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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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건진 짤막한 외국 유머를 소개해본다. 목사의 아내가 진화론을 듣고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보! 우리 조상이 원숭이래요! 그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게 정말로 사실이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기도해요.”[1]

 

인류 지성사에서 진화론만큼이나 엄청난 오해와 비난을 받은 이론이 또 있을까 싶다. 찰스 다윈《종의 기원》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원숭이가 우리 조상님이냐!”며 분노를 드러냈다. 신이 세상 만물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던 창조론자들은 충격과 당혹감에 빠졌다. 그러나 진화론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아니다. 인간과 원숭이가 먼 옛날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어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봉착한다. 진부하면서도 심오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무엇인지 똑 부러지게 설명하는 고전적 정의를 내린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zōion politikon)이다.” 이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성을 가진 명제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성향이 있다. 이처럼 정치도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당을 만들어 정책을 추진한다.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당파들이 형성되면 서로 반목하여 당쟁이 일어난다. 시민과 정치인들은 특정 당파의 독재를 막기 위해 견제한다.

 

인면수심. 여기서 말하는 ‘수심(獸心)’은 짐승, 즉 동물의 마음이다. 못된 사람을 비난할 때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동서양의 많은 사상은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만을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문화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보했다’고 주장했다. 문화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생활양식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로운 사람)’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문화야말로 인간이 동물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숭이 무리가 고도의 정치행위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982년에 나온 《침팬지 폴리틱스》(바다출판사, 2017)는 자부심이 강한 ‘호모 사피엔스’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이 책을 쓴 프란스 드 발은 1970년대 중반부터 네덜란드 아른험 동물원에 근무하면서 침팬지 사육장을 관찰했다. 침팬지 무리의 최고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처절한 권력투쟁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침팬지도 ‘정치적 동물’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침팬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전세가 불리해진 침팬지는 제3의 침팬지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러면 제3의 침팬지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 침팬지의 편을 들어주면서 싸움에 가담한다. 침팬지 사회의 ‘연합’은 권력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되며 무리는 두 개의 연합체로 나뉜다. 침팬지가 제3의 침팬지에게 손을 내밀면서 동료를 확보하는 과정은 악수하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 ‘내 손에 무기가 없으니 싸우지 말자’에서 시작한 게 악수다. 악수는 상대방에 접근하여 싸울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는 몸짓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손으로 직접 접촉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라는 믿음을 상기시킨다. 침팬지는 자신과 싸운 동료와 화해할 줄 안다. 침팬지들은 싸움이 끝난 뒤 서로 껴안거나 털을 골라준다. 심지어 소리 내면서까지 키스를 한다. 크게 한 번 싸우고 나면 일체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반응과 대조적이다.

 

저자는 침팬지 사회를 ‘정치’라는 틀로 설명하면서 정치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일찍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암수 침팬지들의 행동 양식을 살펴보면 인간사회와 똑같이 펼쳐지는 권력 투쟁을 확인할 수 있다. 침팬지와 인간은 공통으로 ‘목적성을 가지고 생각(think purposefully)’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침팬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개인 또는 공공의 이익을 누리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침팬지는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인간은 욕구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선거철만 되면 자신의 밥그릇을 숨긴 채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입만 털다가 국회의원 배지 달자마자 제 밥그릇 챙기기 여념 없는 정치인들은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은 침팬지와 인간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존재인가?

 

이 책에 읽을 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 저자는 수컷 침팬지 이에룬이 일인자였을 때 암컷 침팬지들과의 교미를 독점하는 모습을 ‘초야권’에 비유했다(246쪽). 서구 중세 시대부터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는 초야권은 농노 처녀가 결혼 전날 영주와 먼저 잠자리를 해야 하는 풍습이다. 그동안 초야권은 권력형 성 착취의 전형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초야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악습으로 판명이 났다. ‘초야권’을 언급한 문장에 대한 저자의 주에 따르면 초야권이 ‘영주가 신부의 침대에 발을 들여놓거나 침대 위에 올라가 신부 위를 지나가는 식의 상징적인 의미로만 사용’(331~332쪽)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성 착취에 가까운 초야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풍습”이라고 명시한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흡하다. 이럴 때 미흡한 설명을 보완하는 역주가 있어야 했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침팬지들의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독자들의 머릿속에 “인간도 동물”이라는 명제를 효과적으로 각인시켜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정확했다. 그래도 인간과 똑같이 ‘정치하는 원숭이들’의 이야기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들도 유머에 나오는 목사의 아내처럼 ‘정치하는 원숭이’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1] 원문 :

  The wife of a preacher, told years ago of Darwin’s theory of evolution, is reported to have exclaimed :

“Descended from the apes! My dear, we hope it is not true. But if it is, let us pray that it may not become generally known.” (출처 : [해외 유머-인류의 조상] 한국경제, 2001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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