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씨의 화면보호기에서는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05:37 이었다. 사실 나는 오후 시간을 쓸 때 17:37 로 쓰는 쪽이 더 편하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건 대학시절 편의점 아르바이트 할 때 습관이 들어서 그렇다. POS의 시간이 항상 저렇게 표기됐던 것.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오후는 12시 이후에 숫자를 계속 붙여나간다. 13시, 14시. 그런데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 얘기는 아니고. 05:37 나는 숫자로 사람을 떠올린다. 05:37 이라고 하면 5와 3과, 7이라는 숫자가 누군가를 화악- 기억나게 했다.
그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아마도 소설 속 표현이었으려나. '낮은 웃음소리'가 뭔지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언젠가 수화기 저쪽 너머에서 웃는데 그 소리가 정말 낮은거다. 근데 그게 너무 좋은 거다. 같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눴을 때, 그는 나의 목소리가 좋다고 몇 번 얘기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좋다고 생각했던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낮게 웃는 소리를 듣는데 가슴 속에 몽글몽글 어떤 따뜻함이 싸악 퍼져나가면서, 그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다, 또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었다. 그는 혼자일 때도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있었는데, 직장내에서는 직급이 있는 편이라 나랑 통화를 하다가도 업무적으로 어떤 일이 생기면 목소리와 말투가 확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그가 지금 저쪽 세계에 있는데 이쪽 세계에 있는 내게 접근하고 있다고, 접속하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내게 더러 '너랑 이야기 할 때만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라고 말했고, 키우는 금붕어에 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말했다. 그 금붕어는 지금쯤 이미 죽어 흔적 조차 사라졌겠지? 그 금붕어가 육체적으로 먼저 사라졌을까, 나의 존재가 그의 마음에서 먼저 사라졌을까? 5와 3과 7은 그를 생각나게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5와 3과 7은 그 사람이 떠오른다. 아마 그조차도 알지 못하게 나는 그를 그 숫자들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려고 기억한 게 아니라 그 숫자들과 자동연상이었다. 나는 그의 꿈을 꾼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뉴스를 보다가 그 사람 생각이 났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관련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그 당시에 있었고,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 한가운데에 있을것이니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물어야 할까. 그렇지만 안부가 궁금한데, 하던 차에, 바로 그 때 그로부터 문자가 왔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간단한 문자였고, 나는 그 문자를 받자마자 벽에 기대어 선 뒤에 스르륵, 주저 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
5와 3과 7이 나로 하여금 그를 생각하게 하였다면, 그를 생각하면, 아아, 어쩔 수 없이,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이 떠오른다. 신호등, 횡단보도, 부겐빌리아 넝쿨.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중략)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 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p.88)
바로 그 때문에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바랐던 때가, 내게, 있었다.
도시가 활짝 열렸던 적이, 내게, 있었다.
치킨을 앞에 두고 심장이 펄떡 거렸던 때가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마주 앉아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주 많이 흘렀다. 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이 번역되어 나왔을 때, 이벤트로 당시에 5천원권 파리바게트 상품권을 주었더랬다. 나도 책을 사고 그 상품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SPC 불매하는 사람이 되어 파리바게트의 소세지빵이 먹고 싶지만 사먹지 않고 있다. 시간은 이렇게나 많이 흘러서 파리바게트 불매하는 사람이 되었어, 내가. 너는 어때? 파바 불매하니?
종종 생각했다. 우리가 조금 멀었을 때가 더 좋았다고. 우리가 가까웠을 때, 하루에 가장 많이 대화를 하는 사람이 서로였을 때, 그 때에는 그게 그렇게 좋았는데,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멀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조금 전으로, 그렇게까지 대화를 많이 하진 않는 쪽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출근해서 말을 걸고 퇴근할 때 인사를 하는, 그런 식으로까지 친해지지는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는 그쪽 세계에, 나는 이쪽 세계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좋았던 것 같아. 우리가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가슴 속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부겐빌레아 넝쿨을 품은 채로, 우리의 손이 서로에게 닿아있었던 것만 기억하면서 조금쯤 긴장하고 조금쯤 먼 사이로 그렇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멀어지고나면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없는 편이 나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나였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생각한다. 받아놓고 좋아했던, 가슴 뛰는 사진이지만, 그걸 갖고 있는 건 어쩐지 그러면 안되는 일 같아서 바로 삭제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아마도 네 인생의 복이었을 것이다. 그 사진, 으윽, 안타까워하면서 지웠다. 우리가 가까웠을 지언정, 내가 너의 그런 사진을 갖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 와, 진짜 잘 늙고 있다. 대단한 중년이야, 나는. 한때 너와 가까웠던 나는 이렇게나 더 근사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