄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신여성들은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이유로, 남의 가정을 파탄 냈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비난을 받았다. 화자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외간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하루꼬에게 전가한다. 그러면서 성적 일탈을 저지른 여성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란포는 극단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즉 변태성욕자, 하층민, 무능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그로테스크한 시대상을 포착했다. 대부분 공포 문학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다루었던 데 반해, 란포의 공포 문학은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이거나 괴이한 사건들을 결합한다. 란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알 수 없는 광기의 소유자, 공포와 악의 근원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음울한 존재이지만, 사회에 융합되지 못한 고립된 외로운 인간들이다. 란포는 사회에 배제된 존재들에게 일어나는 음산하고 알 수 없는 기괴함을 묘사할 때 아이러니와 유머를 결합하는데 이는 이들의 숨겨진 욕망의 실상을 더욱 추악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란포의 공포 문학 작품은 단순하지만 독특한 서사, 그리고 이 서사를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환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주]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복면무도회』,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도서출판 두드림, 2008, p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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