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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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상대편이 컴퓨터인지 진짜 인간인지 대화 당사자인 사람이 구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통해 진짜 인간의 반응과 컴퓨터의 반응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설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을 제시하여 튜링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방 안에는 중국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중국어로 적힌 질문을 받으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답변을 보낸다. 질문자는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중국어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존 설은 ‘중국어 방’의 역설을 들면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스스로가 어떻게 자의식과 마음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총체적 지적능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이 있다(한 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과연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이 편안함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차(茶)가 될 수 있을까? 위안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맴도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철학만 한 게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김재인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컴퓨터와 마음’이라는 제목의 철학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 들뢰즈에 대한 언급(133, 174쪽)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저자의 논변을 ‘거들고 있는’ 엑스트라다. 사실 이 책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철학자는 플라톤데카르트다.

 

저자는 튜링의 오래된 질문, 즉 “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몸과 마음, 생각, 시간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하는 것(과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성찰(인문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창구로 통하는 겹창이다.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탐구대상이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아직 마음과 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밝혀낸 것은 없다. 따라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그 ‘내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내공’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즉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 등의 창조적인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인공지능이 시행착오, 즉 ‘버그(Bug)’를 만나면 작동이 멈춘다. 창조적인 일은 인공지능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할 능력이다.

 

저자는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일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분위기가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튜링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한 호흡에 끝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라는 부제를 감안하면 과학보다는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다루다 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보인다. 170~175쪽에 저자가 새뮤얼 버틀러《에레혼》(김영사, 2018)의 ‘기계들의 책’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버틀러는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기계도 인간처럼 진화하여 ‘재생산(생식)’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기계(기술)의 진화’를 예언하는 입장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실은 버틀러는 ‘기계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계의 진화’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미래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에레혼》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에레혼》의 ‘기계들의 책’은 기계의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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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0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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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6 11:40   좋아요 0 | URL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불평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돈, 정보, 그리고 기술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가질 것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부가 편중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