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박람회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국제 행사로 꼽힌다. 세계박람회를 개최할 경우 국가 위상을 높일 뿐 아니라 경제적 파급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인다. 흔히 엑스포(EXPO)라고 불리는 세계박람회는 세계박람회기구(BIE)가 공식 인정한 공인 엑스포와 비공인 엑스포로 나뉜다. 비공인 엑스포는 전시 수준이나 규모가 공인 엑스포에 비교해 훨씬 규모가 작은 편이다. 참가국의 국가 명칭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지역 행사로 치러진다. 우리나라는 공인 엑스포를 두 차례 개최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2012년 여수 엑스포다.

 

 

 

 

 

 

 

 

 

 

 

 

 

 

 

 

 

* 안나 잭슨 《엑스포, 1851-2010년 세계박람회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 [절판] 오룡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 (다우출판사, 2012)

* 이민식 《세계박람회 100장면》 (이담북스, 2012)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 박람회[1]이다. 산업 혁명 이후 기술과 산업 분야에서 급성장한 영국은 이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다.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전시관인 수정궁(crystal palace)이 세워져 경탄을 자아냈다. 박람회는 최첨단 상품과 기술 외에 보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대중오락을 갖춘 전시행사다. 런던 박람회를 시작으로 대중들은 다양한 볼거리를 접하기 위해 지정된 장소로 옮겨 다니며 관람이란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 [절판]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2005)

* [절판] 요시미 순야 《박람회 : 근대의 시선》 (논형, 2004)

 

 

 

그런데 근대 박람회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우월감을 교묘히 드러내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값이 매겨지는 자본주의 체제인 만큼 사람도 돈의 힘에 밀려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근대 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물과 식민지에서 얻은 재화를 전시하고 여기에 새로운 상품과 소비, 오락을 더해 대중의 욕망을 재현한 ‘스펙터클한 공간’이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람회는 상품뿐만 아니라 인간도 전시했다. 1851년 런던 박람회에서 수정궁을 선보이자, 이에 질세라 프랑스는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에펠탑을 공개했다. 당시 에펠탑이 세워졌을 때 이 건축물은 파리지앵의 혐오 대상이었다. 문화 · 예술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에펠탑을 파리의 우아함을 헤치는 철골 덩어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인종 전시장’을 만든 파리 박람회의 부끄러운 전시계획에 대해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 박람회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모아놓고 전시했다. 가슴 아픈 일지만, 우리나라 사람도 세계박람회 전시대상이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최초로 참가했다. 대한제국으로 국명이 바뀐 이후에도 박람회에 참가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세계의 주변인으로 전락했다. 1907년 일본 도쿄에 열린 비공인 박람회(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남성과 여성 두 명이 유리관에 전시되었다.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2014)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사, 1998)

 

 

 

근대 박람회의 인종 전시장은 인종주의만 재생산되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가 서로 맞물리면서 작동하는 복잡하고도 강력한 억압 이데올로기가 재현되어 왔다. 16~17세기에 유럽은 중간무역과 식민지 정복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구조를 분석한 마리아 미즈는 이 시기를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노예무역 상인들은 아프리카 민족을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었다. 마리아 미즈는 무역이 발전하면서 노예제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남성이 가부장 권력과 무기를 독점하는 ‘전사-사냥꾼’이 되면서부터 이미 나타났다고 본다. 노예사냥꾼, 노예무역상인 그리고 노예를 사고파는 자본가들은 아프리카 여성(흑인여성)‘야만인’ 또는 ‘성적 동물’로 취급하여 착취했다.

 

 

 

 

 

 

 

 

 

 

 

 

 

 

 

 

 

 

 

* [절판]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 (문학동네, 2011)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지평을 연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여성의 몸이 포르노그래피적 취급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노예가 된 흑인여성은 백인 남성 노예주의 쾌락을 채워주는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았다. 특히 흑인여성의 몸은 ‘관음의 대상’으로 전시 · 소비되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알려진 사르키 바트만(사라 바트만)[2]인종주의와 성차별이 만들어 낸 포르노그래피의 희생양이다. 그녀는 런던 피커딜리 거리에 전시되었다. 피커딜리 거리는 신체 이형을 가진 사람들을 전시하는 프릭 쇼(freak show)의 본거지였다. 호텐토트(Hottentot)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 족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다. 사르키 바트만은 엄청나게 큰 가슴과 특이한 엉덩이를 드러낸 반나체로 프릭 쇼와 서커스에 끌려다녔다. 백인들은 사르키 바트만을 야만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섹슈얼리티를 가진 벌거벗은 동물로 취급했다.

 

사르키 바트만 쇼는 ‘관람하는 포르노그래피’이며 박람회 인종 전시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인종적 · 문화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유럽인들은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식민지인들을 구경했다. ‘야만인’의 전시를 통해 식민지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박람회는 인간의 과시욕과 무지, 편견, 그리고 차별이 뒤섞인 장소였다. 박람회를 개최한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여 그녀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오직 성적 대상으로만 재현 · 소비했다. 근대 박람회 인종 전시장과 사르키 바트만 쇼는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를 닮았다. 근대 박람회는 ‘EXPORNO’ 또는 ‘XXXPO’[3].

 

 

 

 

 

[1] 흔히 ‘런던 만국박람회’로 알려졌으나 ‘만국박람회’는 일본식 표현이다. ‘만국박람회’ 대신에 ‘세계박람회’ 또는 ‘엑스포’라고 쓰자.

 

[2] ‘사르키’는 크리올어(아프리카 원주민 언어) 이름으로 바트만을 자신의 이름을 ‘사르키’라고 칭했다. ‘사라’는 영국식 이름이다.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 14~16쪽)

 

[3] ‘EXPORNO’는 ‘EXPO’와 ‘Porno’의 합성어다. ‘XXXPO’는 ‘XXX(포르노그래피 도메인)’와 ‘EXPO’의 합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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