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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아름다움 - 김율의 서양중세미학사강의 ㅣ My Little Library 2
김율 지음 / 한길사 / 2017년 12월
평점 :
이제 막 4월 중순이 지났다. 지금부터 다음 달 독서모임 ‘우주지감’ 선정도서를 읽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달 선정도서는 ‘두 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아직 안 읽었다. 이 와중에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책들에 눈길을 준다. 벌써 다음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다가는 망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안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그중에 고른 책이 《중세의 아름다움》(한길사, 2017)이다. 책의 주제에 이끌려서 고른 게 아니다. 이 책을 고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중세의 아름다움》은 다음 달 ‘우주지감’ 선정도서와 관련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건 다음 달 독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미학의 오랜 주제이다. 미학을 공부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나 경험을 스스로 살펴보게 된다. 이 과정은 미적 조화를 통해 완성된 예술작품들을 다시 삶 속으로 환류하게 하는 융통의 장을 열어준다. 따라서 미학은 엄연한 지성사의 일환이다. 중세철학을 전공한 김율 교수가 쓴 《중세의 아름다움》은 중세미학의 존재를 추적한 사유의 기록이다. 저자는 중세미학이 갖는 역사적 ·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시선에 따라 중세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핀다.
중세미학은 비례와 조화를 강조했던 고대미학(고대 그리스, 로마)을 뿌리로 삼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 방식은 고대미학이 물려준 자산이었다. 즉 중세에도 ‘아름다움’은 배척당하지 않았다. 중세에 스테인드글라스, 고딕 양식 등이 유행됐다는 사실은 아름다움이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중세미학은 그리스도교 문화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아름다움(‘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초월적 존재인 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속성이다. 고대미학의 개념적 유산인 비례와 조화 같은 범주는 신의 속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성적 아름다움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신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격상시켰다. 중세 신학자들은 신 자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이 책에 소개된 아우구스티누스, 위(僞) 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신학자(또는 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자신의 시대에 ‘미학’을 입힌 중세미학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네 사람의 인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지속적으로 주장됐던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세히 정리하고 이를 고대미학과 비교 고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을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성적인 사랑, 즉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인격적 사랑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세상에 은밀하게 숨겨진 신의 섭리, 즉 아름다움을 읽어내려고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에 등장한 성자의 이름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익명의 신학자이다. 지금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선(善)’과 빛, 그리고 아름다움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위 디오니시우스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다. 이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은 신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신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사랑’이 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과 지각을 포함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 상태가 아닌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앎의 대상’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비례와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완전성’을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했다. 스코투스는 ‘색채’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색채를 포함하는 조화’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조화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나 색채를 아름다움(조화)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봤다.
중세는 ‘암흑’으로 봉인된 구시대가 아니다. 근대 이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독주가 지속하면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폄하된 채 학자들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대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한 신고전주의자들은 고대미학, 르네상스 미학에 주목했을 뿐 중세미학을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중세미학에 대한 해명을 기본과제로 해 중세 지성사를 재조명한 《중세의 아름다움》은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채로운 빛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묻혀버린 중세를 재발굴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주류 시각으로 기술된 미학 또는 미술사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작품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새롭게 재편하는 담론을 생각할 때 중세미학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가르치던 학교 속 역사 교과서의 유통기한은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암흑’에 가려진 중세의 다채로운 면모를 찾으려는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