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더운 여름날을 사랑하고 빗소리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커피향에도 행복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을 주는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인간이고 싶다. 그런 한 편, 죽음이 두렵다.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내가 '없음'이 된다는 것, 내가 '있지 않음'이 된다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 두렵다. 매일밤 잠들기 전에 그 날의 후회나 기쁨들이 생각나곤 하지만, 아주 자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든다. 내가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두려움이다. 그렇게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드는 밤이면 가만가만 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괜찮아, 괜찮아, 만약 정말 내게 죽음이 닥친다면, 그래서 정말 죽는다면, 나는 없음이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해. 두려움 같은 것도 더이상 없어. 내가 없는데 무슨 두려움이야.


그렇다, 죽은 후에는 내가 '없음' 이라는 거,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라는 것은,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살아가야겠다는 각오 혹은 두려움을 떨치겠다는 의지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다 겨우 다다른 경지였다. 그나마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된 것은 죽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죽음에 대한 책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은 결과였다.


그러다 최근에야 나는 내가 삶에 열심인 태도로 임하는 것, 사소한 자연 현상에도 혹은 인간 관계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삶의 유한함을 언제나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죽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나는 그 누구보다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죽음이 나를 잠식한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 잘 인지하고 있던 거였어. 그것이 나를 열심으로 살게 만들고 작은 목표들을 가지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눈 돌리는 곳마나 기쁨과 행복이 있게 했구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움직이고 여행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틈틈이 웃고 즐거워하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이제 삶의 유한함을 내가 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계속 죽음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인간에게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것을 내가 좀더 잘 받아들이거나 혹은 좀 더 잘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간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독서가 나를 이만큼까지 오게 했다면, 앞으로 더 알고자 하는 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나는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으면서 내가 확실히 삶의 편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죽음과 나를 갈라두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 저쪽 편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확실히 이 편이었어, 저 편을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지, 저 편은 이 편의 반대였고 이 편이 선이라면 저 편은 악이었어. 그러나 자유 죽음이라는 단어가('자살'이 아니다) 이 편에만 있고자 하는 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악인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래, 나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을 향해 이 책에서 장 아메리가 지적한 것처럼 저잣거리의 교훈으로만 대하려고 했었던 거다.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만 하는가? 라고 장 아메리가 묻자마자, 나는 갑자기 혼란을 느낀다. 



그러게.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선인가?



'장 아메리'는 이 책에서 '에셰크'라는 단어를 소개한다. 그것은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 라고 한다. 내가 나의 실패에,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맞닥뜨렸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게 아니라 '이런 식은 아니다, 싫다'고 거부하며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악이 아니라고,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의?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선택. 나의 주체는 나이고 나의 선택도 오로지 나여야 한다는 것. 여기에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장 아메리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학자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중 예로 드는게 '슈니츨러'의 <구스틀 소위> 이다. 소위의 명예를 잃게 되자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내용의 단편 소설을 예로 들면서 책 한 권에서 계속 주장한다. '그의 과거가 정말 치욕적이었을까? 그의 느낌 안에서는 분명 그랬으리라.(p.112)' 라고. 그러니까 타인이 '그정도의 것' 이라든가 '다른 식의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느냐 하면, 그가 느낀 절망은 그 자신에게 너무나 강렬했다는 것.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p.115)



장 아메리가 구스틀 소위를 데려와 '나에게 결정적 사건이므로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고 했을 때, 나는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를 떠올렸다. 미 비포 유 속에서  '윌'은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신체활동을 즐기는 남자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운동을 즐기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와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그에게 '클라크'라는 여성이 개인 간호를 맡게 되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우정과 사랑이 싹튼다. 윌은 자신의 삶이 사고 이후로 우울하기만 했는데 클라크 덕에 더 밝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내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도 오로지 클라크 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윌은 '장 아메리'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죽음'을 택한다. 클라크는 자신의 사랑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윌의 마음이, 그리고 그들 사이의 이 감정이 자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윌은 말한다. 아니라고, 그건 물론 충분히 좋고 긍정적인 감정이지만, 윌이 생각하는 윌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클라크가, 클라크의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하찮아서가 아니라, 윌이 생각하는 윌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는 그런 삶을 유지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그의 주체가 되어서 자유 죽음을 택하는 거다.



"난 그걸로 안 돼요. 이, 내 세상은, 아무리 당신이 있더라도 모자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클라크, 당신이 오고 나서 내 삶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물러설 차례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이 곁에 있다면, 어쩌면 썩 괜찮은 삶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내'인생이 아니에요. 당신이 얘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들과 나는 달라요. 그건 내가 원하는 삶과 전혀 다르단 말입니다. 비슷한 구석도 없다고요."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p.471-472



아무리 윌을 사랑한다고 해도 윌에게 '아니야 네 인생은 충분히 빛난다' 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윌이 느끼는 윌 자신의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자유 죽음을 택하는 윌에게 아무리 클라크라고 해서, 그리고 윌의 가족이라고 해서 '그래도 살아가야지!' 라고 해도 되는걸까? 삶을 사랑했던, 그러니까 무조건 이 편이기만 했던 내가, 내가 삶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윌에게도 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말해도 되는 걸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 책을 읽고난 후 걸으면서 오래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 장 아메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박해를 받으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지만 마지막엔 자유 죽음을 택했다. 우리는 간혹 고통의 시간을 다 견뎌놓고서도 종국엔 자유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고통을 다 견뎠으면서도 자살햇을까?' 라고 의문을 갖고 '그것이 그사람을 지배한걸까?' 라고 자연스레 생각하지 않았었나. 나는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치 치하에서도 견뎌낸 삶은, 그것이야말로 그가 버티어낸 것이며,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유 죽음을 택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인 것을 이제는 알겠다. 너네가 죽인다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야, 니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해도 내가 죽는 것이 아니야, 내 죽음은, 내가 죽고 싶을 때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야말로 자유 죽음, 자신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에 대해서도 생각났다. 읽으면서 내가 몹시 혼란스러웠던 그리고 스트레스 받았던 부분인데, 주인공 '메리앤'은 남자친구에게 섹스 도중에 자기를 때려달라고 말한다. 그것이 옳다 옳지 못하다와 별개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때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 내면의 상처인가,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학대를 당해놓고 굳이 자기가 학대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아파하기만 햇었는데, 그 행위-나를 때려줘!-야말로 자신이 자기 자신의 주인임을 찾아가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다가 들었다. 아빠오 오빠로부터 학대당한 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나에게 어쩔 수 없이 닥쳐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너에게 나를 때려 달라고 말해서 가해지는 이 폭력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지금 맞기를 선택했다, 지금 이 순간 내 육체의 주인은 나이다, 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겠는 거다. 물론, 나는 메리앤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말함으로써 주체적이 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그런 시간도 벗어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떤 고통을 부러 당함으로써 내가 지금 이 시간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 샐리 루니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가슴 아프기만 했는데, 장 아메리는 나로 하여금 샐리 루니의 글을 뒤늦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아, 여러분, 책 읽는 거 진짜 너무 좋지 않나요? ㅠㅠ 나는 너무 좋습니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여전히 삶의 편 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반대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의 고통 혹은 치욕에 '왜 고작 그거 가지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안다면, 결국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나 자신의 주체가 되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은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부터 나를 조금 떼어놓는다. 밤에 잠들기 전에 또 죽음이 나에게 닥쳐올 것이고 내가 없음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서워질라 치면, 이제 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차피 없음이 되면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해, 이제는 '죽음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도 있다' 고 다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 아메리가 재차 중요하다고 말해왔던 것,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 나의 주인은 나라는 것. 그것은 나를 단단히 서게 할 것이며, 죽음이란 두려움이 찾아들 때 나를 다독이게 해주기도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선택하게 될지, 그것은 아직 나에게 먼 일 같고 내 일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 편의 맞은 편에 있는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아마 앞으로도 삶을 사랑할 것이고, 나에게 어떤 치욕이 찾아들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선택이 최종적으로 나의 몫임을 인지한다. 그래, 죽음이야말로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장 아메리는 이 책을 통해 자살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치욕 자신의 고통 그리고 종국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앞에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비난하기를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내 기준이 나만의 것이듯 그의 선택은 그의 것이니까. 


유진목 시인은 이 책의 추천의 글에서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덮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호흡으로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는 사람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는 사람이었다(사실 단숨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만 곱씹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유한함에 대한 불안함을 가진 나에게 이 책은 작은 다독임이 되어주었다. 밑줄을 아주 많이 그었다.



두비토(Dubito‘나는 의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다.). 적당한 때가 오면 반드시 자유죽음과 기독교를 더욱 자세히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여기서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진정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 뛰어내려야 할 상황은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자유죽음, 즉 ‘자살‘은 이런 맥락에서는 결국 죄악이라고 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위대하다. 주님의 자비는 끝을 모르므로 언젠가는 용서해주실 거다. 그래서 ‘신앙인‘은 죽음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 안으리라. 그렇다면 모든 게 좋다. 삶과 죽음을 두고 벌이는 논리적인 혼란이라는 우리의 문제는 고작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다. 아니다, 더욱 나쁘다. 이건은 불행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 혹은 원한다면 시대정신은 신앙과 거리가 멀기만 하다. 그토록 깊은 신앙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 P53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때 슈니츨러는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말하고 생각하게 한다. 위의 문제들을 놓고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지껄여 대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게 만든다. 슈니츨러는 문제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지만, 그게 우리에게 아주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56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사느니,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의 길이 곧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길이 아니다. 그 어디로도 이끌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하던 불쌍한 처녀가 죽었다고 가수의 품 안에 안길 수야 없지 않은가.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그러니까 가정부, 첼란, 클라이스트, 하젠클레버(Walter Hasenclever), 헤밍웨이 등은 그들의 어리석은 죽음으로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치명적인 증거를 내놓았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인생은 ‘최고로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다.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심오한 농담 그 이상이라는 것을! - P63

존재, 곧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하기 아주 힘든 문법적 구문을 가지고 있다. ‘있음‘이라는 말은 그 모순, 즉 ‘있지 않음‘이라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를 모순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있지 않음‘, 곧 ‘없음‘이라는 말뿐인 불가능성을 강제로 이끌고 오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의미한 사람일 뿐,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힌 괴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유죽음을 미친 짓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 P68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망자는 자신의 ‘평안‘을 찾았습니다!"하고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들어야만 가까스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때 죽은 육신, 곧 시체가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완전한 해체로 이끄는 화학 과정이 시작된 시체가 무슨 평안을 느끼겠는가. - P81

학교 교육 덕분에 이제 인간은 죽음이 하나의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들어선 어떤 과정의 종착점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세포들의 자기 재생 능력이 그 사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 P85

죽음이 아무리 자연적이라 한들 내 죽음은 나에게 최고로 반자연적이다. 이성을 마비시키며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게 내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 P87

도대체 왜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돌아가면 왜 안 되는 것인가? - P98

나는 역사와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호감 가는 경우가, 드높은 용기로 성취해낸 정의가, 희망에 매달려서 이뤄졌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자신을 없음으로 던지는 행위, 이게 역사를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 P106

그의 과거가 정말 치욕적이었을까? 그의 느낌 안에서는 분명 그랬으리라. - P112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이 죽음이 자연적인 이유는 내가 일상 언어가 자연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신적으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선택한 죽음은 나에게 있어 자연적이다. - P115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다.)‘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자살이다. - P119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 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 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P119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사회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지 않았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 놓는다. - P120

머리 때리는 것을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굴욕으로 여기는 게 우연은 아니다(아이의 머리를 절대로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P130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죽음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의사가 자랑스러워한 구조 활동이라는 게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 P150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P175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어떤 때 죽으며 무엇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앞장서서 규정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위의 명령은 주제넘은 월권일 뿐이다. 그래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죽음과 관련해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의 요구와 똑같은 특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회든 종교든 인간에게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결정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와 종교는 인간에게 결정의 자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칸트도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의무라는 것을 범주적으로 생각해본 끝에 조그만 시골 교회 목사나 위대한 신학자들처럼 자유죽음을 비난했다. 말인즉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말고, 신이 부여한 의무 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에 순종하라고 칸트는 타일렀다. 의무? 종교가 인간에게 간섭하며 요구하는 의무라는 것은 사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 P175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다.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을 뒤집어씌우지 않고 생각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생물학적인 숙명이라는 것과 따로 떼어볼 때, 인간은 본질을 드러낸다.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 P181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든 학문에서든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경쟁하는 적수가 자살자다. 그는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안다. - P198

자살자는 고집 센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하는 말을 하며, ‘아멘‘ 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지극한 존엄함에게,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풍문으로 자살자를 심판하는 세상에게! 평온한 바다와도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사면의 벽들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서로 배척할 뿐이다. 다만, 있지도 않은 저 하늘나라에 가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 P214


댓글(24) 먼댓글(1)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from 마지막 키스 2022-08-22 08:30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공쟝쟝 2022-08-21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셰크. 피가되고 뼈가되는 아니 피가있고 뼈가 있고 살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삶의 의지로 충만한 리뷰네요 ㅋㅋㅋ 이미, (또), 알고 있는 사람 다락방 ㅋㅋㅋㅋ 저는 다락방님이 글에서 어려운 말 안쓰면서 반복해서 곱씹으면서 주문 거는 거 좋아요 ㅋㅋㅋ
죽음에 대해 때때로 심각해지는 게 저잣거리나.. 고준담론은 정말 아닌데요… 너무 중요한 이야긴데… 사실 생각하길 미루죠. 좋은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삶의 편입니다. 만약에 태어나는 거 물어보면 안태어날꺼지만요 ㅋ

다락방 2022-08-22 09:12   좋아요 2 | URL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그보다 죽기 싫은게 더 크지만요. 죽기 싫다, 그러나 죽어야 한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까요? 그걸 알 수 있다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말예요.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ㅋㅋㅋㅋㅋ

죽음에 대한 책은 가끔 읽게 되더라고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더 그런것 같아요. 알고 싶고 어쨌든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아는 쪽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쉽게 쓰는건, 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어려운 거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소통에의 욕망 같은 것이 아닐까. 하다가 아니면 .. 어려운 말은 내가 몰라서? 뭐, 그렇습니다.

단발머리 2022-08-21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의 의지가, 활력과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리뷰네요. 자살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락방님 리뷰 읽고 나니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인거 같고요. <미 비포 유>의 ‘윌‘을 언급해주셔서 샘 클라플린 떠올리면서 읽으니 훨씬 더 좋았어요.
저도 죽음으로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거기에서 말하는 ‘나‘란 내가 가진 의식을 말할텐데, 사실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제가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잘 읽고 갑니다. 저는 물어보면 다시 또 태어나고 싶어요 ㅎㅎㅎ

공쟝쟝 2022-08-21 19:42   좋아요 1 | URL
단발님은 바보얏🤣🤣🤣

단발머리 2022-08-21 19:44   좋아요 1 | URL
싸우자! 😡😡😡

다락방 2022-08-22 09:15   좋아요 1 | URL
저자는 자살과 자유죽음을 구분하는 쪽이에요. 저자가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건 자유죽음이고요. 저는 죽음에 대한 책을 가끔 읽어줘야 겠더라고요. 저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인지 모르니까 자꾸 두려워하잖아요. 알면 알수록 두려움의 크기는 줄어들겠지, 하고 읽는 쪽인데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든다기 보다는 나를 다독이는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나게 되는것 같아요. 어쨌든 이것도 좋습니다. 저는 그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긴 책이겠거니 했는데 뜻밖에 철학책이며 자신의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책이어서 좋았어요. 아, 그래서 말인데요 단발머리 님, 다음 원서에 대해 제안을 제가 단톡방에 하겠습니다. ㅎㅎ

mini74 2022-08-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도 두렵지만 죽은 후 남게 되는 사랑하는 이들이 슬플까도 두려운데 그건 제 몫의 걱정이 아니겠죠 ㅎㅎ 다락방님이 삶을 사랑하는 이유들이 참 좋네요.

다락방 2022-08-22 09: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니 님.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결정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무조건 살라고 하는 이유는 사실 죽음을 결정한 자 보다 주변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아요. 남은 자들의 슬픔이 너무 클까봐서요. 제가 리뷰에도 썼지만 [미 비포 유]에서 윌이 죽음을 결심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말리려고 하지만 그걸 말리는 것, 죽음을 미루거나 중단시키는 것은 누구를 위한것인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좋은 독서였어요.

그레이스 2022-08-21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어요
덕분에 내용을 조금 알고 가네요
미 비포 유 읽고도 생각이 많았어요

다락방 2022-08-22 09:41   좋아요 1 | URL
네, 미 비포 유는 뜻밖에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주져는 책이었어요. 로맨스인줄 알고 읽었다가 정말 생각이 많아졌고 그리고 이렇게 지금도 계속 생각나네요. 저는 윌이 죽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건 윌이 아닌 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책 덕분에 미 비포 유를 또 생각하게 됐어요.

바람돌이 2022-08-2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의 한분이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김학철선생님이거든요. 그 분이 85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 마지막 20일간을 곡기를 끊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준비하고 흐트러짐없이 죽음을 맞았다고 들었어요. 죽음조차도 그분답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자유죽음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네요.
저 역시 삶을 너무 너무 사랑하지만 죽음은 어쨌든 인간으로서의 나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항상 해요.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다는 것은 삶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다락방님 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좋네요. ^^

다락방 2022-08-22 09:4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 님께서 언급하신 김학철선생님 이야말로 자유죽음을 선택하신 걸로 보여지네요.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준비한다는 태도랄까요. 내가 내 삶을 살았으니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내가 하겠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인것 같아요.

죽음이 두려워서 저는 자꾸 죽음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고 싶어서요.

책읽는나무 2022-08-21 2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가 없음‘의 무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면 어릴 때만큼의 공포감은 좀 덜해졌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들을 하면 그냥 서글퍼지게 되는 것 같아요.
경험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없어진다는 건 나의 고통은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좀 속 시원해질 것 같은데, 남겨진 나의 가족들과 나를 가깝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이 눈에 밟혀 그게 서글프고 짠하게 느껴져...없어지고 싶지 않다는 미련이 남네요.
자유 죽음 제목이 참 의미심장 합니다.
저는 미련 때문에 아마도 죽음을 선택하게 되진 않을 것 같긴한데 말입니다.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 또 다른 관점은 될 듯 하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리뷰도 넘 좋네요.
무거울 수 있는 주제도 다락방님만의 간결한 사유들이 전해져 오네요. 잘 읽고 갑니다^^

다락방 2022-08-22 09:46   좋아요 3 | URL
맞아요 책나무 님! 내가 ‘없음‘의 상태가 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나는 두려움도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느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의 두려움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다가도 금세 철학적이 되어서, ‘그렇다면 없음이 될건데 나는 지금 왜 있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우리는 결국 ‘없음‘이 될건데 지금 왜 있는걸까요, 책나무 님? 제가 [자유죽음]을 읽으면서 이거 철학책이로구나, 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적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현재 상태로는 제가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삶을 최대한 붙잡으려고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책을 읽는 건 너무 좋아요!! >.<

잠자냥 2022-08-22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생에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다부장님은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음료를 주문해서 마시고,
다음 생은 당연히 그 무엇으로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잠자냥은 이 책을 나른하게 누워서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결론은 뜨거운 책이었습니다-

다락방 2022-08-22 13:51   좋아요 4 | URL
네 이 책은 저에게 좋은 책이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입니다. 읽기를 잘한 책이에요. 특히 나는 나 자신에 속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반복해주는게 좋았어요!!

잠자냥 2022-08-22 14:12   좋아요 3 | URL
기대 이상으로 울림이 큰 책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사회나 종교가 한 개인을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가의 그 ‘포효!‘가 인상 깊었습니다. 작가의 삶도 그 자체로 이 세상에 지지않겠다던 으르렁거림 같았고요...

다락방 2022-08-22 14:16   좋아요 4 | URL
네 잠자냥 님, 저도 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게 진짜 좋더라고요. 사회나 종교나 한 개인을 억압하는 건 같다고 하면서 재차 주장하잖아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고요. 그래서 이 작가나 이 책이 비난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잠자냥 2022-09-07 16: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장님! 이 <자유죽음>으로 3만원 벌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9-07 17:22   좋아요 3 | URL
네. 봤습니다. 알라딘도 제가 불쌍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ini74 2022-09-08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08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드려요
다락방님!

책읽는나무 2022-09-10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