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지만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바이닝거는 유대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다. 가정부는 가수의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는 무명의 인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수의 눈에 가정부는 이름 없는, 가난한 처녀일 뿐이었다. 그래서 탈출구는 죽음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혐오스러운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길은 죽음이었다. 가정부도 마찬가지다. 가수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사느니,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의 길이 곧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길이 아니다. 그 어디로도 이끌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하던 불쌍한 처녀가 죽었다고 가수의 품 안에 안길 수야 없지 않은가.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희미하긴 한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는 화자가 어린 아이다. 늘 같은 시간에 공원을 걷는 좀머씨를 이야기하는 어린 화자. 이 화자는 피아노학원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데, 어느날 선생님이 코를 판 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바람에 코딱지가 피아노에 묻어있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다음에 쳐야할 건반이 바로 그 건반이 아닌가. 저 건반을 누르기 싫다, 그렇다면 코딱지가 손에 묻게 된다. 그 건반을 치길 망설이노라니 선생님은 자꾸만 윽박지른다. 얼른 치라고, 치라고! 하는수없이 이 소년은 그 건반을 치고 학원이 끝나는 길에 너무 치욕스러워 죽고자 나무를 타고 오른다. 죽자, 죽어야 된다, 선생님의 코딱지라니, 수치스럽다, 치욕스럽다, 죽어야 한다! 아마 그 올랐던 나무 위에서 또다시 걷는 좀머씨를 소년은 봤던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소년은 죽으러 올라갔으나 죽지 않고 살아 내려온다. 내가 왜 코딱지 때문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 왜 코딱지 때문에 죽어야 해?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코딱지 때문에 죽고자 했다면 그 코딱지는 내가 생각하는 코딱지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코딱지에 대한 치욕과 수치의 정도가 달랐던 것일테다. 야 코딱지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말도 안돼, 살아! 그러나 그 사람은 코딱지를 건드린 자기 자신을 도저히 이 세상에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다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장 아메리의 책 《자유죽음》에서 가져온 인용문 61페이지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유대인인데 유대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의 관심이 없는 삶이라면 내게 그 삶은 의미가 없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내가 뜯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이며 정체성이니까. 가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삶을 가치없다고 말하는 것은 가정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인데, 그러나 가정부에게 그것은 너무나 크다. 자신의 삶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장 아메리의 책에 이런 사례는 실제 인물과 소설속 인물들을 포함하여 몇 가지 더 나오는데, 시험 성적이 안좋아서 죽기를 결정하는 소년이 나오고, 소위라는 명예를 잃게 되는게 너무 치욕스러워 죽기를 결심하는 인물이 나온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사실은 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살다 보면 그 일은 그렇게 큰 게 아니고 다른 더 큰 기쁨이 찾아올 수도 있고 미래는 예측불허 이므로 살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구나 깨달을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런데 그들에게도 정말 그럴까? 이미 내 앞에 닥친 이 어떤 것이 나에게 너무 큰데, 이것은 내 삶을 더이상 유지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견뎌내야 할까? 이런 내가 이런 삶이 싫어서 나는 없음을 택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존중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죽음 일 것이었다.



나는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유죽음의 의미를 알겠고, 그것이 자신을 살해하는 자살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자신의 치욕 자신의 수치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지기 때문에 없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알겠다. 리뷰에 썼던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것이 많은데, 그건 '나 자신을 학대로 밀어넣음으로써 나 자신의 주체를 확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였다. 샐리 루니의 소설 《노멀 피플》에서 메리앤이 자신을 때려달라고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말했던 일이 그렇다. 아빠와 오빠가 어린시절부터 나에게 가했던 폭력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 맞닥뜨린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랑 섹스하는 남자에게 '나를 때려줘'라고 말하는 일은 내가 시킨, 내가 정한,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때리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일로 만들어서 내가 나의 주인임을 자각하고자 하는 일을, 그전보다 나는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 이런 일들을 듣거나 읽거나 보게 되는 것은 그저 고통이기만 했다면 이제는 거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너의 존재에 주체성을 부여하는구나, 라는 인식이 스며들게 된것이다. 


강간판타지 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아주 오래 그리고 늘 생각해왔다. 강간당했던 그 폭력의 시간은 고통이었고 통제할 수 없는 갑자기 일어난 사고였다면, 그러나 내가 지금 섹스하면서 강간을 당하는 설정을 만든다는 것은 그 통제할 수 없었던 시간을 벗어나 자신의 통제 안에 그것을 두려 함이겠구나, 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 속에서 견디어 냈으면서도 종국엔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도 나치의 학살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지만, 그러나 내 생명을 끝내는 것을 나는 내가 통제하겠다, 는것. 그 지점에 대해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그러나,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 아메리의 책을 읽고 이 지점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책을 읽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것을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러나 메리앤이 선택한 것, 강간 피해자들과 전쟁의 피해자들, 역사적으로 학대의 생존자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유죽음' 보다는 자살에 가까운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그 일이 없없다면,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거다. 메리앤에게 아빠와 오빠의 폭력이 없었다면, 메리앤이 굳이 주체성을 가져오기 위해 섹스중인 남자에게 '나를 때려줘'라고 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성폭력 생존자에게 성폭력이 없었다면, 굳이 섹스중인 상대에게 '나는 강간판타지가 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전쟁이나 민족학살이 없었다면, 그들이 내 죽음을 내가 선택한다고 죽음에 이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결국 내 죽음을 선택했으므로 이것은 자유죽음인가? 하면 나는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그들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중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의 죽음 자체에 대해 존중을 보낼 수 있을 지언정, 그러나 그것이 자유죽음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데에는 순전히 자기가 결정했던 일들만이 채워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좀머씨의 소년과 그리고 가수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정부와 완전히 다른 맥락이다. 코딱지를 눌렀던 나, 가수를 좋아하는 나, 시험을 망친 나,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음 같은 것들은 설사 본인에게 엄청난 치욕이었을지언정 그것이 누가 나에게 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아 코딱지는 좀 다르겠다) 그러나, 폭력은, 강간은, 학대와 학살은 다르다. 그것은 누군가 나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힌 것이고 그것은 내 통제 밖의 일이었으며, 그것이 '나의' 치욕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피해자가, 생존자가 그것을 치욕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아빠가 나를 때린게 치욕스러워, 강간범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게 치욕스러워, 나는 이 삶을 끝내고 싶다, 는 그것이 내가 결정해야 하는 나의 수치가 아니라는 거다. 그 수치는 그들의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한 폭행자의 것이 되어야 하고 강간을 한 강간범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학대와 학살을 일삼은 가해자들이야 말로 수치와 치욕을 느껴야 했는데, 그런데 피해자와 생존자가 그것을 느끼고 이런 삶을 버틸 수 없다, 고 죽어버리는 것은 그것은 자신을 살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든 약을 먹었든, 그것을 '행한' 것은 나일지언정, 나를 그렇게 행하게 만든 것은 '나의 수치'가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행하게 만든 것은 '가해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그것이 자유죽음이 아니라 자살, 자신을 죽인것이 되지 않나. 그러나 여기에서의 자신을 죽인것이, 정말 '나 자신'인가? 이것은 자살인가? 그래서 나는 자살과 자유죽음은 그 사이에 아주 먼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자살은 자유죽음이 아니고 자유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다시, 올리브》에는 공부를 잘하고 인기도 많았던 여학생이 대학에 들어가서 자살하게 된 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알고보니 어린 시절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었다는 것. 결국 집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에게 죽음을 내린다. 이것은 자유죽음일까? 한 여성의 삶이 중간에 끝나버려 없음이 되는 것,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죽음을 그녀에게 행한 것이 그 자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유죽음인가? 장 아메리도 자유죽음을 자살과 구분한다. 처음부터 그걸 다르다고 언급하고 시작한다. 자유죽음은 자살과 구분해야 할 것이라고 나 역시 동의한다. 이것은 이렇게나 다르니까.



But he remembered where he was-right outside the main gorcery store here in town-when he found out that she had vinished Vassar and then killed herself. It was Trish Bibber who told him, a girl they had been in school with, and when Denny said, "Why?, " Trish had looked at the ground and then she said, "Denny, you guys were friendly, so I don't know if you knew. But there was sexual abuse in her house."

"What do you mean?" Dinny asked, and he asked because his mind was having trouble understanding this.

"Her father," said Trish. And she stood with him for a few momints while he took this in. She looked at tim kindly and said, "I'm sorry, Denny." He always remembered that too: Tisht's look of kindness as she told him this.

So that was the story of Dorie Paige. -p.144-145



하지만 그녀가 바사를 졸업하고 자기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했다-타운의 큰 식료품점 바로 앞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트리시 비버였다. 데니가 "왜 그랬대?" 하고 물었을 때 트리시는 땅을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데니, 너희 둘이 친하게 지내서 혹 알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집에서 성적 학대가 있었대."

"무슨 뜻이야?" 데니가 물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랬대." 트리시가 말했다. 그리고 데니가 그 말을 이해하는 동안, 잠시 그와 함께 서 있었다. 트리시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참 안됐어, 데니." 그는 그것 역시 늘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할때 트리시가 보여준 다정한 얼굴.

도리 페이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책 속에서



















아침부터 이 긴 글을 꼭 써야했다. 혹여라도 수많은 어떤 여성들과 남성들의 자살이 자유죽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까봐, 그렇게 가해자들이 빠져나갈까봐. 너네 죽음을 너네가 선택한 거잖아, 라고 제삼자가 말하게 될까봐. 그렇게 그 사이에 있던 폭력과 학대를 못본 척 할까봐.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생각이 내게 내내 있었다. 어떤 '살아야 해!'는 그것이 단지 내 기준에서의 삶이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어떤 '살아야 해!'는 그 수치가 네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당신의 것이라 생각해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일을, 당신은 하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하고 싶다.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Mauritshuis 를 갔을 때 본 사진이 생각나 가져온다. Morad Bouchakour 의 작품 <Traces (part2)> 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2-08-22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복 강박(혹은 강복적 반박) : 프로이트가 발견, 확립시킨 개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괴롭고 고통스런 과거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을 가리킨다. 이런 충동을 지닌 개인은 자신이 그와 같은 사건이나 경험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사건들을 개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불운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유사한 삶의 비극들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운명 신경증 환자 또는 반복 강박 환자로 불린다.(출처는 나무위키 ㅋㅋ)
/
이것만 딱 이렇게 달아놓으면 되게 멋있어... 보일 것 같은데
사족 붙이자면, 인간이 겪는 고난과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라벨링하고 유형화하는 제 습관 말예요, 이건 mbti가 아닌 것 같아요. 다락방님은 긴 글이 필요하고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하셨는 데, 저는 개념이 필요했거든요. 제가 겪은 것들을 빨리 상대화 시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 버튼 누르면 나오는 기계처럼요. 이런 상처에는 이런 방어기제, 이런 종류의 경험에는 이런 반응. 그래야 나 자신이 설명되고 설명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지금은 아녜요. 이게 확 잡히지는 않는데, (채집하고 싶다 ㅋㅋㅋ)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더 사유해볼게요. 지금은 플래그만 붙여두고 ^^

다락방 2022-08-22 13:58   좋아요 3 | URL
출처가 나무위키라니 ㅋㅋㅋ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긴 하지만, 신뢰와 별개로 반복 강박과 제가 언급한 지점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음 반복 강박 이라는 프로이트가 발견, 확립한 개념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인듯 하고요, 저는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원인을 생각하고 쓴 것 같아요. 결국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느냐로 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반복 강박 이라 부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음, 말씀하신 것처럼 분류하고 유형화 하는 것으로는 닿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이 분명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에 또다시 이름 붙이고 세분화하게 되겠지만요. ‘반복 강박 환자‘라는 네이밍은 설사 그것이 강박이라 할지라도 좀 가혹하게 느껴지네요. 이 부분은 제가 전혀 모르는 지점이라서 계속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납득하게 하는 구절들을 만나게 되겠죠. 역시 계속 읽는게 답인 것 같아요.

공쟝쟝 2022-08-22 18:27   좋아요 1 | URL
네, 계속 읽으실 다락방님!
자해/자살이라는 자신을 해치는 행위를 통해서 (박탈당한 자신의 통제권) 자유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 그렇다고 한들 최초 고통 유발자(?)들에게 고통이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를 질문하는,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거칠게 줄여 죄송합니다)이 글에서 제가 ‘반복 강박‘이라는 간단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떠올렸던 건. 중간에 노멀피플 등으로 인용해 놓으신 자해같은 섹스 혹은 강간 판타지 때문예요.

그들은 계속 자신을 상처 주는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그걸 반복하고 있다거나 오히려 그런 경험을 유발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요. (나쁜 남자만 찾아서 만나는 것 같은 여자들이 떠오르네용)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자신의 불운과 박복함을 탓하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그걸 반복하고 있는 행위의 이면 뒤에 무의식적인 오랜 상처가 있다는 걸 의식화 하면 반복하지 않겠죠? (말이 쉽죠. 너무 어렵습니다.) 악몽처럼 그 고통을 반복하는 일 보다 (어쩌면 고통의 원인일)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기가 더 어렵다는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 존재의 생겨먹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상황을 계속 반복해서라도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애처로운 ㅜㅜ 개인의 삶에 대한 노력일 수도 있고요.

저는 ‘강박 ‘환자‘‘라고도 ‘우울‘증‘‘ 이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병리적으로 다루고 싶지가 않아요... 이런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들을요) 환자가 아니고... 증이 아니고........ 그냥 우린 그렇게 생겨 먹은 거(?) 같거든요. 시간을 다시 돌려서라도, 상황을 다시 똑같이 만들어서라도.... 그 때의 나를 구원하고 싶은 건 너무 당연한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상처에서 빠져나와 더 좋은(그게 무언지 모르겠지만.. 그런게 있다면) 삶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건 병리적인 현상으로 다뤄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되기도하고요. 근데 그건 개인적인 차원이고, 또..... 애시당초 그런 구조가 안만들어지게끔 해야하는 것도 우리가 물어야 할 거 같고요.

마지막에 햇빛을 피하는 다락방 속 여자 그림을 첨부하셨잖아요. 빛을 몰라서가 아니라, 빛이 싫어서가 아니라 빛보다 중요한 어둠을 해결해야만 하는 아주아주 깊은 나도 모르는 내 소망이 있는 거죠. 그런데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 억압된 욕망들을 ‘의식화‘해서 ‘포기‘하라고해요. 그 상황으로 똑같이 돌아간다해도 애초의 상처가 만들어진 상황과 절대 똑같을 수가 없으니, ‘포기‘하라고요. ... 포기.... 포기가 안되는 거죠.

길고 긴 글의 말미에. 그 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한다! 그 수치는 네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씀은 아주 강한 정신이고, 똑바른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너무 원론적예요. 가운데의 무언가가 더 필요해요. 다락방님 말씀대로 우리는 긴 글이 필요해요. 왜냐면 상처는 유형화 될 수 있을지라도 고유하니까.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방식 역시, 고유한 거고요. 전 또 여기서 에바일루즈 생각나는 데요. 현대의 심리학이 그렇게 상처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그 상처로부터의 ‘회복-치유‘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해결을 못하느냐고 묻는 거예여. (제가 장아메리 글 읽지 않아서 다락방님이 책에서 받은 인상과는 너무 다른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같네요.)

수치와 치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할거예요. 저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요.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도 좋아요. 그게 건강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역시 충분하지가 않아요.

저는 어쨌든 사람을, 삶을, 죽음을 계속해서 더 사색하게 하고 저를 또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페이퍼가 좋아요. 저는 이 페이퍼를 보면서... ‘반복 강박‘이라는 인간의(나자신의) 생겨먹음이 떠올랐어요. 왜냐면 전 메리앤을 길고 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이...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미미 2022-08-22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에게 이런 긴 글을 쓰게 만든책 장바구니에 쏙 담아갑니다. 올려주신 작품은 다락방같아 보여요. 구석에서 울고 있지만 공간이 그녀/그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느낌 ^^*

다락방 2022-08-22 13:59   좋아요 2 | URL
저 그림을 보는데 되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저 들어오는 빛은 희망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거기에 닿지 않으려고 숨으려고만 하는 인간이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우울한 그림 같은거 안좋아하는데 저건 너무 인상깊었어요. 저 그림의 어느 지점에 끌린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mini74 2022-08-22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해자의 몫이어야 할 수치.ㅠㅠㅠ 남성에 비해 여성들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는 글을 봤어요. 속에 담아두고 자신의 탓도 있다 자책하다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파괴한다고..치욕은 당신의 것이 아니란 말, 올려주신 작품, 미미님 말씀처럼 위로가 되어주는 느낌입니다.

다락방 2022-08-22 14:19   좋아요 2 | URL
어떤 죽음이 잘못된 대상을 찾아 들어온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것이 자살이란 형태로 일어나고요.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요. 죽긴 왜 죽어, 악착같이 살아야지! 하는건, 주변인들의 말인 것 같아요. 당사자는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는데, 더 이어나갈 힘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너무 선을 넘어버리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그들을 그렇게 죽게두는 것은 답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순수한 선택은 아니니까요. 분명 그전에 어떤 가해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일들을 우리는 살면서 어떻게 극복하고 또 해결해나가야 할까요. 에휴..

단발머리 2022-08-22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유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다락방님이 이 글에서 의문을 제시하는 지점, ‘자살과 ‘자유죽음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저는 장 아메리가 수용소 생환자라는 지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도 겹쳐져 보이구요. 세상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그 사람의 삶 속에 있었다고, 전 그렇게 봐요.
책을 읽고 댓글 달러 다시 오겠습니다. 무거운 책이라 쉽사리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 속에.....

다락방 2022-08-22 15:08   좋아요 2 | URL
저는 삶이란 무엇인가 묻고 또 죽음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 자체가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에게 철학책이었고 그래서 읽기에 좋았어요. 의문을 던지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게 좋더라고요. 덩달아 저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제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서도 또 생각하고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도 계속 곱씹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올라온 다른 리뷰들을 보노라니 다른 분들의 리뷰에서는 자살과 자유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같아서 내가 잘못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마도 속히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장 아메리가 ‘자살‘이란 단어를 굳이 밀어두고 ‘자유죽음‘을 택한 이유가 있다고 보거든요.

단발머리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유대인 생존자였던 장 아메리가 이 책의 저자라는 거, 그런 그가 자유죽음에 대해 썼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아무 정보도 없이 책을 펼쳤다가 저는 작가 소개를 읽고 놀랐거든요. 저는 음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해서 ‘무겁다‘ 보다는 ‘철학적이다‘ 가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단발머리님께 꼭 읽어보시라 말할 수는 없는 책이지만, 혹여 읽게 되신다면 단발머리 님은 어떤 글을 쓰실까 궁금합니다.

독서괭 2022-08-22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야기를 잠자냥님에 이어 다락방님 것까지 연달아 읽으니 더 흥미롭네요. 자유죽음과 범죄 등 트라우마가 쌓여 생긴 ‘자유롭지 못한‘ 죽음을 구별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그걸 면죄부 삼으면 안 되지요, 암요. 나쁜 놈들은 자기한테 유리한 건 잘도 끌어다가 아전인수 하는 데 선수니까요.
그런데 밑에 리뷰도 엄청 길게 쓰셨군요? ㅎㅎㅎ 이따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분이 동시에 이 책을 읽으셨어요? (놀람)

공쟝쟝 2022-08-22 18:44   좋아요 2 | URL
리뷰대회 (속닥속닥)

잠자냥 2022-08-22 22: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그럼요 그럼요 물질주의자에 사대주의자인 저희에겐 외국책 리뷰 대회가 딱입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8-23 07:02   좋아요 0 | URL
앗 그런거군요 ㅎㅎㅎ 리뷰대회 저는 능력부족을 실감하고 관심을 접어서요^^;;

다락방 2022-08-23 08:59   좋아요 2 | URL
이게 그러니까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저는 지난주 어느 늦은 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대한 리뷰를 읽게 됩니다. 응? 이거 바로 얼마전에 *** 님도 리뷰 쓰셨는데, **** 도?..... 혹시? 하고 보니 리뷰대회가 있었던거죠. 마침 마감이 다음날이고 나는 책이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리뷰를 썼는데, 리뷰가 너무 똥망인거에요... 하아- 저는 후회합니다. 나는 틀렸어, 글러먹었어, 후회한다... 라고 했더니 친구가 <자유죽음> 도 리뷰대회가 있다고 알려주는데, 월요일 마감이고 그 소식을 금요일에 들은 저는 음................ 하다가 토요일에 부랴부랴 책을 사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읽다가 술을 마시고 다음날 또 읽고 그렇게 리뷰를 쓴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마감인 어제 우르르르르르르르르 리뷰들이 몰려오더니 저는 또 침울해집니다. 쓰지말걸....


리뷰 대회 능력부족으로 관심을 접은지 오래이고 그래서 다 모르고 있다가 괜히 마감전날 들어가지고 이런 일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눈물 좀 닦고 올게요.

독서괭 2022-08-23 09:12   좋아요 0 | URL
아니, 이삼일만에 책을 읽고 써내신 리뷰라는 거죠? 능력자 인증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