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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 - 근대 일본의 대중문화
미리엄 실버버그 지음, 강진석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4월
평점 :
에로티시즘은 삶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면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돼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감각의 제국>은 1930년대 일본의 성(性)의 망상과 강박에 의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남자의 성기를 잘라서 일주일 동안이나 손에 들고 다니던 여자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 낸 것, 이것이 <감각의 제국>이다. 영화는 한 남녀가 섹스에 탐닉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음식점 종업원 아베 사다(阿部定)는 자신이 일하는 음식점 사장인 이시다 키치조(石田吉藏)를 사랑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이었다. 집에 틀어박힌 두 사람은 애욕의 생활에 빠져들었다. 사다는 키치조를 자신의 영원한 남자로 만들기 위해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성기를 잘랐다. 언론들은 그녀가 저지른 엽기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놀랍게도 일본인들은 사다를 동정했다. 심지어 그녀를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다 신드롬’ 덕분인지 법원은 그녀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복역 5년 만에 사면됐다. 아베 사다 사건은 일본 전역을 삼킨 그로테스크한 사건이다. 그로테스크는 ‘괴기하거나 극도로 부자연한 것’을 의미한다. 엽기적인 것은 그로테스크하다. 아베 사다 사건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역겹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매우 엽기적인 살해를 저지르고, ‘변태성욕자’로 판정받은 그녀에 열광했을까?
<감각의 제국>에서 ‘제국’은 그대로 1920~1930년대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 ‘감각’은 그 시대 일본에 유행했던 문화, 즉 ‘에로 그로’를 상징한다. ‘에로 그로’는 말 그대로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난센스’가 추가되면서 ‘에로 그로 난센스’라는 좀 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 복합체가 탄생하게 됐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일본 대중문화의 뿌리는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에로 그로테스크 넌센스》(미리엄 실버버그 저, 현실문화, 2014)는 1920~1930년대 일본을 관통한 ‘에로 그로 난센스’의 특징을 파헤친 책이다. 이 책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욕망과 금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발달한 ‘에로 그로 난센스’가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몽타주(montage, 모아서 조합하는)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근대 문화 질서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엄청난 에너지’, ‘창조 욕구’,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도전’이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사회문화적 코드로서의 탈 전통사회,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 질서이다. 이러한 문화 질서 안에서 도발적인 에로티시즘과 기괴한 취향에 눈과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욕망이 분출되었다. 모던 걸, 카페 여급, 아사쿠사 공원의 프릭 쇼(freak show)등은 ‘에로 그로 난센스’ 열풍에 힘입어 주목받았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전시(戰時) 일본의 근대 소비문화만이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제국의 권력에 저항하는 속성도 지녔다. 난센스는 권력의 통제를 비웃고 위협하는 수단이 되었다. 저자는 1920~1930년대 일본 대중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일본 대중은 자유로운 소비 주체이면서도 ‘천황의 신민(新民)’이었다. 저자가 새롭게 규정한 근대 일본의 ‘에로 그로 난센스’는 단순히 음란하고 엽기적인 것을 재현하는 하위문화가 아니다. ‘에로 그로 난센스’ 문화를 누리는 소비 주체에는 거지, 부랑자 등과 같은 밑바닥 계층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에로 그로 난센스’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소비 주체의 언어, 사고, 행동 등을 포괄하는 역동적인 문화이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일본 대중의 억눌린 감각을 거침없이 자극했다. 국민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제국의 권력은 일방적이었지만, 이에 맞서는 ‘에로 그로 난센스’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전운이 감도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했고, 신식 문화를 소개한 잡지를 보며 에로틱하고 엽기적인 사건에 열광했다.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대중적 삶과 문화적 감수성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근대성을 띠기 시작했다. 아무리 음침한 역사라고 해도 그 이면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