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Philos Feminism 8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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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임신과 출산에는 남자가 없었고
임신중지의 수치와 수치주기, 국가의 생존에 대한 강제에는 남자들이 있었다.
임신중지로 우리가 당연히 느껴왔던 것들은 실상 우리의 것이 아니어도 됐다고 말해주는 필독서.
내 몸의 주인은 나다.

다만, 툭툭 걸리는 문장들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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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08-24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벌써 다 읽으셨다니...!

다락방 2022-08-24 11:45   좋아요 1 | URL
아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제 다른 책들 읽을거에요. 꺅 >.<

거리의화가 2022-08-24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번 달도 고생하셨습니다^^ 임신중지로 느껴온 수치들. 왜 여성만 그런 것을 느껴야 하는지 느낄 수 있게 만든 책이었어요.

다락방 2022-08-24 11:45   좋아요 1 | URL
네, 국가적으로 조정하기도 하는 걸 보니까 너무 징그럽더라고요. 이놈들아, 대체 여자들한테 무슨짓을 하는거야! 하고 말이지요. 으..
거리의화가 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책읽는나무 2022-08-24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중단 시기에도 많은 책을 읽어 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다락방 2022-08-24 11:46   좋아요 2 | URL
많지는 않고요. ㅠㅠ 이번 달엔 진짜 책 적게 읽었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기는 제일 많이 샀는데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단발머리 2022-08-25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저 지금 봤어요! 완독 축합합니다. 홀가분한 그 기분, 부럽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8-25 11:01   좋아요 1 | URL
너무 좋아요!
근데 저 읽을 책이 산더미에요.
9/3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친구랑 각자 서로 읽을 책 두 권 정해줘가지고 ㅋㅋ 그 날까지 완독하고 가야해요. 못하는 사람이 술 사기로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등롱 2022-08-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완독!! 축하합니다!
전 이제서야 시작했는데 막 달려서 주말에 끝낼 참이에요, 다른 분들 리뷰를 보니까 읽기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합니다 ㅎㅎ

다락방 2022-08-25 14:29   좋아요 1 | URL
오오 등롱님, 화이팅 입니다. 계획하신대로 주말에 끝내실 수 있기를 바랄게요. 빠샤!!

수이 2022-08-28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릭방님 저는 마지막 말씀하신 툭툭_이 너무 많이 걸려요 ㅠㅠ 괴로워요

다락방 2022-08-29 12:17   좋아요 0 | URL
저도 번역이 너무 아쉬운데 번역이 아쉬운건지 원문이 아쉬운건지는 모르겠네요 ㅠㅠ
 

피씨의 화면보호기에서는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05:37 이었다. 사실 나는 오후 시간을 쓸 때 17:37 로 쓰는 쪽이 더 편하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건 대학시절 편의점 아르바이트 할 때 습관이 들어서 그렇다. POS의 시간이 항상 저렇게 표기됐던 것.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오후는 12시 이후에 숫자를 계속 붙여나간다.  13시, 14시. 그런데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 얘기는 아니고. 05:37 나는 숫자로 사람을 떠올린다. 05:37 이라고 하면 5와 3과, 7이라는 숫자가 누군가를 화악- 기억나게 했다.


그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아마도 소설 속 표현이었으려나. '낮은 웃음소리'가 뭔지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언젠가 수화기 저쪽 너머에서 웃는데 그 소리가 정말 낮은거다. 근데 그게 너무 좋은 거다. 같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눴을 때, 그는 나의 목소리가 좋다고 몇 번 얘기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좋다고 생각했던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낮게 웃는 소리를 듣는데 가슴 속에 몽글몽글 어떤 따뜻함이 싸악 퍼져나가면서, 그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다, 또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었다. 그는 혼자일 때도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있었는데, 직장내에서는 직급이 있는 편이라 나랑 통화를 하다가도 업무적으로 어떤 일이 생기면 목소리와 말투가 확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그가 지금 저쪽 세계에 있는데 이쪽 세계에 있는 내게 접근하고 있다고, 접속하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내게 더러 '너랑 이야기 할 때만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라고 말했고, 키우는 금붕어에 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말했다. 그 금붕어는 지금쯤 이미 죽어 흔적 조차 사라졌겠지? 그 금붕어가 육체적으로 먼저 사라졌을까, 나의 존재가 그의 마음에서 먼저 사라졌을까? 5와 3과 7은 그를 생각나게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5와 3과 7은 그 사람이 떠오른다. 아마 그조차도 알지 못하게 나는 그를 그 숫자들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려고 기억한 게 아니라 그 숫자들과 자동연상이었다. 나는 그의 꿈을 꾼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뉴스를 보다가 그 사람 생각이 났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관련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그 당시에 있었고,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 한가운데에 있을것이니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물어야 할까. 그렇지만 안부가 궁금한데, 하던 차에, 바로 그 때 그로부터 문자가 왔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간단한 문자였고, 나는 그 문자를 받자마자 벽에 기대어 선 뒤에 스르륵, 주저 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 



5와 3과 7이 나로 하여금 그를 생각하게 하였다면, 그를 생각하면, 아아, 어쩔 수 없이,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이 떠오른다. 신호등, 횡단보도, 부겐빌리아 넝쿨.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바로 그 때문에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바랐던 때가, 내게, 있었다. 

도시가 활짝 열렸던 적이, 내게, 있었다.

치킨을 앞에 두고 심장이 펄떡 거렸던 때가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마주 앉아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주 많이 흘렀다. 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이 번역되어 나왔을 때, 이벤트로 당시에 5천원권 파리바게트 상품권을 주었더랬다. 나도 책을 사고 그 상품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SPC 불매하는 사람이 되어 파리바게트의 소세지빵이 먹고 싶지만 사먹지 않고 있다. 시간은 이렇게나 많이 흘러서 파리바게트 불매하는 사람이 되었어, 내가. 너는 어때? 파바 불매하니?



종종 생각했다. 우리가 조금 멀었을 때가 더 좋았다고. 우리가 가까웠을 때, 하루에 가장 많이 대화를 하는 사람이 서로였을 때, 그 때에는 그게 그렇게 좋았는데,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멀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조금 전으로, 그렇게까지 대화를 많이 하진 않는 쪽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출근해서 말을 걸고 퇴근할 때 인사를 하는, 그런 식으로까지 친해지지는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는 그쪽 세계에, 나는 이쪽 세계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좋았던 것 같아. 우리가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가슴 속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부겐빌레아 넝쿨을 품은 채로, 우리의 손이 서로에게 닿아있었던 것만 기억하면서 조금쯤 긴장하고 조금쯤 먼 사이로 그렇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멀어지고나면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없는 편이 나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나였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생각한다. 받아놓고 좋아했던, 가슴 뛰는 사진이지만, 그걸 갖고 있는 건 어쩐지 그러면 안되는 일 같아서 바로 삭제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아마도 네 인생의 복이었을 것이다. 그 사진, 으윽, 안타까워하면서 지웠다. 우리가 가까웠을 지언정, 내가 너의 그런 사진을 갖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 와, 진짜 잘 늙고 있다. 대단한 중년이야, 나는. 한때 너와 가까웠던 나는 이렇게나 더 근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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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8-23 16: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 사람 금붕어 이름 다락방이었어요? 어머나.. 지금쯤 다부장 되어 있을 듯.

아른 글에 이런 댓글 달아서 미안합니다. 그럼 이만-

다락방 2022-08-24 08:06   좋아요 0 | URL
금붕어는 죽어 사라진지 오래일거예요. 금붕어의 상태는 없음...
나도 그에게 없음.....

얄라알라 2022-08-23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윽...아름답고 슬프고 레몬케이크.새콤시큼하고.달달하고

다락방 2022-08-24 08:06   좋아요 2 | URL
아, 저 책에 진짜 엄청 빠져서 살았더랬어요. 책과 나의 상황이 맞물리는 경험들이 종종 있는데, 저 책을 읽을 때가 그랬네요. 크-

거리의화가 2022-08-23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예전 추억 하나쯤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문단, 그리고 문장 정말 멋져요!!!

다락방 2022-08-24 08:07   좋아요 1 | URL
저는 추억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답니다. 후훗.

청아 2022-08-23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좋네요! 뉴스에 어떤 일에 관련되었을지 모를 그 사람이 염려되었는데 마침 그에게서 문자가 온다면 일단 문제적 상황은 배경이 되고 설렘이 클 것 같아요. 소설 한 토막을 읽은 것 같습니다. ^^* 다락방님 목소리도 근사함요!

다락방 2022-08-24 08:0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미미 님. 내가 상대를 걱정하는데 상대는 내가 걱정할 것을 알아채고 말해주는 것. 이것은 설렘이고 벅참이지요. 그 불안한 상황속에서도 제 마음은 좋았습니다. 오래전 일이네요. 후훗.

책읽는나무 2022-08-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였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생각한다.
.......
저도 마지막 문장들 속 다락방님 생각들과 그런 선택들이 넘 좋네요.

다락방 2022-08-24 08:08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사람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인생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삶의 질이 가장 높았던 때가 나를 알고 지내던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후훗.

단발머리 2022-08-23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인생의 복이었던 나를… 너도 지금 생각하고 있니? 흐미….

다락방 2022-08-24 08:08   좋아요 0 | URL
정작 그사람은 나를 잊었을 뿐더러 한 번도 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닐까요? 하하하하하 (낭만 파괴)

바람돌이 2022-08-2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어진 옛 애인에 대해서는 짜증밖에 안 남은 저에게는 너무 너무 부러운 추억과 마무리!!! 아 질투나잖아. 아직도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바라던 그 마음이 되살아나기도 하는거 말이죠.

이 글 읽는데 왜 제 맘이 설레죠? 아 나 좀 있으명 중년도 아니고 노년이야...ㅠㅠ

다락방 2022-08-24 08:10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저는 헤어진 구남친들을 좀 끔찍하고 징그럽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남자에 대해 애틋할 수 있는 건, 저랑 애인이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구남친들이란 원래 끔찍하고 지우고 싶어지는 존재 아니겠습니까. 후훗. 아주 가깝지 않아야 아름다운 관계로 남는 것 같아요. 하아-

얄라알라 2022-08-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시 이 글 읽어봐도, 벽에 기대어 주르르 앉은....그 대목, 저는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지라 그렇게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때 바로 기억이 몸짓으로 표현되는 관계가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부러운 거죠 ...

다락방 2022-08-24 11:47   좋아요 1 | URL
아, 저는 그런 식의 기억이 몇 개 더 있어요.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일요일 한낮에 소파에 앉아서 울었거든요. 그 사람은 그런 몸짓으로 기억돼요.
 















수치는 누군가가 사회적 존재로서 처참히 실패했음을 나타내며,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감정이다. 수치스러워하는 주체는, 스스로 인지하는 자기와 이상적 타자, 즉 되고 싶은 자아상 사이의 단절을 겪는다. 그는 그 자아상을 향해 가려는 한편, 자기를 거기에 반한다고 평가한다. -p.177-178



어젯밤 자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수치에 대한 가장 적확한 설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스스로 인지하는 나와 되고 싶어하는 나 사이의 단절,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드는 감정, 수치. 수치야말로 그런 것이다. 수치는 그럴 때 쓰는 단어이다. 맞아, 바로 이게 수치야! 아, 너무 수치스러워 할 때의 나는, 현재의 나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과 지금 다른 식의 상황이 나에게 펼쳐졌으므로. 덧붙이자면, 그래서 성희롱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은 잘못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희롱의 잘못을 피해자에게 입히는 단어가 아닌가. 내 이상은 성희롱 당하지 않는 나인데 현실은 성희롱 당한 내가 있어 수치스러운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수치 라는 단어가 대단히 잘못 적용된 상황이라 보겠다.



비혼 이면서 자녀가 없는 친구들과 때로 우리가 이렇게 싱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우리는 출산과 육아를 선택하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살것인가와 더불어 만약 혹여 지금 임신이 된다면? 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다. 이제 나이가 나이니만큼 임신 자체가 힘들기도 하겠지만, 임신을 한다면 출산 자체도 힘들어질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만약 비혼모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사실 지금이 제일 적당한 때가 아닌가 말이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비혼모에 대한 시선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고, 게다가 내 경우엔 가족 구성원들도 모두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아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축복해주고 예뻐해줄 터였다. 혹 이십년 전쯤이었다면 우리 엄마도 딸이 결혼도 안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을런지 몰라도 지금은 당당해져 있는 것 같다. 낳으면 키워줄게! 라고 하시니까. 모든 사회적 여건이 이제 아이를 낳아도 좋을 때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육체적으로 노쇠하여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 내가 조카들 어릴 때부터 같이 생활해보니 아이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키우는 것도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도 조카들을 예뻐하니까 어느 하루는 이모가 내게 물었더랬다. 너 그렇게 아이 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예뻐하는데 네 자식은 안낳고 싶니? 이미 성인 아이 둘이 있는 이모인데, 내가 "이모, 조카랑 내 아이는 다르잖아, 나는 걔한테 붙들려 있어야 되고 너무 힘들잖아" 했더니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모든 면에 여유가 있어서 지금이라면 아이를 낳아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아이 낳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여행도 다니고 싶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싶다. 간혹 텔레비젼 틀어두고 와인도 마시고 싶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면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싶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얼마간은 그런 것들을 하지 못할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아이 낳기는 역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 얘기가 나오면 엄마, 나는 구속 받기 싫어 자유롭고 싶어! 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내게 말씀하신다. "너 여태 계속 자유로웠잖아!" 


그렇다. 나는 여태 계속 자유로웠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자유로워도 되는거잖아?

지금까지 자유로웠고 앞으로도 자유롭기를 택하는 나는 이기적 쌍년인가?



에리카 밀러는 이 책의 초반에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에 만족했던 여성에 대해 얘기한다.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임신중지를 했고, 그래서 좋았던 여성에 대해서. 이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자연스런 수순이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아무것도 지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임신중지라면 얘기는 다르다. 피임하지 못한 여성, 생명을 죽인 여성에 대한 비난은 반임신중지 입장의 것이라면, 아이를 지금 키울 형편이 안되니까, 모성을 포기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선택하는 거니까 라며 임신중지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도 임신한 여성에게 불편한 마음을 강요한다. 네가 낙태를 했다면, 그것이 어떻게든 너에게 좋을 리 없지. 그것은 고통스럽고 트라우마를 남길 거야, 그게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는거야, 네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으니까. 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지운거잖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래서 사람은 사회화 된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주체적이라고 해도 아무리 내가 내 고집대로 행동한다 해도, 거기엔 이미 이 가정에서 자라 이 학교, 이 직장, 이 나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왔던 내가 있다. 차곡차곡 사회가 내게 보여주는 것들은 내 안에 쌓여서 내 생각이 되고 내 기준이 된다. 만약 내가 이십대에 임신을 했다면 임신중지를 선택했을 것이고, 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그것에 대해 엄마를 비롯한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처리(?)를 한 후, 내내 가슴에 담고 살았을 것이다. 혹여 누군가에게 그걸 들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자라면서 보아왔던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책에서는 그것을 감추지 않으면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것처럼 그려왔으니까.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소설 스타킹 훔쳐보기 시리즈 중에서도, 결혼 전 낙태했던 여자가 결혼 후 유산을 하게 되었는데 그걸 남편이 알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결혼 전 임신사실, 임신중지의 사실은 결코 결혼할 남성에게는 밝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사회화 되었었다. 뭐, 지금은 배째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건 이만큼 살아온 그동안의 시간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의 4장 <수치스러운 선택> 에는 임신중지를 줄이고자 하는 호주의 정치인들 얘기가 언급된다. 그들은 무엇보다 '십 대 엄마'를 비난하며 그 수를 줄이고자 했다.



1970년대부터 '십 대 엄마'라는 인물형은 유독 '과도한 재생산적 신체'로 비난받았다. 십 대 엄마는 성적 미성숙이나 무책임과 연결되며, 특히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확산됨에 따라 복지에 의존하는 계층화된몸이 되었다(2장 참고). 임신중지 법의 자유화가 진행된 이래 십 대 임신중지 ·모성 이라는 국가적 '수치'를 해결할 방책으로는 성적 억제라든지 피임기구 사용을 다루는 도덕교육이 제안됐다. 

십 대 임신을 막겠다는 발의들은 임신한 십 대가 아이를 낳든 임신중지를 하든 상관없이 실패자라고 전제한다. 임신중지를 사회문제로 구성하곤 하는 토니 애벗은 이런 수사를 사용했다. "십대의 난잡한 성생활을 억제하고 '속도위반'하는 십 대를 막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면 임신중지도 줄고, 따라서 트라우마를 겪는 젊은 여성도 줄고, 역기능 가정dysfunctional family도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애벗은 모든 십 대(여성)의 성적 행동을 '난잡'하다고 보면서, 순결을 옹호하고 피임을 회피하는 듯하다. 이는 보수적이고, 반임신중지적인 발화의 전형이다. 애벗은 여성의 무책임한 성적 모험이 임신중지로 이어져 트라우마 경험(3장 참고)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건조하게 '역기능'으로 프레이밍한 십 대 모성으로 이어지리라고 전제했다. 그는 임신중지를 십대의 몸과 연결함으로써, 나아가서는 임신중지를 미성숙과 무모함에 연결했다. -p.198



최근에 읽었던 책 '콜린 후버'의 《어글리 러브》에는 아직 고등학교 졸업전에 임신을 해버린 여자와 남자가 나온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했다. 당시에 그들은 뜨겁게 사랑하며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사랑을 그들이 한다고 믿었다. 조심하느라고 했지만 어쨌든 여자는 임신했다. 남자는 임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착하고' , '책임감있는' 남자여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고민해서 해결책을 마련해 여자 앞에 들이민다. 여자는 두려웠다. 함께 사랑했지만 혼자 임신하고 그래서 남자가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이 '착.한.' 남자는 함께 고민해줬다. 그는 아이를 낳자고 한다, 그리고 같이 키우자고 한다, 우리가 함께 갈 대학에서 가족을 받아주기도 한다고, 그런 숙소를 알아왔다고. 그래서 여자는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낳는다. 남자는 낳지 않았다. 여자는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고 엄마가 되었다. 남자는 섹스를 하고 아빠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임신과 출산은 빠져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여자랑 섹스를 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남자랑 섹스를 했기 때문에 임신했다. 십대에 임신한 여자는 호주의 토니 애벗 말대로 문란하다면, 십대에 임신하게 만든 남자는 문란하지 않은가? 여자는 난잡하고 남자는 난잡하지 않은가? 여자는 속도위반 했는데 남자는 하지 않았는가? 여자는 무책임했다면 남자는 무책임하지 않았는가? 여자랑 남자가 함께 한 일인데 여자는 무모했고 남자는 무모하지 않았는가? 여자는 미성숙했고 남자는 미성숙하지 않았는가? 




내가 임신을 했다면 그건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다. 사정을 한 남자가 반드시 있었다. 그런데 임신을 하게 되면 걱정도 내몫이고 임신중지를 하려고 병원에 가는 것도 내 몫이고 혹여라도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도 내몫이고, 내 뱃속의 생명을 내가 죽였다고 트라우마를 가져가는 것도 내 몫이다. 그러나 이 내 몫의 것들 중에서 내가 '정말' 내 것으로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것들 모두 내가 사회화로 인해 갖게 되는 것들이 아닌가. 혹여라도 내 안에 죄책감도 없고 아이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고통도 없고, 수술 후에 트라우마도 없다면, 나는 아마도 그런 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임신중지 하고 나면 다들 괴롭다는데, 그거 죄책감 든다는데, 그거 트라우마 있다던데, 그런데 나는 왜 속이 시원하기만 하지? 나는 역시.. 이기적인가?

사회화는 내게 일어나는 자연스런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몰아가고야 만다. 그래서!


에리카 밀러의 임신중지를 읽는 일은 의미 있다. 나는 여성들이 안전한 섹스를 하고 굳이 임신중지 까지 가기를 원하지 않지만, 혹여라도 그런 상황이 됐을 때, 내 것이 아니어도 될, 수치심을 포함한 과도한 감정들을 품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에리카 밀러가 쓸데없는 고통과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이 책을 젊은 시절에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아 제기랄.. 내가 젊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나는 임신중지 하는 여자들의 병원에 같이 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아마 다른 식의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때 나는 그 자리에 내가 있도록 한, 부재한 정자들의 주인들을 욕하기만 했다.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들.. 왜 여기에 안나타나냐 씨부럴것들.... 여기 왜 내가 있냐, 내가 사정했냐, 개새끼들...  그 때의 그 여자들을 포함한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모든 여성들이 혹여라도 자신의 것이지 않아도 될 과도한 고통을 끌어안고 산다면(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아주,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수치에 대해 썼지만 선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책인데, 그런데 이 좋은 내용으로 가득찬 책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무슨 뜻인지 단번에 파악이 안돼 재차 읽어야 되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읽다가 문장들이 툭, 툭 끊긴다. 거기에 스트레스 받아 원서를 구입해 옆에 두고 함께 읽어야 하나도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4장을 읽고 있다. 그래도 원서 살까? (사고싶구나...) 



아주 좋은 책이다. 뒷부분 계속 읽을 것이고, 많은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임신도 안하고 그래서 임신중지도 안하는 남성들이지만 임신중지에 말은 보태는 남성들이야말로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거기에 말 보태는 새끼들이 책 한 권 읽는다고 달라지진 않겠지요........



이만 총총.



원서.. 너를 어쩌면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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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23 09: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십대 이야기 다시 읽어도 화가 나네요!-_- 임신과 출산 과정에 항상 함께 참여해야 할 남자들의 역할이 빠져있다는 것...!!!
좋은 책인데 저도 제가 좀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고통이나 두려움, 죄책감 등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기적인 여자인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것은 제 선택이었으나 어쨌든 그것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저를 제 우선순위에 둔 것은 분명했으니까요.
저도 원서를 읽으면 나았나 싶었어요. 하지만 시간 관계상...ㅋㅋㅋ

다락방 2022-08-23 11:18   좋아요 2 | URL
제가 저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이 세상에서 사회화 되기를 저를 우선순위로 놓으면 이기적인 게 되잖아요. 부모를 위해, 남편을 위해,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여성에게 그동안 너무 당연시되었던 것 같아요.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디에서든 일단 ‘그 다음에‘, ‘나중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여성에게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또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고통과 트라우마를 가져가라고 하죠. 후아-
거리의화가 님, 여자들이 아무리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이미 이기적으로 세상을 조정하려 드는 남자들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것 같아요. 우린 더 이기적이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이기적이 되어야 정치에서도 법에서도 매체에서도 여자들이 더 많아지지 않겠어요? 더 이기적이 됩시다. 더 드러납시다.

얄라알라 2022-08-27 17:20   좋아요 0 | URL
˝Happy˝
에리카 밀러가 의도를 담아 작정하고 뽑아 쓴 형용사인데 번역판에서는 밋밋하게 요 ˝happy˝를 빼버린 건 아쉬워요
저는 원서 없이 번역판만 읽었지만, 중간중간 ‘나라면 이보다 더 잘 옮길 수 있을까?‘하는 표현이나 문장들이 많았답니다. 원어가 궁금한 부분은 있어요

* ‘문화적 수행자‘로서의 태아. 수행자 원어는 performer일까? actor일까?
* 태아적 모성은 ˝fetal motherhood?˝ ˝embryonic motherhood?˝

일단은 몰라도 그냥 지나가야겠어요^^ 8월은 끝나가는 데 갈길이 머네요

이번에 3번째 다시 읽는 셈인데 넘 재밌어요
다락방님께서 판 깔아주신 덕분에 잼나게 공부합니다

다락방 2022-08-29 12:18   좋아요 0 | URL
오 알라딘 세번째 읽는 중이시라니, 너무 대단하세요!
저는 단어 선택 자체보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제대로 이해한건지 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때문에 한 문장을 두세번 읽는 경우가 허다했답니다. 덕분에 속도도 느리고요. 원문과 비교해보고 싶지만 막상 사두면 비교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아 안사려고요. 흐흐

잠자냥 2022-08-23 1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지한 가운데 중간중간 역시 유머를 잃지 않은 명페이퍼군요.
저도 자유롭게 사는 이기적 쌍년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자유롭게 살 계획인데, 돌봐야 하는 고양이들이 여럿 생기면서 완전하지 않은 자유에 가끔 현타가 올 때도 있어요. 그러다 보면, 아, 애를 낳아 키우는 여자들은 정말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 이런 생각도 들고, 왜 임신과 육아는 늘 여성의 몫인가.. 역시 무자식 상팔자다 이런 결론으로 돌아가고는 합니다.

다락방 2022-08-23 11:15   좋아요 3 | URL
아 맞아요. 내가 혼자가 아닌 일단 다른 존재와 함께 산다면 구속력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여행 좋아하던 제 친구도 고양이 때문에 이제 장거리 여행도 못하고 하룻밤 외박도 마다하더라고요. 그 순간 나의 여행보다 나와 함께하는, 내 돌봄이 필요한 고양이가 우선인 것은 집사들의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역시 누군가 돌봐줘야 할 대상이 있다면 구속은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 조카들 예뻐하면서 살려고요. 조카들 예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조카들 너무 예뻐요 ㅠㅠ 너무 사랑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갑자기 조카예찬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08-23 1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에 이 책을 읽으면서 별로 어려운 책이 아닌데 왜 이렇게 읽기가 힘들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것도 분명 있고요. 거기에 더해 원저자가 중언부언이 많아요. 하나의 일관된 주제아래 논리정연하게 딱 떨어지지 않고 얘기하다가 아 맞다 앞에서 이거 얘기했지만 그 부분 좀 부족했지? 그게 뭐냐면 말이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읽는 독자로서는 정신사나운 글이 되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 말은 원서를 읽어도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ㅎㅎ 그냥 제 생각이고요. 그럼에도 좋은 책이라는 것도 제 생각입니다.
다락방님 말씀하신 죄책감 수치에 대해서는 저는 엄청 할말이 많은 느낌이라 저도 오늘 이 책 끝내고 리뷰든 페이퍼든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

다락방 2022-08-23 11:12   좋아요 2 | URL
저도 번역 문장이 매끄럽지 못해서 턱턱 걸렸거든요. 이게 번역의 문제인걸까 원문이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걸까 생각했고요. 그런데 바람돌이 님 댓글 읽고 보니, 맞아요, 그것도 있어요. 얘기하다가(이건 4장에서) 또 얘기하닥(이건 2장에서) 이렇기도 하죠 ㅎㅎ 저는 내용 자체가 엄청 좋았거든요. 반드시 읽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했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얘기였어서 내용면으로 너무 좋았는데, 문장 자체가 읽기 힘들더라고요. 음.. 원서를 사서 번역본 옆에 똭 두고 읽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저도 뒤에 조금 남았어요. 오늘 다 읽고 싶은데 할 수 있을지.. 바람돌이 님의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빠샤!!

얄라알라 2022-08-27 17:21   좋아요 1 | URL
아...바람돌이님 거리의 화가님 다락방님 모두 번역문체 불편하셨군요?
저는 제가 이런 분야 글에 친숙하지 않아서 어려운가 했어요^^;

제목만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열배는 재밌었던 책^^

다락방 2022-08-29 12:20   좋아요 1 | URL
저는 정말 문장이 어렵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너무 좋았어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도 했고, 젊은 여성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더라고요. 혹여 갖지 않아도 될 부정적인 마음들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예요. 무엇보다 콘돔 사용 안하는 남자와는 성관계를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ㅠㅠ

청아 2022-08-23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서문에서부터 기분좋게 머리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어요. 임신 중지에 대해 수치, 불쾌함, 죄책감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감정들이 모두 사회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니...감정의 정치라는 말도 딱인듯하고요. 글이 읽기 힘듦에도 그래서 이미 별5개라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는 중입니다. 요 바로 위의 다락방님 말씀에 공감100(완전 제 생각이라 깜놀함요ㅎㅎ)

이런 어려운 책도 자꾸만 원서와의 비교를 고민하시는 다락방님 늘 존경입니다.*^^*

다락방 2022-08-23 14:16   좋아요 3 | URL
문장이 자꾸 튕겨져나와서 오히려 더 이해가 힘든 것 같더라고요. 내용 자체는 너무나 좋고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문장 때문에 자꾸 튕겨져 나간다니 짜증이 나서 원서 까지 생각한건데, 거의 다 읽어가는 지금은 안사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나중에 영어 실력이 좋아진다면(그런 날이 올까요?) 그 때 사서 보든지 해야겟어요. 지금은 한글책도 사두고 쌓아두기만 하는데 영어책은 무슨.. ㅠㅠ

저도 아주 당연하게 수치, 죄책감, 트라우마를 가져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순수하게 그게 속이 시원할 수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걸수도 있고 또한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어쩐지 분했어요. 도대체 세상이 그동안 여자들한테 뭘 어떻게 한거야! 하고 말이지요. 오늘 내로 다 읽고 싶은데 집에 가자마자 잘 것 같아 조금 더 미룰 것 같아요. 부지런히 읽고 부지런히 얘기하고 부지런히 알아나갑시다, 미미 님.

책읽는나무 2022-08-23 1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장들이 얽히고 설켜 이 말을 주장하려는 것을 내가 똑바로 이해한 것이 맞는 것인가? 계속 의심하다 보니 자꾸 진도가 안나가고 계속 머리 식힌다고 다른 책 들게 되고, 이 바쁜 시기에 영화를 몇 편이나 봤는지 모르겠네요^^;;; 약간의 나의 자존감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구요.(어려운 책 읽을 때는 내가 똑바로 독해하고 있는 것인지? 늘 문해력을 의심하게 되더라구요ㅋㅋ)
그런데 중언부언 한다는 바람돌이님의 말씀에...으응??^^;;;;; ㅋㅋㅋ

<나의 블루스> 란 드라마에서 십 대 시절에 임신을 한 경우의 배우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노희경 작가는 여학생은 임산부로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고, 남학생은 자퇴를 해서 미래 아기의 분유값을 모으려고 일을 한다는 설정으로 해결했는데 작가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행스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십 대들의 임신 이야기가 읽히니 갑자기 드라마 생각이 났네요.
이 책은 정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좋은 책이에요. 그럼에도 진도가 잘 안나간다는 의견들에 공감 백퍼입니다^^;;;
이제 반 읽었으니 앞으로도 남은 부분들 부지런히 읽어야죠.
잘 읽고 갑니다. 이 책 읽는 동안 많은 도움 얻고 가네요^^

다락방 2022-08-24 08:11   좋아요 3 | URL
저는 다 읽었습니다, 책나무 님! 오늘 출근길에 다 읽었어요. 아주 좋은 독서였습니다. 에리카 밀러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도 당연히! 듣고 생각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쓸데없이 여성들에게 많은 죄책감과 수치를 안겨주었으니까요. 그런 당연한 주장을 듣는 것은 너무 짜릿한 일인데 문장이 툭툭 걸려서 읽는데 예상보다 오래 걸렸네요. ㅠㅠ

책나무 님, 남은 부분 열심히 읽으세요. 저는 맺음말 도 참 좋더라고요. 화이팅!!

- 2022-09-1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르으로고 계속 여태 자유로워지실 다락방님께… 수치심!!의 정의 외워야겠어요 ㅋㅋ 맞아 저게 수치심이구나? ㅋㅋㅋ 내가 생각한 수치심은 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함 정도 였는 데, 조금 더 수치심 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둬야하겠습니다 ㅎㅎ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지만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사느니,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의 길이 곧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길이 아니다. 그 어디로도 이끌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하던 불쌍한 처녀가 죽었다고 가수의 품 안에 안길 수야 없지 않은가.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희미하긴 한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는 화자가 어린 아이다. 늘 같은 시간에 공원을 걷는 좀머씨를 이야기하는 어린 화자. 이 화자는 피아노학원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데, 어느날 선생님이 코를 판 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바람에 코딱지가 피아노에 묻어있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다음에 쳐야할 건반이 바로 그 건반이 아닌가. 저 건반을 누르기 싫다, 그렇다면 코딱지가 손에 묻게 된다. 그 건반을 치길 망설이노라니 선생님은 자꾸만 윽박지른다. 얼른 치라고, 치라고! 하는수없이 이 소년은 그 건반을 치고 학원이 끝나는 길에 너무 치욕스러워 죽고자 나무를 타고 오른다. 죽자, 죽어야 된다, 선생님의 코딱지라니, 수치스럽다, 치욕스럽다, 죽어야 한다! 아마 그 올랐던 나무 위에서 또다시 걷는 좀머씨를 소년은 봤던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소년은 죽으러 올라갔으나 죽지 않고 살아 내려온다. 내가 왜 코딱지 때문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 왜 코딱지 때문에 죽어야 해?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코딱지 때문에 죽고자 했다면 그 코딱지는 내가 생각하는 코딱지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코딱지에 대한 치욕과 수치의 정도가 달랐던 것일테다. 야 코딱지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말도 안돼, 살아! 그러나 그 사람은 코딱지를 건드린 자기 자신을 도저히 이 세상에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다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장 아메리의 책 《자유죽음》에서 가져온 인용문 61페이지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유대인인데 유대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의 관심이 없는 삶이라면 내게 그 삶은 의미가 없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내가 뜯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이며 정체성이니까. 가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삶을 가치없다고 말하는 것은 가정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인데, 그러나 가정부에게 그것은 너무나 크다. 자신의 삶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장 아메리의 책에 이런 사례는 실제 인물과 소설속 인물들을 포함하여 몇 가지 더 나오는데, 시험 성적이 안좋아서 죽기를 결정하는 소년이 나오고, 소위라는 명예를 잃게 되는게 너무 치욕스러워 죽기를 결심하는 인물이 나온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사실은 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살다 보면 그 일은 그렇게 큰 게 아니고 다른 더 큰 기쁨이 찾아올 수도 있고 미래는 예측불허 이므로 살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구나 깨달을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런데 그들에게도 정말 그럴까? 이미 내 앞에 닥친 이 어떤 것이 나에게 너무 큰데, 이것은 내 삶을 더이상 유지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견뎌내야 할까? 이런 내가 이런 삶이 싫어서 나는 없음을 택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존중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죽음 일 것이었다.



나는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유죽음의 의미를 알겠고, 그것이 자신을 살해하는 자살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자신의 치욕 자신의 수치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지기 때문에 없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알겠다. 리뷰에 썼던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것이 많은데, 그건 '나 자신을 학대로 밀어넣음으로써 나 자신의 주체를 확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였다. 샐리 루니의 소설 《노멀 피플》에서 메리앤이 자신을 때려달라고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말했던 일이 그렇다. 아빠와 오빠가 어린시절부터 나에게 가했던 폭력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 맞닥뜨린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랑 섹스하는 남자에게 '나를 때려줘'라고 말하는 일은 내가 시킨, 내가 정한,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때리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일로 만들어서 내가 나의 주인임을 자각하고자 하는 일을, 그전보다 나는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 이런 일들을 듣거나 읽거나 보게 되는 것은 그저 고통이기만 했다면 이제는 거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너의 존재에 주체성을 부여하는구나, 라는 인식이 스며들게 된것이다. 


강간판타지 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그리고 늘 생각해왔다. 강간당했던 그 폭력의 시간은 고통이었고 통제할 수 없는 갑자기 일어난 사고였다면, 그러나 내가 지금 섹스하면서 강간을 당하는 설정을 만든다는 것은 그 통제할 수 없었던 시간을 벗어나 자신의 통제 안에 그것을 두려 함이겠구나, 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 속에서 견디어 냈으면서도 종국엔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도 나치의 학살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지만, 그러나 내 생명을 끝내는 것을 나는 내가 통제하겠다, 는것. 그 지점에 대해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그러나,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 아메리의 책을 읽고 이 지점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책을 읽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것을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러나 메리앤이 선택한 것, 강간 피해자들과 전쟁의 피해자들, 역사적으로 학대의 생존자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유죽음' 보다는 자살에 가까운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그 일이 없없다면,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거다. 메리앤에게 아빠와 오빠의 폭력이 없었다면, 메리앤이 굳이 주체성을 가져오기 위해 섹스중인 남자에게 '나를 때려줘'라고 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성폭력 생존자에게 성폭력이 없었다면, 굳이 섹스중인 상대에게 '나는 강간판타지가 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전쟁이나 민족학살이 없었다면, 그들이 내 죽음을 내가 선택한다고 죽음에 이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결국 내 죽음을 선택했으므로 이것은 자유죽음인가? 하면 나는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그들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중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의 죽음 자체에 대해 존중을 보낼 수 있을 지언정, 그러나 그것이 자유죽음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데에는 순전히 자기가 결정했던 일들만이 채워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좀머씨의 소년과 그리고 가수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정부와 완전히 다른 맥락이다. 코딱지를 눌렀던 나, 가수를 좋아하는 나, 시험을 망친 나,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음 같은 것들은 설사 본인에게 엄청난 치욕이었을지언정 그것이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아 코딱지는 좀 다르겠다) 그러나, 폭력은, 강간은, 학대와 학살은 다르다. 그것은 누군가 나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힌 것이고 그것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으며, 그것이 '나의' 치욕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피해자가, 생존자가 그것을 치욕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아빠가 나를 때린게 치욕스러워, 강간범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게 치욕스러워, 나는 이 삶을 끝내고 싶다, 는 그것이 내가 결정해야 하는 나의 수치가 아니라는 거다. 그 수치는 그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한 폭행자의 것이 되어야 하고 강간을 한 강간범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학대와 학살을 일삼은 가해자들이야 말로 수치와 치욕을 느껴야 했는데, 그런데 피해자와 생존자가 그것을 느끼고 이런 삶을 버틸 수 없다, 고 죽어버리는 것은 그것은 자신을 살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든 약을 먹었든, 그것을 '행한' 것은 나일지언정, 나를 그렇게 행하게 만든 것은 '나의 수치'가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행하게 만든 것은 '가해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그것이 자유죽음이 아니라 자살, 자신을 죽인것이 되지 않나. 그러나 여기에서의 자신을 죽인것이, 정말 '나 자신'인가? 이것은 자살인가? 그래서 나는 자살과 자유죽음은 그 사이에 아주 먼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자살은 자유죽음이 아니고 자유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다시, 올리브》에는 공부를 잘하고 인기도 많았던 여학생이 대학에 들어가서 자살하게 된 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알고보니 어린 시절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었다는 것. 결국 집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에게 죽음을 내린다. 이것은 자유죽음일까? 한 여성의 삶이 중간에 끝나버려 없음이 되는 것,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죽음을 그녀에게 행한 것이 그 자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유죽음인가? 장 아메리도 자유죽음을 자살과 구분한다. 처음부터 그걸 다르다고 언급하고 시작한다. 자유죽음은 자살과 구분해야 할 것이라고 나 역시 동의한다. 이것은 이렇게나 다르니까.



But he remembered where he was-right outside the main gorcery store here in town-when he found out that she had vinished Vassar and then killed herself. It was Trish Bibber who told him, a girl they had been in school with, and when Denny said, "Why?, " Trish had looked at the ground and then she said, "Denny, you guys were friendly, so I don't know if you knew. But there was sexual abuse in her house."

"What do you mean?" Dinny asked, and he asked because his mind was having trouble understanding this.

"Her father," said Trish. And she stood with him for a few momints while he took this in. She looked at tim kindly and said, "I'm sorry, Denny." He always remembered that too: Tisht's look of kindness as she told him this.

So that was the story of Dorie Paige. -p.144-145



하지만 그녀가 바사를 졸업하고 자기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했다-타운의 큰 식료품점 바로 앞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트리시 비버였다. 데니가 "왜 그랬대?" 하고 물었을 때 트리시는 땅을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데니, 너희 둘이 친하게 지내서 혹 알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집에서 성적 학대가 있었대."

"무슨 뜻이야?" 데니가 물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랬대." 트리시가 말했다. 그리고 데니가 그 말을 이해하는 동안, 잠시 그와 함께 서 있었다. 트리시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참 안됐어, 데니." 그는 그것 역시 늘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할때 트리시가 보여준 다정한 얼굴.

도리 페이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책 속에서



















아침부터 이 긴 글을 꼭 써야했다. 혹여라도 수많은 어떤 여성들과 남성들의 자살이 자유죽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까봐, 그렇게 가해자들이 빠져나갈까봐. 너네 죽음을 너네가 선택한 거잖아, 라고 제삼자가 말하게 될까봐. 그렇게 그 사이에 있던 폭력과 학대를 못본 척 할까봐.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생각이 내게 내내 있었다. 어떤 '살아야 해!'는 그것이 단지 내 기준에서의 삶이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어떤 '살아야 해!'는 그 수치가 네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당신의 것이라 생각해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일을, 당신은 하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하고 싶다.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Mauritshuis 를 갔을 때 본 사진이 생각나 가져온다. Morad Bouchakour 의 작품 <Traces (part2)>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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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2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복 강박(혹은 강복적 반박) : 프로이트가 발견, 확립시킨 개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괴롭고 고통스런 과거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을 가리킨다. 이런 충동을 지닌 개인은 자신이 그와 같은 사건이나 경험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사건들을 개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불운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유사한 삶의 비극들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운명 신경증 환자 또는 반복 강박 환자로 불린다.(출처는 나무위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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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딱 이렇게 달아놓으면 되게 멋있어... 보일 것 같은데
사족 붙이자면, 인간이 겪는 고난과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라벨링하고 유형화하는 제 습관 말예요, 이건 mbti가 아닌 것 같아요. 다락방님은 긴 글이 필요하고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하셨는 데, 저는 개념이 필요했거든요. 제가 겪은 것들을 빨리 상대화 시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 버튼 누르면 나오는 기계처럼요. 이런 상처에는 이런 방어기제, 이런 종류의 경험에는 이런 반응. 그래야 나 자신이 설명되고 설명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지금은 아녜요. 이게 확 잡히지는 않는데, (채집하고 싶다 ㅋㅋㅋ)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더 사유해볼게요. 지금은 플래그만 붙여두고 ^^

다락방 2022-08-22 13:58   좋아요 3 | URL
출처가 나무위키라니 ㅋㅋㅋ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긴 하지만, 신뢰와 별개로 반복 강박과 제가 언급한 지점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음 반복 강박 이라는 프로이트가 발견, 확립한 개념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인듯 하고요, 저는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원인을 생각하고 쓴 것 같아요. 결국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느냐로 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반복 강박 이라 부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음, 말씀하신 것처럼 분류하고 유형화 하는 것으로는 닿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이 분명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에 또다시 이름 붙이고 세분화하게 되겠지만요. ‘반복 강박 환자‘라는 네이밍은 설사 그것이 강박이라 할지라도 좀 가혹하게 느껴지네요. 이 부분은 제가 전혀 모르는 지점이라서 계속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납득하게 하는 구절들을 만나게 되겠죠. 역시 계속 읽는게 답인 것 같아요.

- 2022-08-22 18:27   좋아요 1 | URL
네, 계속 읽으실 다락방님!
자해/자살이라는 자신을 해치는 행위를 통해서 (박탈당한 자신의 통제권) 자유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 그렇다고 한들 최초 고통 유발자(?)들에게 고통이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를 질문하는,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거칠게 줄여 죄송합니다)이 글에서 제가 ‘반복 강박‘이라는 간단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떠올렸던 건. 중간에 노멀피플 등으로 인용해 놓으신 자해같은 섹스 혹은 강간 판타지 때문예요.

그들은 계속 자신을 상처 주는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그걸 반복하고 있다거나 오히려 그런 경험을 유발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요. (나쁜 남자만 찾아서 만나는 것 같은 여자들이 떠오르네용)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자신의 불운과 박복함을 탓하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그걸 반복하고 있는 행위의 이면 뒤에 무의식적인 오랜 상처가 있다는 걸 의식화 하면 반복하지 않겠죠? (말이 쉽죠. 너무 어렵습니다.) 악몽처럼 그 고통을 반복하는 일 보다 (어쩌면 고통의 원인일)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기가 더 어렵다는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 존재의 생겨먹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상황을 계속 반복해서라도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애처로운 ㅜㅜ 개인의 삶에 대한 노력일 수도 있고요.

저는 ‘강박 ‘환자‘‘라고도 ‘우울‘증‘‘ 이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병리적으로 다루고 싶지가 않아요... 이런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들을요) 환자가 아니고... 증이 아니고........ 그냥 우린 그렇게 생겨 먹은 거(?) 같거든요. 시간을 다시 돌려서라도, 상황을 다시 똑같이 만들어서라도.... 그 때의 나를 구원하고 싶은 건 너무 당연한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상처에서 빠져나와 더 좋은(그게 무언지 모르겠지만.. 그런게 있다면) 삶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건 병리적인 현상으로 다뤄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되기도하고요. 근데 그건 개인적인 차원이고, 또..... 애시당초 그런 구조가 안만들어지게끔 해야하는 것도 우리가 물어야 할 거 같고요.

마지막에 햇빛을 피하는 다락방 속 여자 그림을 첨부하셨잖아요. 빛을 몰라서가 아니라, 빛이 싫어서가 아니라 빛보다 중요한 어둠을 해결해야만 하는 아주아주 깊은 나도 모르는 내 소망이 있는 거죠. 그런데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 억압된 욕망들을 ‘의식화‘해서 ‘포기‘하라고해요. 그 상황으로 똑같이 돌아간다해도 애초의 상처가 만들어진 상황과 절대 똑같을 수가 없으니, ‘포기‘하라고요. ... 포기.... 포기가 안되는 거죠.

길고 긴 글의 말미에.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한다! 그 수치는 네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씀은 아주 강한 정신이고, 똑바른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너무 원론적예요. 가운데의 무언가가 더 필요해요. 다락방님 말씀대로 우리는 긴 글이 필요해요. 왜냐면 상처는 유형화 될 수 있을지라도 고유하니까.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방식 역시, 고유한 거고요. 전 또 여기서 에바일루즈 생각나는 데요. 현대의 심리학이 그렇게 상처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그 상처로부터의 ‘회복-치유‘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해결을 못하느냐고 묻는 거예여. (제가 장아메리 글 읽지 않아서 다락방님이 책에서 받은 인상과는 너무 다른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같네요.)

수치와 치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할거예요. 저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요.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도 좋아요. 그게 건강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역시 충분하지가 않아요.

저는 어쨌든 사람을, 삶을, 죽음을 계속해서 더 사색하게 하고 저를 또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페이퍼가 좋아요. 저는 이 페이퍼를 보면서... ‘반복 강박‘이라는 인간의(나자신의) 생겨먹음이 떠올랐어요. 왜냐면 전 메리앤을 길고 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이...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청아 2022-08-22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에게 이런 긴 글을 쓰게 만든책 장바구니에 쏙 담아갑니다. 올려주신 작품은 다락방같아 보여요. 구석에서 울고 있지만 공간이 그녀/그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느낌 ^^*

다락방 2022-08-22 13:59   좋아요 2 | URL
저 그림을 보는데 되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저 들어오는 빛은 희망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거기에 닿지 않으려고 숨으려고만 하는 인간이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우울한 그림 같은거 안좋아하는데 저건 너무 인상깊었어요. 저 그림의 어느 지점에 끌린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mini74 2022-08-22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해자의 몫이어야 할 수치.ㅠㅠㅠ 남성에 비해 여성들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는 글을 봤어요. 속에 담아두고 자신의 탓도 있다 자책하다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파괴한다고..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란 말, 올려주신 작품, 미미님 말씀처럼 위로가 되어주는 느낌입니다.

다락방 2022-08-22 14:19   좋아요 2 | URL
어떤 죽음이 잘못된 대상을 찾아 들어온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것이 자살이란 형태로 일어나고요.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요. 죽긴 왜 죽어, 악착같이 살아야지! 하는건, 주변인들의 말인 것 같아요. 당사자는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는데, 더 이어나갈 힘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너무 선을 넘어버리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그들을 그렇게 죽게두는 것은 답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순수한 선택은 아니니까요. 분명 그전에 어떤 가해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일들을 우리는 살면서 어떻게 극복하고 또 해결해나가야 할까요. 에휴..

단발머리 2022-08-22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유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다락방님이 이 글에서 의문을 제시하는 지점, ‘자살과 ‘자유죽음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저는 장 아메리가 수용소 생환자라는 지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도 겹쳐져 보이구요. 세상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그 사람의 삶 속에 있었다고, 전 그렇게 봐요.
책을 읽고 댓글 달러 다시 오겠습니다. 무거운 책이라 쉽사리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 속에.....

다락방 2022-08-22 15:08   좋아요 2 | URL
저는 삶이란 무엇인가 묻고 또 죽음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 자체가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에게 철학책이었고 그래서 읽기에 좋았어요. 의문을 던지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게 좋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제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서도 또 생각하고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도 계속 곱씹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올라온 다른 리뷰들을 보노라니 다른 분들의 리뷰에서는 자살과 자유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같아서 내가 잘못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마도 속히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장 아메리가 ‘자살‘이란 단어를 굳이 밀어두고 ‘자유죽음‘을 택한 이유가 있다고 보거든요.

단발머리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유대인 생존자였던 장 아메리가 이 책의 저자라는 거, 그런 그가 자유죽음에 대해 썼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아무 정보도 없이 책을 펼쳤다가 저는 작가 소개를 읽고 놀랐거든요. 저는 음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해서 ‘무겁다‘ 보다는 ‘철학적이다‘ 가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단발머리님께 꼭 읽어보시라 말할 수는 없는 책이지만, 혹여 읽게 되신다면 단발머리 님은 어떤 글을 쓰실까 궁금합니다.

독서괭 2022-08-22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야기를 잠자냥님에 이어 다락방님 것까지 연달아 읽으니 더 흥미롭네요. 자유죽음과 범죄 등 트라우마가 쌓여 생긴 ‘자유롭지 못한‘ 죽음을 구별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그걸 면죄부 삼으면 안 되지요, 암요. 나쁜 놈들은 자기한테 유리한 건 잘도 끌어다가 아전인수 하는 데 선수니까요.
그런데 밑에 리뷰도 엄청 길게 쓰셨군요? ㅎㅎㅎ 이따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분이 동시에 이 책을 읽으셨어요? (놀람)

- 2022-08-22 18:44   좋아요 2 | URL
리뷰대회 (속닥속닥)

잠자냥 2022-08-22 22: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그럼요 그럼요 물질주의자에 사대주의자인 저희에겐 외국책 리뷰 대회가 딱입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8-23 07:02   좋아요 0 | URL
앗 그런거군요 ㅎㅎㅎ 리뷰대회 저는 능력부족을 실감하고 관심을 접어서요^^;;

다락방 2022-08-23 08:59   좋아요 2 | URL
이게 그러니까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저는 지난주 어느 늦은 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대한 리뷰를 읽게 됩니다. 응? 이거 바로 얼마전에 *** 님도 리뷰 쓰셨는데, **** 도?..... 혹시? 하고 보니 리뷰대회가 있었던거죠. 마침 마감이 다음날이고 나는 책이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리뷰를 썼는데, 리뷰가 너무 똥망인거에요... 하아- 저는 후회합니다. 나는 틀렸어, 글러먹었어, 후회한다... 라고 했더니 친구가 <자유죽음> 도 리뷰대회가 있다고 알려주는데, 월요일 마감이고 그 소식을 금요일에 들은 저는 음................ 하다가 토요일에 부랴부랴 책을 사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읽다가 술을 마시고 다음날 또 읽고 그렇게 리뷰를 쓴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마감인 어제 우르르르르르르르르 리뷰들이 몰려오더니 저는 또 침울해집니다. 쓰지말걸....


리뷰 대회 능력부족으로 관심을 접은지 오래이고 그래서 다 모르고 있다가 괜히 마감전날 들어가지고 이런 일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눈물 좀 닦고 올게요.

독서괭 2022-08-23 09:12   좋아요 0 | URL
아니, 이삼일만에 책을 읽고 써내신 리뷰라는 거죠? 능력자 인증 아닌가요??😳
 
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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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더운 여름날을 사랑하고 빗소리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커피향에도 행복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을 주는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인간이고 싶다. 그런 한 편, 죽음이 두렵다.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내가 '없음'이 된다는 것, 내가 '있지 않음'이 된다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 두렵다. 매일밤 잠들기 전에 그 날의 후회나 기쁨들이 생각나곤 하지만, 아주 자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든다. 내가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두려움이다. 그렇게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드는 밤이면 가만가만 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괜찮아, 괜찮아, 만약 정말 내게 죽음이 닥친다면, 그래서 정말 죽는다면, 나는 없음이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해. 두려움 같은 것도 더이상 없어. 내가 없는데 무슨 두려움이야.


그렇다, 죽은 후에는 내가 '없음' 이라는 거,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라는 것은,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살아가야겠다는 각오 혹은 두려움을 떨치겠다는 의지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다 겨우 다다른 경지였다. 그나마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된 것은 죽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죽음에 대한 책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은 결과였다.


그러다 최근에야 나는 내가 삶에 열심인 태도로 임하는 것, 사소한 자연 현상에도 혹은 인간 관계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삶의 유한함을 언제나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죽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나는 그 누구보다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죽음이 나를 잠식한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 잘 인지하고 있던 거였어. 그것이 나를 열심으로 살게 만들고 작은 목표들을 가지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눈 돌리는 곳마나 기쁨과 행복이 있게 했구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움직이고 여행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틈틈이 웃고 즐거워하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이제 삶의 유한함을 내가 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계속 죽음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인간에게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것을 내가 좀더 잘 받아들이거나 혹은 좀 더 잘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간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독서가 나를 이만큼까지 오게 했다면, 앞으로 더 알고자 하는 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나는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으면서 내가 확실히 삶의 편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죽음과 나를 갈라두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 저쪽 편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확실히 이 편이었어, 저 편을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지, 저 편은 이 편의 반대였고 이 편이 선이라면 저 편은 악이었어. 그러나 자유 죽음이라는 단어가('자살'이 아니다) 이 편에만 있고자 하는 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악인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래, 나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을 향해 이 책에서 장 아메리가 지적한 것처럼 저잣거리의 교훈으로만 대하려고 했었던 거다.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만 하는가? 라고 장 아메리가 묻자마자, 나는 갑자기 혼란을 느낀다. 



그러게.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선인가?



'장 아메리'는 이 책에서 '에셰크'라는 단어를 소개한다. 그것은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 라고 한다. 내가 나의 실패에,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맞닥뜨렸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게 아니라 '이런 식은 아니다, 싫다'고 거부하며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악이 아니라고,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의?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선택. 나의 주체는 나이고 나의 선택도 오로지 나여야 한다는 것. 여기에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장 아메리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학자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중 예로 드는게 '슈니츨러'의 <구스틀 소위> 이다. 소위의 명예를 잃게 되자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내용의 단편 소설을 예로 들면서 책 한 권에서 계속 주장한다. '그의 과거가 정말 치욕적이었을까? 그의 느낌 안에서는 분명 그랬으리라.(p.112)' 라고. 그러니까 타인이 '그정도의 것' 이라든가 '다른 식의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느냐 하면, 그가 느낀 절망은 그 자신에게 너무나 강렬했다는 것.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p.115)



장 아메리가 구스틀 소위를 데려와 '나에게 결정적 사건이므로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고 했을 때, 나는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를 떠올렸다. 미 비포 유 속에서  '윌'은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신체활동을 즐기는 남자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운동을 즐기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와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그에게 '클라크'라는 여성이 개인 간호를 맡게 되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우정과 사랑이 싹튼다. 윌은 자신의 삶이 사고 이후로 우울하기만 했는데 클라크 덕에 더 밝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내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도 오로지 클라크 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윌은 '장 아메리'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죽음'을 택한다. 클라크는 자신의 사랑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윌의 마음이, 그리고 그들 사이의 이 감정이 자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윌은 말한다. 아니라고, 그건 물론 충분히 좋고 긍정적인 감정이지만, 윌이 생각하는 윌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클라크가, 클라크의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하찮아서가 아니라, 윌이 생각하는 윌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는 그런 삶을 유지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그의 주체가 되어서 자유 죽음을 택하는 거다.



"난 그걸로 안 돼요. 이, 내 세상은, 아무리 당신이 있더라도 모자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클라크, 당신이 오고 나서 내 삶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물러설 차례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이 곁에 있다면, 어쩌면 썩 괜찮은 삶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내'인생이 아니에요. 당신이 얘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들과 나는 달라요. 그건 내가 원하는 삶과 전혀 다르단 말입니다. 비슷한 구석도 없다고요."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p.471-472



아무리 윌을 사랑한다고 해도 윌에게 '아니야 네 인생은 충분히 빛난다' 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윌이 느끼는 윌 자신의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자유 죽음을 택하는 윌에게 아무리 클라크라고 해서, 그리고 윌의 가족이라고 해서 '그래도 살아가야지!' 라고 해도 되는걸까? 삶을 사랑했던, 그러니까 무조건 이 편이기만 했던 내가,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윌에게도 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말해도 되는 걸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 책을 읽고난 후 걸으면서 오래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 장 아메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박해를 받으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지만 마지막엔 자유 죽음을 택했다. 우리는 간혹 고통의 시간을 다 견뎌놓고서도 종국엔 자유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고통을 다 견뎠으면서도 자살햇을까?' 라고 의문을 갖고 '그것이 그사람을 지배한걸까?' 라고 자연스레 생각하지 않았었나. 나는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치 치하에서도 견뎌낸 삶은, 그것이야말로 그가 버티어낸 것이며,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유 죽음을 택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인 것을 이제는 알겠다. 너네가 죽인다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야, 니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해도 내가 죽는 것이 아니야, 내 죽음은, 내가 죽고 싶을 때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야말로 자유 죽음, 자신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에 대해서도 생각났다. 읽으면서 내가 몹시 혼란스러웠던 그리고 스트레스 받았던 부분인데, 주인공 '메리앤'은 남자친구에게 섹스 도중에 자기를 때려달라고 말한다. 그것이 옳다 옳지 못하다와 별개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때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 내면의 상처인가,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학대를 당해놓고 굳이 자기가 학대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아파하기만 햇었는데, 그 행위-나를 때려줘!-야말로 자신이 자기 자신의 주인임을 찾아가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다가 들었다. 아빠오 오빠로부터 학대당한 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나에게 어쩔 수 없이 닥쳐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너에게 나를 때려 달라고 말해서 가해지는 이 폭력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지금 맞기를 선택했다, 지금 이 순간 내 육체의 주인은 나이다, 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겠는 거다. 물론, 나는 메리앤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말함으로써 주체적이 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그런 시간도 벗어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떤 고통을 부러 당함으로써 내가 지금 이 시간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 샐리 루니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가슴 아프기만 했는데, 장 아메리는 나로 하여금 샐리 루니의 글을 뒤늦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아, 여러분, 책 읽는 거 진짜 너무 좋지 않나요? ㅠㅠ 나는 너무 좋습니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여전히 삶의 편 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반대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의 고통 혹은 치욕에 '왜 고작 그거 가지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안다면, 결국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나 자신의 주체가 되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은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부터 나를 조금 떼어놓는다. 밤에 잠들기 전에 또 죽음이 나에게 닥쳐올 것이고 내가 없음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서워질라 치면, 이제 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차피 없음이 되면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해, 이제는 '죽음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도 있다' 고 다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 아메리가 재차 중요하다고 말해왔던 것,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 나의 주인은 나라는 것. 그것은 나를 단단히 서게 할 것이며, 죽음이란 두려움이 찾아들 때 나를 다독이게 해주기도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선택하게 될지, 그것은 아직 나에게 먼 일 같고 내 일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 편의 맞은 편에 있는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아마 앞으로도 삶을 사랑할 것이고, 나에게 어떤 치욕이 찾아들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선택이 최종적으로 나의 몫임을 인지한다. 그래, 죽음이야말로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장 아메리는 이 책을 통해 자살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치욕 자신의 고통 그리고 종국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앞에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비난하기를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내 기준이 나만의 것이듯 그의 선택은 그의 것이니까. 


유진목 시인은 이 책의 추천의 글에서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덮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호흡으로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는 사람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는 사람이었다(사실 단숨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만 곱씹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유한함에 대한 불안함을 가진 나에게 이 책은 작은 다독임이 되어주었다. 밑줄을 아주 많이 그었다.



두비토(Dubito‘나는 의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다.). 적당한 때가 오면 반드시 자유죽음과 기독교를 더욱 자세히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여기서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진정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 뛰어내려야 할 상황은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자유죽음, 즉 ‘자살‘은 이런 맥락에서는 결국 죄악이라고 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위대하다. 주님의 자비는 끝을 모르므로 언젠가는 용서해주실 거다. 그래서 ‘신앙인‘은 죽음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 안으리라. 그렇다면 모든 게 좋다. 삶과 죽음을 두고 벌이는 논리적인 혼란이라는 우리의 문제는 고작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다. 아니다, 더욱 나쁘다. 이건은 불행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 혹은 원한다면 시대정신은 신앙과 거리가 멀기만 하다. 그토록 깊은 신앙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 P53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때 슈니츨러는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말하고 생각하게 한다. 위의 문제들을 놓고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지껄여 대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게 만든다. 슈니츨러는 문제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지만, 그게 우리에게 아주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56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사느니,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의 길이 곧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길이 아니다. 그 어디로도 이끌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하던 불쌍한 처녀가 죽었다고 가수의 품 안에 안길 수야 없지 않은가.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그러니까 가정부, 첼란, 클라이스트, 하젠클레버(Walter Hasenclever), 헤밍웨이 등은 그들의 어리석은 죽음으로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치명적인 증거를 내놓았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인생은 ‘최고로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다.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심오한 농담 그 이상이라는 것을! - P63

존재, 곧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하기 아주 힘든 문법적 구문을 가지고 있다. ‘있음‘이라는 말은 그 모순, 즉 ‘있지 않음‘이라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를 모순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있지 않음‘, 곧 ‘없음‘이라는 말뿐인 불가능성을 강제로 이끌고 오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의미한 사람일 뿐,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힌 괴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유죽음을 미친 짓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 P68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망자는 자신의 ‘평안‘을 찾았습니다!"하고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들어야만 가까스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때 죽은 육신, 곧 시체가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완전한 해체로 이끄는 화학 과정이 시작된 시체가 무슨 평안을 느끼겠는가. - P81

학교 교육 덕분에 이제 인간은 죽음이 하나의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들어선 어떤 과정의 종착점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세포들의 자기 재생 능력이 그 사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 P85

죽음이 아무리 자연적이라 한들 내 죽음은 나에게 최고로 반자연적이다. 이성을 마비시키며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게 내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 P87

도대체 왜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돌아가면 왜 안 되는 것인가? - P98

나는 역사와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호감 가는 경우가, 드높은 용기로 성취해낸 정의가, 희망에 매달려서 이뤄졌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자신을 없음으로 던지는 행위, 이게 역사를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 P106

그의 과거가 정말 치욕적이었을까? 그의 느낌 안에서는 분명 그랬으리라. - P112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이 죽음이 자연적인 이유는 내가 일상 언어가 자연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신적으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선택한 죽음은 나에게 있어 자연적이다. - P115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다.)‘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자살이다. - P119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 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 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P119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사회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지 않았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 놓는다. - P120

머리 때리는 것을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굴욕으로 여기는 게 우연은 아니다(아이의 머리를 절대로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P130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죽음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의사가 자랑스러워한 구조 활동이라는 게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 P150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P175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어떤 때 죽으며 무엇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앞장서서 규정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위의 명령은 주제넘은 월권일 뿐이다. 그래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죽음과 관련해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의 요구와 똑같은 특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회든 종교든 인간에게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결정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와 종교는 인간에게 결정의 자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칸트도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의무라는 것을 범주적으로 생각해본 끝에 조그만 시골 교회 목사나 위대한 신학자들처럼 자유죽음을 비난했다. 말인즉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말고, 신이 부여한 의무 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에 순종하라고 칸트는 타일렀다. 의무? 종교가 인간에게 간섭하며 요구하는 의무라는 것은 사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 P175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다.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을 뒤집어씌우지 않고 생각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생물학적인 숙명이라는 것과 따로 떼어볼 때, 인간은 본질을 드러낸다.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 P181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든 학문에서든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경쟁하는 적수가 자살자다. 그는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안다. - P198

자살자는 고집 센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하는 말을 하며, ‘아멘‘ 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지극한 존엄함에게,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풍문으로 자살자를 심판하는 세상에게! 평온한 바다와도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사면의 벽들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서로 배척할 뿐이다. 다만, 있지도 않은 저 하늘나라에 가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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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from 마지막 키스 2022-08-22 08:30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 2022-08-21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셰크. 피가되고 뼈가되는 아니 피가있고 뼈가 있고 살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삶의 의지로 충만한 리뷰네요 ㅋㅋㅋ 이미, (또), 알고 있는 사람 다락방 ㅋㅋㅋㅋ 저는 다락방님이 글에서 어려운 말 안쓰면서 반복해서 곱씹으면서 주문 거는 거 좋아요 ㅋㅋㅋ
죽음에 대해 때때로 심각해지는 게 저잣거리나.. 고준담론은 정말 아닌데요… 너무 중요한 이야긴데… 사실 생각하길 미루죠. 좋은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삶의 편입니다. 만약에 태어나는 거 물어보면 안태어날꺼지만요 ㅋ

다락방 2022-08-22 09:12   좋아요 2 | URL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그보다 죽기 싫은게 더 크지만요. 죽기 싫다, 그러나 죽어야 한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까요? 그걸 알 수 있다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말예요.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ㅋㅋㅋㅋㅋ

죽음에 대한 책은 가끔 읽게 되더라고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더 그런것 같아요. 알고 싶고 어쨌든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아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쉽게 쓰는건, 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어려운 거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소통에의 욕망 같은 것이 아닐까. 하다가 아니면 .. 어려운 말은 내가 몰라서? 뭐, 그렇습니다.

단발머리 2022-08-21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의 의지가, 활력과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리뷰네요. 자살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락방님 리뷰 읽고 나니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인거 같고요. <미 비포 유>의 ‘윌‘을 언급해주셔서 샘 클라플린 떠올리면서 읽으니 훨씬 더 좋았어요.
저도 죽음으로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거기에서 말하는 ‘나‘란 내가 가진 의식을 말할텐데, 사실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제가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잘 읽고 갑니다. 저는 물어보면 다시 또 태어나고 싶어요 ㅎㅎㅎ

- 2022-08-21 19:42   좋아요 1 | URL
단발님은 바보얏🤣🤣🤣

단발머리 2022-08-21 19:44   좋아요 1 | URL
싸우자! 😡😡😡

다락방 2022-08-22 09:15   좋아요 1 | URL
저자는 자살과 자유죽음을 구분하는 쪽이에요. 저자가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건 자유죽음이고요. 저는 죽음에 대한 책을 가끔 읽어줘야 겠더라고요. 저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인지 모르니까 자꾸 두려워하잖아요. 알면 알수록 두려움의 크기는 줄어들겠지, 하고 읽는 쪽인데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든다기 보다는 나를 다독이는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나게 되는것 같아요. 어쨌든 이것도 좋습니다. 저는 그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긴 책이겠거니 했는데 뜻밖에 철학책이며 자신의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책이어서 좋았어요. 아, 그래서 말인데요 단발머리 님, 다음 원서에 대해 제안을 제가 단톡방에 하겠습니다. ㅎㅎ

mini74 2022-08-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도 두렵지만 죽은 후 남게 되는 사랑하는 이들이 슬플까도 두려운데 그건 제 몫의 걱정이 아니겠죠 ㅎㅎ 다락방님이 삶을 사랑하는 이유들이 참 좋네요.

다락방 2022-08-22 09: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니 님.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결정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무조건 살라고 하는 이유는 사실 죽음을 결정한 자 보다 주변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아요. 남은 자들의 슬픔이 너무 클까봐서요. 제가 리뷰에도 썼지만 [미 비포 유]에서 윌이 죽음을 결심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말리려고 하지만 그걸 말리는 것, 죽음을 미루거나 중단시키는 것은 누구를 위한것인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좋은 독서였어요.

그레이스 2022-08-21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어요
덕분에 내용을 조금 알고 가네요
미 비포 유 읽고도 생각이 많았어요

다락방 2022-08-22 09:41   좋아요 1 | URL
네, 미 비포 유는 뜻밖에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주져는 책이었어요. 로맨스인줄 알고 읽었다가 정말 생각이 많아졌고 그리고 이렇게 지금도 계속 생각나네요. 저는 윌이 죽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건 윌이 아닌 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책 덕분에 미 비포 유를 또 생각하게 됐어요.

바람돌이 2022-08-2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의 한분이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김학철선생님이거든요. 그 분이 85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 마지막 20일간을 곡기를 끊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준비하고 흐트러짐없이 죽음을 맞았다고 들었어요. 죽음조차도 그분답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자유죽음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네요.
저 역시 삶을 너무 너무 사랑하지만 죽음은 어쨌든 인간으로서의 나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항상 해요.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다는 것은 삶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다락방님 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좋네요. ^^

다락방 2022-08-22 09:4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 님께서 언급하신 김학철선생님 이야말로 자유죽음을 선택하신 걸로 보여지네요.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준비한다는 태도랄까요. 내가 내 삶을 살았으니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내가 하겠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인것 같아요.

죽음이 두려워서 저는 자꾸 죽음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고 싶어서요.

책읽는나무 2022-08-21 2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가 없음‘의 무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면 어릴 때만큼의 공포감은 좀 덜해졌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들을 하면 그냥 서글퍼지게 되는 것 같아요.
경험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없어진다는 건 나의 고통은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좀 속 시원해질 것 같은데, 남겨진 나의 가족들과 나를 가깝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이 눈에 밟혀 그게 서글프고 짠하게 느껴져...없어지고 싶지 않다는 미련이 남네요.
자유 죽음 제목이 참 의미심장 합니다.
저는 미련 때문에 아마도 죽음을 선택하게 되진 않을 것 같긴한데 말입니다.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 또 다른 관점은 될 듯 하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리뷰도 넘 좋네요.
무거울 수 있는 주제도 다락방님만의 간결한 사유들이 전해져 오네요. 잘 읽고 갑니다^^

다락방 2022-08-22 09:46   좋아요 3 | URL
맞아요 책나무 님! 내가 ‘없음‘의 상태가 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나는 두려움도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느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의 두려움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다가도 금세 철학적이 되어서, ‘그렇다면 없음이 될건데 나는 지금 왜 있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우리는 결국 ‘없음‘이 될건데 지금 왜 있는걸까요, 책나무 님? 제가 [자유죽음]을 읽으면서 이거 철학책이로구나, 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적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현재 상태로는 제가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삶을 최대한 붙잡으려고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책을 읽는 건 너무 좋아요!! >.<

잠자냥 2022-08-22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생에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다부장님은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음료를 주문해서 마시고,
다음 생은 당연히 그 무엇으로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잠자냥은 이 책을 나른하게 누워서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결론은 뜨거운 책이었습니다-

다락방 2022-08-22 13:51   좋아요 4 | URL
네 이 책은 저에게 좋은 책이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입니다. 읽기를 잘한 책이에요. 특히 나는 나 자신에 속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반복해주는게 좋았어요!!

잠자냥 2022-08-22 14:12   좋아요 3 | URL
기대 이상으로 울림이 큰 책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사회나 종교가 한 개인을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가의 그 ‘포효!‘가 인상 깊었습니다. 작가의 삶도 그 자체로 이 세상에 지지않겠다던 으르렁거림 같았고요...

다락방 2022-08-22 14:16   좋아요 4 | URL
네 잠자냥 님, 저도 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게 진짜 좋더라고요. 사회나 종교나 한 개인을 억압하는 건 같다고 하면서 재차 주장하잖아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고요. 그래서 이 작가나 이 책이 비난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잠자냥 2022-09-07 16: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장님! 이 <자유죽음>으로 3만원 벌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9-07 17:22   좋아요 3 | URL
네. 봤습니다. 알라딘도 제가 불쌍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ini74 2022-09-08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08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드려요
다락방님!

책읽는나무 2022-09-10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