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에 갔을 때 친구와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렀다. 우리는 항상 여행지에 가면 첫날 밤에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이 여행을 즐기자고 건배를 하곤 했다. 그 날도 그랬는데, 마침 우리 옆에는 한국인 젊은 남녀커플이 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온 것 같아 거의 다 먹어갔고, 테이블이 바싹 붙어있는 탓에, 그들이 와인을 잔으로 주문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커플은 아주 젊어 보였는데, 그러니까 20대로 보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명절에 해외로 둘이 여행을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20대 때에는 외국에 가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29살에 뉴욕에 가긴 했지만),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올 수 있었을까. 동남아라는 여행지의 특성상 비행기값도, 호텔비도, 물가도 저렴하니 마음먹으면 오지 못할 이유야 없지만, 정말 나 때랑은 많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동남아로 여행갔을 때는 유독 젊은 커플이 많이 보였다.



친구와 신나서 와인을 시키고 스테이크를 주문해 먹었다. 리조또와 사이드도 주문해 먹었고.





그런데 자꾸 옆 테이블이 신경쓰였다.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젊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낯선 나라에 여행왔다는 게. 낯선 곳에 와 낯선 사람들 틈에서 낯선 언어로 음식을 주문하고, 그리고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 보내는 것. 그것은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저 나이때는 해보지 못했던 것. 그러고보면 나는 한 번도 연애중인 남자와 함께 이국을 여행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해보지 못한 걸 저렇게 젊은 나이에 해보는 그들이 마냥 부러웠다. 저들은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까.


















김금희의 짧은 소설을 읽고 있다. 부모와의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 연인들의 이야기등, 많은 짧은 이야기들에 많은 사람들의 많은 사연이 담겨있는데, 그러다보니 여행에 대한 것도 많다. 친구들끼리 여행 간것도 있지만 연인들이 간 것도 있어.



한동안 상조와 윤경은 원피스에 대한 기억을 맞춰보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하나의 기억이 더해지면 그것을 상쇄하는 전혀 다른 기억이 등장하는, 극성이 다른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밀어내는 듯한 시간이었다. 원피스가 상조의 집에 있다고 확신하는 지점부터 상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윤경은 둘이 교토 여행을 갔을 때 그 원피스를 입었고 료칸에 두고 오는 바람에 상조네 집 주소로 돌려받았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상조는 여행에서 윤경이 그런 원피스를 입었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윤경은 이성적으로라면 꼼꼼히 삭제해야 했지만 불행히도 아이폰의 아이클라우드에 저절로 저장되어버린 사진들을 뒤적여 그들이 은각사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보내주어야 했다. 사진에서 둘은 웃고 있었다. (원피스를 돌려줘, p.19)




이성적이라는 건 뭘까. 어쩌면 상조는 여행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처럼, 사진 조차 말끔히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관련된 물건도 다 버렸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윤경은 아이클라우드를 뒤지면 그들이 함께한 여행에 관련된 사진을 찾아낼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아이클라우드를 부러 뒤지는 게 아니어도, 그저 그 자리에 늘 그랬던 것처럼 있다. 나는 아예 삭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라면? 그렇다면 꼼꼼히 지워야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가 왜 사진을 지워야하는지 모르겠다. 내 지갑속에도 여전히 사진은 고이 간직되어 있다.



윤이 파리 살롱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인 사장이 파리에서 직접 사용했던 온갖 낡은 물건들과 대대손손 찍은 흑백의 가족사진들과 책들과 프랑스풍 자수로 된 테이블보가 덮여 있는 이곳이 윤과 경이 떠났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8개월 남짓된 무렵이었고 그들의 감정은 반짝였다. 마치 밤이면 더욱 빛나는 에펠탑처럼. (파리 살롱, p.64-66)




윤은 경과 다퉜다. 다투고 나서 처음 만나는 걸 파리 살롱으로 정했다. 그들의 반짝이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경을 불러냈다. 그러나 경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함께한 여행인데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억되고 간직될 수 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워버려야 할 무엇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지갑에 고이 사진을 간직하고, 핸드폰에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자 하는 상대는 다른 연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것들을 삭제하고, 지워내고, 잊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그건 그가 그 자신에게 하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나의 기억과 나의 핸드폰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윤이 경과 파리를 갔다니, 연애를 시작한 지 8개월차에 갔다니, 나는 그것도 너무 신기했다. 파리라면, 동남아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곳인데,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 여행을 어떤 기억으로 남겼을까. 어떤 추억을 쌓았을까.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일본에 간 상조와 윤경은 어떻고. 윤경이 즐겨 입던 원피스를 입고 함께 여행했던 일본은,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상조와 윤경은 헤어진 지 일년째인데, 그 사이에 그들 사이에는 또 다른 어떤 이야기들이 쓰여졌을까. 윤경이 클라우드를 뒤져서 사진을 찾아냈다는 것은, 사실 그 사이에는 굳이 그 사진을 볼 일이 없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상조는, 기억에도 없는 만큼 부러 사진들을 지워냇을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할 경우, 전여자친구와의 여행사진을 핸드폰에 남겨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으니까. 그랬을테니까.



어쩌면 지금은 이렇게나 많은 젊은 커플들이 함께 외국으로 여행가기도 하는 모양이구나, 새삼 생각했다. 나는 여태 살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보고 싶었으나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의 젊음과,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이 부러웠다. 여행을 가서 반드시 즐거우리란 보장은 없지만, 함께 여행지를 고르고 예약을 하고,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함께 낯선 곳에 도착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걷는 일은 분명 특별한 일이니까. 그 시간들은 그대로 그 당시에 차곡차곡 쌓였을 테니까.


그 여행은 그러나 각자에게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들은 다툴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여행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어, 라고 생각될 수도 있고, 우리는 여행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아, 했을 수도 있다. 아, 그 사람하고 함께한 여행은 정말 달콤했는데, 라는 추억을 불러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그들은 각자 다른 상대와 또다른 곳을 여행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같은 곳을 아예 다른 상대와 가게 될 수도 있고.



다낭에 가서 옆 테이블의 커플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외국으로 여행간 커플들을 보고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로망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실현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추억이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복잡한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항상 비행기를 같이 타보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앞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그조차도 잘 모르겠다.


그와 이국에서 만난 일은 있다. 내가 낯선 나라로 가고 그 역시 낯선 나라로 나를 만나기 위해 왔던 일. 우리는 각자 비행기를 예약하고 각자가 살고 있는 땅에서, 만나기 위해 서로의 나라로부터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만났다. 나보다 조금 더 공항에 일찍 도착한 그는, 내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낯선 나라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지 않고 환승 게이트로 가 헤매이는 동안, 입국 수속을 받기 위해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나갔을 때 그는 거기에 있었고, 그렇게 만나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었다. 내가, 이국에서, 그를 만난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공항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장을 보았다. 아마 우리가 지금 호텔로 들어가면 서로의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피곤해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을테니, 장을 좀 봐가지고 들어가자. 우리는 과일을 샀고 안주를 샀다. 각자가 서로를 위해 가지고 온 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 룸서비스를 시켜두고 각자가 가져온 술을 꺼냈다. 나는 꽃다발도 준비해둔 터다. 한국에서부터 그 나라까지, 나는 꽃을 가지고 갔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술을 마셨고, 스테이크를 먹었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음악을 들었다. 내가 산책을 하는 동안 그는 수영을 했다. 함께 샤브샤브를 먹고 쇼핑을 했고 방향을 잃었을 땐 멈추어서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방향을 찾기도 했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서는 나란히 엎드려 마사지 해주는 직원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를 마사지해주던 여자분은 한국의 이민호를 사랑한다 말했다. 여기선 누구나 이민호를 사랑해요,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다가 말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는 놀랐다는 듯, 왜 그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가 대답했다.



"She loves me."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민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해서, 나와, 그와, 그 곳에 있던 두 명의 마사지해주시던 분들이 함께 깔깔대고 웃었더랬다. 나는 그의 그런 점들을 좋아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내 사랑을 믿던 일. 그것에 자신을 가지던 일.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으나, 그는 나 이전에 그곳에 다른 여자와 '함께' 그곳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한 동안 그 시간은 또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각자의 풍경으로 적혔을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 역시 그렇지만, 어쩌면 그는 틈틈이 지난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묻지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어쩌면 지난 시간과 나와 함께 있던 시간을 나름대로 혼자 비교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혼자 산책하러 호텔 바깥으로 나갔을 때, 그곳의 온도와 습도와 공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껏 좋아했더랬다. 나는, 이곳이 좋아. 나는 동남아를 좋아한다! 그렇게 혼자 걸으면서 사진을 찍어 동생들과 엄마에게 보냈을 때, 엄마랑 동생 모두가 얘기했다.


"너 행복해 보여."



나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내가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는 잊고 싶어할 수 있다.

상조는 기억에도 없는 원피스를 윤경은 기어코 찾아내 들이밀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한 여행은 서로에게 각자 다른 식으로 적힐 수 있다.

함께한 파리가 기억을 불러내 우리를 다시 사이좋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파리 살롱을 약속 장소로 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상대는 우리가 꼭 만나야 되느냐며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핸드폰과 내 지갑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은, 상대에게는 지워내야 할 것들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이 모든 건 헤어졌을 때 얘기. 만약 둘이 여전히 진행중이라면,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오래 함께한다면 역시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건 고스란히 함께하는 추억이 되어 자꾸만 되씹어볼 이야기들이 될 수 있다. 우리 일본 갔을 때 말야, 라고 시작하는 얘기에, 어, 우리 은각사 앞에서 사진 찍었잖아, 라고 대응할 수 있고, 우리 파리갔을 때 말야, 응 근데 에펠탑 앞에 너무 춥지 않았어? 할 수도 있다. 우리 맛사지 받았을 때 당신이 웃겼잖아, 라고 하면 야, 근데 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잖아, 로 응수할 수도 있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함께라면. 그러면 부러 한 쪽이 지워낼 필요도 또 부러 한쪽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함께 나란히 계속 차곡차곡 쌓아가는 둘만의 이야기가 될테니까.




다낭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와인과 스테이크를 먹던 그 젊은 커플은 그 날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앞으로 오래오래 그 날을 얘기하며 함께 웃게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만나 그 날의 이야기를 애써 지우려 하게될까. 어쩌면 어느 한 쪽은 지우지도 잊지도 못한 채로 계속 혼자 되새길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게 나쁜 건 아니니까. 반드시 함께해야만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아닌 것처럼, 이제 그들이 함께가 아니라고 해서 새드엔딩인 것도 아니다. 함께라면 함께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각자라면 또 각자인 이유가 있겠지. 인생의 그 지점에서 그들은 그 순간에 함께 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었든, 그 때라면 또 인생의 그 지점에서 그런 모습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김금희는 자신의 짧은 단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라고 말했지만, 나는 나의 그 낯선 나라에서의 시간들에 대해 저 말을 하고 싶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앞으로도 오래 그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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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2-11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어지지 않았다면..

다락방 2019-02-11 13:57   좋아요 1 | URL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가 써지고 있겠죠.....
 















2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캘리번과 마녀]를 나는 2월1일부터 펼쳤더랬다. 2월1일은 내가 다낭에 가는 날, 밤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고, 캘리번과 마녀를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챙겼는데, 서문까지 읽는 동안 '자본론을 알면 더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수차례 드는 거다. 그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엄두도 안났는데, 이 책의 서문까지 자본론 얘기가 어찌나 나오는지. 설사 그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이 책을 읽는데 크게 지장이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개념을 알고 읽으면 더 낫지 않을까 싶어, 나는 2월1일에 당일배송으로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주문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당일배송을 잘 도착해주었고, 그렇게 나는 캘리번과 마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둘 다 들고 다낭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낭에서는 뜨거운 태양에 반해 책을 손에 들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내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려우면 어쩌지 하고 겁먹었지만,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매우 쉽고 재미있었다. 글자도 크고 잘도 넘어가. 오호라, 자본론이 이런 이야기구나, 오오, 감탄하면서, 게다가 임승수가 아주 알기 쉽게 써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하고 이 책을 다 읽었다. 재미있어! 자본론 재미있네! 자, 이제 캘리번과 마녀를 읽을 준비를 마쳤다!


나는 어젯밤, 다시 캘리번과 마녀를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읽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캘리번'애 대해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캘리번..뭐지? 마침 나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템페스트에 관한 언급을 읽게된다.

서론에서였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은 [캘리번과 마녀]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런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서론, p.27)



하아- 캘리번...이 템페스트.... 에서 온거라고?


나는 템페스트를 아주 오래전에 읽었다. 배가 난파당해 섬에 사람들이 도착하게 되는 내용..정도로만 기억하고 있고 그 외의 것은 생각나지 않아, 캘리번이 템페스트에 나오는 이름이라니, 아아, 생소하다. 캘리번을 알면 캘리번과 마녀가 더 잘 읽히지 않겠는가, 하는수없이 나는 서론에서 또, 캘리번과 마녀의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내 서재방으로 가 책장 앞에 섰다. 내게는 분명, 템페스트가 있다. 아아, 너무 멋진 나여... 읽고 싶은 책은 책장에 있는 사람. 그렇게 아주 오래전에 읽어 기억나지 않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아, 어쩌면 이렇게 새로 읽는 책 같지, 처음 읽는 책 같지? 그래, 배가 난파당하는 것... 이것만 내가 기억하고 있구나. 오랜만에 다시 읽는 템페스트는 생소했고, 그리고 엄청 빻았다! 섬에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데, 여자의 아버지는 남자에게 자신이 딸을 '준다'고 표현하는 거다. 아아 빻은자여, 그대이름은 푸로스퍼로.



러면 내 선물로서, 그리고 그대의 덕망으로 해서 얻은 내 딸을 받게. 그러나 만약 자네가 모든 적절한 예식을 갖추어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그애의 처녀막을 파괴한다면 하느님은 이 약혼이 결혼으로 성장하도록 달콤한 비를 내려주시지 않을 것이네. (4막1장, p.94)




푸로스퍼로여, 아무리 그대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고는 하나, 어째서 당신이 당신의 딸을 '선물'로 준다고 표현하는 것이오. 그렇게 푸로스퍼로의 딸 '미랜다'는 '퍼디넌드'에게 '넘겨진다, 선물로서. 미랜다는 푸로스퍼로의 소유였다가 퍼디넌드의 소유가 되는 것. 아, 개빻음이여...



그런데, 아무리 오래전에 읽었다고 한들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수가 있는걸까...어쨌든 이 책에서 '캘리번'은 '마녀의 사생아'이자 괴물, 악의 상징으로 나온다. 마침 [템페스트]의 해설에 줄거리가 잘 요약되어 있어, 앞으로 [캘리번과 마녀]를 읽게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그 해설속 줄거리를 친히 옮겨오도록 하겠다.


집중하세요!




밀라노의 대공 푸로스퍼로(Prospero)는 12년 전에 마술 연구에만 몰입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나폴리의 왕 알론조(Alonso)의 힘을 빌린 동생 앤토니오(Antonio)에게 대공 지위를 찬탈당했다. 앤토니오는 형 푸로스퍼로와 세 살 난 질녀 미랜더(Miranda)를 보트에 실어 망망대해에 던져버렸다. 이 부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나폴리의 인자한 노대신 곤잘로(Gonzalo)가 식량과 옷, 귀중한 푸로스퍼로의 마술 서적들을 휴대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푸로스퍼로 부녀가 상륙한 무인고도는 악의 마녀 시코랙스(Sycorax)가 한때 살던 곳이기도 했다. 시코랙스는 생전에 짐승과 같은 괴물 캘리번(Caliban)을 낳았고, 에어리얼(Ariel)이란 정령을 갈라진 소나무 속에 가두어놓고 노예로 부렸었다. 푸로스퍼로는 에어리얼을 석방해주었고, 에어리얼은 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또 완전한 해방의 날을 내다보면서 푸로스퍼로를 주인으로 모시고 심부름을 하게 된다. 한편 푸로스퍼로는 캘리밴을 교육하여 문명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아 하인으로 부리게 된다. 이러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푸로스퍼로는 알론조 왕이 그의 일행과 더불어 튀니스에서 거행된 딸과 튀니스 왕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항해 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동생 앤토니오도 그 일행에 끼어 승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푸로스퍼로는 원수들을 일망타진하여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완성에 이른 자신의 마술로 폭풍우를 일으킨 후 에어리얼을 시켜서 이들을 섬으로 유인한다. 그리고 알론조 왕의 아들 퍼디넌드(Ferdinand)는 특별히 무리에서 따로 떼어 홀로 상륙시켜서 미랜더와 사랑하는 사이로 만든다. 그는 결국 자신의 자비하에 들어온 원수들을 용서하고, 마술을 버림으로써 비극적인 결말 대신에 행복한 결말을 낸다. 이것이 이 극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작품 해설, 작품내용, p.143-144)



템페스트를 읽으면서 내가 의아했던 건, '캘리번'이 괴물이나 악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푸로스퍼로는 그를 문명인으로 만들고자 했다하나, 그가 그렇게 악의 상징이었는지, 어둠의 자식이었는지 나는 딱히 설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녀의 사생아'라는 것도 거부반응이 일었는데, '마녀', '사생아' 가 모두 이제는 더이상 어떤 나쁨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히려 딸을 선물로 내주고, 자유를 약속하며 에어리얼을 제멋대로 부리는 푸로스퍼로가 더 짜증났달까. 내가 어린 시절 이 책을 봤다면 으으, 캘리번 나빠..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으아, 마녀의 사생아래 끔찍해, 하게 되었을까? 역시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마녀가 사생아를 낳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던건지, 그 마녀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 무엇을 그녀가 '마녀'가 되도록 만들었고, 또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사생아를 낳게' 만들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세상이 떠들어대는 '마녀이 사생아'는 세상이 말하는것처럼 나쁘거나 악이 아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너희들은 괜한 일로 그녀와 그녀의 자식을 비난하고 괴물로 만들었다. 마녀는 어떤 마녀의 짓을 햇을까. 무슨 짓을 했길래 마녀가 되었을까. 우리는 마녀가 하는 말에 이제 귀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마녀에게는 마녀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라고, 진 리스가 얘기했잖아.



에어리얼(Ariel)은 공기(air)의 정령을, 저주의 말이 입에 붙어 있다시피 하는 캘리번(Caliban)-그는 자신을 'Ban, Ban, Ca-Caliban'으로 부르기도 했다(2막 2장, 184행)-은 '저주(ban)하는' 어두움의 자식임을 우의적으로 각각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작품해설, p.145)



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나는 다시 캘리번과 마녀를 시작하련다. 처음부터, 다시. 

읽다가 또 뭔가 막히는 게 있어 다른 어떤 책을 또 꺼내들어 읽게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작한다.



막시무스 님은 벌써 다 읽으셨던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어느정도 읽고 계십니까? 자, 진행합시다, 여러분!!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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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2-1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가분의 의도와 다르게 자본의 시초축적과 기득권 세력에 의한 음흉하고 무서운 시도에 대해 좀 더 무게를 많이 두고 읽었던것 같아서 아직 여성주의에 다가가기는 많이 요원하다는 반성도 해 봅니다!
즐거운 독서되십시요!

다락방 2019-02-11 08:20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 님, 같이읽기 도서중 다른 한 권인 [혁명의 영점]도 도전해보시면 어떨까요? 저도 아직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긴 하지만, 캘리번과 마녀 이렇게 빨리 읽으셨으니, 같이 읽어 보셔도 좋을듯합니다.

저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막시무스 2019-02-11 09:21   좋아요 0 | URL
넵넵!ㅎ 혁명의 영점도 구매완료했구요!자본의 시초축척이 현대에도 계속되는지, 마녀사냥은 어떻게 변형되는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담주부터 읽어보려구요!ㅎ

다락방 2019-02-11 09:55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어떤 책을 읽을지 알고 있으니 너무 좋네요. 같이 읽는 짜릿한 맛이 있어요. 저도 막시무스 님에 맞춰 다음주부터 혁명의 영점을 읽으려면, 이번 주 안에 캘리번과 마녀를 끝내야 하는데...가능할지 모르겠어요. 하핫.

그렇게혜윰 2019-02-1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은 덮어놓고 사다보면 읽은 때가 있는 법!!!

다락방 2019-02-11 08:2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혜윰님. 일단 사두자, 사고 싶으면 사두자, 다 쓸 때가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jeje 2019-02-10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진짜 짱 멋있어요. 지금 막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 책이....책장에 있다니요. 짱멋!

다락방 2019-02-11 08:21   좋아요 0 | URL
짱 멋지죠! 제가 그렇더라고요? 지금도 제 방 책장 앞에 서면 제가 읽고 싶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앞으로 이런 멋진 삶을 살기 위해 계속 책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꺅 >.<

syo 2019-02-10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첫 번째 글이 올라왔군요...... 이제 슬슬 하나둘 올라올텐데.....
다들 다 써 놓고 눈치게임 하시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씀드리는건데요,

전 아직 못 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19-02-11 08:22   좋아요 0 | URL
저 템페스트도 읽고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도 읽었는데, 하아, 캘리번과 마녀 어려워요. 그간 읽었던 백래시, 페미사이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ㅠㅠ 저 잘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얼른 저보다 먼저 읽고 안내되는 글 좀 써줘요, 쇼님 ㅠㅠ

단발머리 2019-02-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관련 없는 질문 하나 드려도 되나요?
저기 뒤에 <템페스트> 오른쪽 뒤에 <가부장제의 창조>가 왜 검정색 책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하얀색 표지거든요. 왜 제꺼랑 다른 건가요? 진지한 질문이라 ㅋㅋ는 넣지 않겠습니다.

다락방 2019-02-12 10:20   좋아요 0 | URL
아마도 구판...이라서 그런걸 겁니다, 단발머리님.
지금 나오는 흰색은 개정판일 거에요.

저도 제가 산 게 아니라 이미 구입한 사람이 저한테 준거라서... 하핫

단발머리 2019-02-12 10:20   좋아요 0 | URL
아!!! 맞다, 기억나요.
<가부장제의 창조> 예전에 사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개정판이고. 그쵸? 그래서 제가 다락방님 멋져요! 했던 게 지금 기억나네요.
답변이 완료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2-12 10:22   좋아요 0 | URL
동시 답변 신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AI설!!!

다락방 2019-02-12 10: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9-27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템페스트…아… 저도요.
400년전 책이 빻은 건 참아도(?) 2010년 영화가 그 멋진 배우들로 마법사를 여자로 세우고도 엉망이어서 실망했어요. 거칠고 바보로 나오는 캘리번도 힘든 캐릭터인데 흑인 배우가 연기하니 더 끔찍하더라고요. 그래서! 애트우드의 버전을 꼭! 읽어야겠어요.

청아 2021-10-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깊이 공감합니다.
이런 단순하고 일방적인 묘사로 그런 비하와 매도가 당연시되고 문화가 되어 꾸준히 답습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락방님의 이 글을 읽고나니 더 파고파고 파파고 해야겠다는 각오도 다지고요!(부릅)
 














황정은의 새 책이 나왔구나, 라고 반가워하고 있다가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있다는 것도 즐거운데,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을 다정한 친구로부터 선물받는다니. 아, 삶은 가끔 이토록이나 아름답다. 여행지에 들고 가 읽으면서,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황정은은 다르구나, 했다. 황정은은 다르네. 이승우를 읽다가 이승우는 다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을 황정은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황정은은 다르다.


황정은은 다르다.

그래서 기다린다.

뒤에 몇 장을 남겨놓은 지금, 몇 번이나 '아이쿠, 황정은 작정하고 썼구나, 이번에 작정하고 썼어' 생각했다. 해야 할 말을 다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썼어.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있고, 그 작가의 신간을 선물해주는 친구가 있는 삶은 만족스럽다고, 여행지에서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내 옆에는 항상 나와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정들을 마치고 숙소에서 그 날 하루를 정리하며 와인과 맥주를 홀짝이던 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고, 내 취향을 알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취향저격의 책을 선물받고, 다정한 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밤. 이정도면 삶에 있어서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지 않나.

















오래전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본 영화인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비행기안에서 무얼볼까 하다가 이 영화를 다시보기로 했다. 마침 넷플릭스에 있더라. 정작 여행길이나 여행지에서는 보지 못하고, 어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살다보면 아주 급하게 섹스를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급하게. 그것을 섹스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혹은 그것은 섹스가 아닌가. 아니,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섹스라 불러야 할 것이다.


오래전에 본터라 이 영화의 처음 부분 기억은 없다시피 했는데, 알고보니 남자와 여자, 이 둘은 일단 15년 전에 한 캠프에서 처음 만난 사이. 그리고 5년 전에 다시 우연히 재회했었고, 그리고 1년전. 그리고 현재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절망과 슬픔 혹은 다른 어떤 위로가 필요한 감정을 안고 남자는 여자에게 연락했고, 술에 떡이 되어 여자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니 그 밤의 기억은 없고, 그러나 그 밤에는 섹스가 없었다. 그렇게 취해가지고 무슨 섹스람. 그러나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내가 벗어둔 옷들은 어디에 있나, 찾으면서,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하면서,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는, 15년전, 5년전, 1년전에 만난 적 있던 여자의 집에 와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매번 그 만남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터다. 호감도 있었다. 아무튼, 이 아침에, 여자는 출근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그 집은 여자를 비롯해 여자의 동료 의사들 남녀 합쳐 네 명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여자의 방에서 남자와 여자는 섹스를 한다. 여자는 '지각하면 안돼' 라고 말하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재빨리, 잽싸게 섹스를 시도한다. 키스 다음에 바로 콘돔으로 이어지는데, 바깥에서 동료 의사가 노크를 한다.



"우리 10분 안에 도착해야 해."


여자는 알겠다며 자신의 위에 올라와있는 남자에게 말한다.



"45초 안에 끝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누구나 살다보면 그렇게 급하게, 빨리 섹스를 해치워야(응?)하는 때가 있지 않나. 하고싶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섹스할 시간은 미처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다, 그러므로 재빨리, 잽싸게.


남자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비어져나오는 신음과 괴성을 막은 채로 45초 안에 후다닥- 그것을 끝낸다. 끝내고서 남자는 여자에게 얘기한다.



우리가 섹스했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눈빛이 마주치고, 불타오르고, 키스를 하고, 사정을 하기까지 모두 걸린 시간은 1분 남짓. 아아,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다. 잽싸게, 재빨리 섹스를 해치워야 하는 때. 누구나 다 그런 때가 있지 않나. 시간은 없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



다시 보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45초 안에 섹스를 끝내는 이들을 보면서 계속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 어느 보이밴드 였는데..국내 그룹..... 엔알지? 아 누구지? 태사자? 아 모르겠다. 아무튼 노래중에 '다섯걸음'이란 노래가 있었다.


원, 투, 쓰리, 포, 다섯걸음.


하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 그러니까 그게 너에게 가는 다섯 걸음이란 뜻이었나? 앞뒤와 맥락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저 원,투,쓰리,포, 다섯걸음. 딱 그 가사만 생각나는데, 45초안에 섹스를 끝내는 남자와 여자를 보면서 그 가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원, 투, 쓰리, 포, 사십오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좋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희도, 애무도, 다독임도, 체위의 바꿈도 없는, 그러나 섹스. 45초 안의 섹스. ㅎㅎ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도해봐야지. 45초. 




아침부터 섹스신 보면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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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2-08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하다....... 야하네요. 야해.
아침부터 야하다.
(이 대사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음)

늦잠자고 있었는데 잠이 확 깼어요 헤헤^ㅠ^

다락방 2019-02-08 09:1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막상 이런 댓글을 받으니까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쇼님은 뭐라고 대꾸했었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2-08 09:13   좋아요 0 | URL
젼 그냥 순진한 척 했는데 사람들이 안 믿어주는 분위기였어요. 귀신들같으니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2-08 09:15   좋아요 0 | URL
나는 뭐, 내 얘기도 아니고 영화 얘기한 거니까요...

=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

(쇼님 스맛폰으로 봤죠, 이 글?)

syo 2019-02-08 09: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바로 이런 식으로 순진한 척 하는 건데요. 잘 하시네요!!

그런데 그래봐야 아무도 안 믿더라구요?? ㅎ

왜 태그 안 보여주는데 북플놈아!!😣

다락방 2019-02-08 09:21   좋아요 0 | URL
뭘 아무도 안믿어! 나는 순진한 척 한 게 아니라, 그냥 영화얘기한 것 뿐이라굳!!!!!!!!!!!!!!!!!!!!!!!!!!!!!!!!!!!

단발머리 2019-02-08 09:42   좋아요 0 | URL
야한 걸로 치면 쇼님이 승!
다락방님 알라딘 최근 히트작 <얼굴을 만지는 방법> 읽어봤어요?
야하다........ 야하네요. 야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다락방님 스타일이 더 좋구요.
그러니까....... 정신차리고!!! 흐흠...... 다락방님 영화 스타일이 좋다구요.
난 태그는 잘 안 읽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2-08 09:44   좋아요 0 | URL
당연히 그 글 읽었죠. 여러분이 야하다고 하신 글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영화 스타일을 좋아해주신다니, 앞으로 열심히 쓰도록 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봐요, 야한 거는 쇼님이 짱먹었다!)

syo 2019-02-08 09:46   좋아요 0 | URL
이거 뭔가 눈 멀쩡히 뜨고 코 베이는 느낌인데?!?!?! 으아아.....

단발머리 2019-02-08 09:49   좋아요 0 | URL
우리 ‘야한 거‘는 쇼님에게 모두 맡기고 우리는 진지하게 영화 이야기 해요.
우리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와인 이야기, 고기 이야기, 안주 이야기, 스콘 이야기....
우리는 이런 이야기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2-08 09:51   좋아요 0 | URL
크윽..... 이번에는 완전히 당하고 말았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2-08 09:5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 야한 건 쇼님에게 모두 맡깁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계신분들 다 야해~난 아님!!!ㅋㅋㅋ45초 우아~ㅋㅋㅋ
 

2월 같이읽기 도서 가져왔지만 펼쳐보지 않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많이 걷는 바람에 시뻘겋게 타버렸다. 집에 가면 엄마한테 잔소리 엄청 들을듯 ㅜㅜ

아무튼, 다낭.
고작 하루 다니고 뭐라하기 그렇지만 나는 하노이가 이천배쯤 더 좋다.

덥고 습한거 원해서 왔는데 태양 너무 뜨거워서 좋아 ㅠㅠ
그렇지만 충분히 습하지 않아. 더 습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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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9-02-02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부럽......

다락방 2019-02-03 11:33   좋아요 0 | URL
세상 편하게 늘어져있습니다.. ㅎㅎ

단발머리 2019-02-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째 사진 음료 이름이 궁금합니다 ㅎㅎㅎ
좋은 휴식의 시간 되시길^^
from 서울 ㄷㅂㅁㄹ

다락방 2019-02-03 11:33   좋아요 0 | URL
코코넛밀크 커피 입니다. 코코넛밀크에 커피 부어 마시는건데 달달해요 ㅎㅎ

비공개 2019-02-0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낭가셨군요.. 부럽습니다!!

다락방 2019-02-03 11:33   좋아요 0 | URL
더워서 너무 좋아요 ㅜㅜ 이제 겨울은 동남아에서 나야겠어요 ㅜㅜㅜ

카알벨루치 2019-02-02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사진이 넘넘 멋집니다 다낭 까지 오오~잘 다녀오소서!

다락방 2019-02-03 11:34   좋아요 1 | URL
네, 연휴 끝나는 날 돌아갑니다. 으하하핫

psyche 2019-02-03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다락방 2019-02-03 11:34   좋아요 0 | URL
살이 다 탔어요 ㅜㅜ 화상 ㅜㅜㅜ 그렇지만 충분히 즐기다 가겠습니다!

jeje 2019-02-03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어쩜. 제가 좋아하는 사진들만 찍으셨을까요 ㅠㅠ (여러번 보고 있습니다 ㅎㅎ)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진짜 짱부럽습니다!!

다락방 2019-02-03 11:34   좋아요 0 | URL
으하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오늘은 호텔방에 짱박혀 쉴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

얼룩말 2019-02-03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제가 다 기분이 좋아지네요^^ 멋져부러요

다락방 2019-02-08 15:41   좋아요 0 | URL
벌써 끝났어요, 연휴가 ㅠㅠ 싫어라 ㅠㅠ

블랙겟타 2019-02-0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세권에 크레마. 거기다가 다낭에서요?!?
부럽... ㅜ
제 몫(?)까지 더 재밌게 즐기면서 지내다 오세요~ ^^

다락방 2019-02-08 15:41   좋아요 0 | URL
가지고간 책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열심히 읽을 거에요. 주말에는 페미니즘 책 같이읽기 도서 읽을 예정입니다. 페이퍼 하나라도 꼭 쓸 계획이에요. 빠샤!

얄라알라 2019-02-0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국 땅에서 두터운 책 세권, 이채롭게 보입니다.캘러번과 마녀들은 알라딘 서재 드나들다 보면 하도 자주 보이니, 이제 더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조바심이 드네요^^
여행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다락방 2019-02-08 15:42   좋아요 0 | URL
얄라얄라북사랑 님, 우리 캘리번과 마녀 같이 읽도록 해요! ㅎㅎ
2월에 같이 읽으면서 많은 얘기 나눠봅시다!!

여행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상도 행복하게 보내야지요.
주말 잘 보내세요, 얄라얄라북사랑 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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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강간의 역사를 드러낸다.


여성 입장에서는 강간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강제로 성적으로 침입하는 일이자,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부 공간을 동의 없이 침입당하는 일이다. (p.589)



강간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에 반해 일어나는 나의 몸에 대한 강제적 침입인만큼, 이토록 긴 강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우리 모두가 읽고 그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힘든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나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당신까지 힘들게 할까.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문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마지막 12장에 다 나와있다. 강간 문화를 바꿀 것, 법과 법 집행자를 바꿀 것, 그리고 여성 자신에 대한 생각과 시선도 바꿀 것. 이는 작년 불용시위에서도 여자들이 줄기차게 외쳐왔던 바고, 또 여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이며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천은 멀고도 멀어, 수전 브라운밀러조차도 그것이 단시일내에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관할 경찰서와 검찰, 배심원단, 판사석에서 상고법원과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법이 집행되는 모든 주요한 영역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강간 피해자에게 남성이 고안한 사법 체계 내에서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이중의 핸디캡을 부과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반영하도록 바뀌어야 하는 것은 법뿐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정의를 수호할 막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 역시 바뀌어야만 한다. (p.607)


여성이 완전한 평등을 쟁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법 집행의 핵심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parity를 획득하는 투쟁에 달려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확신한다. 법 집행enforcement 이란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강제력force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강제력은 초보적인 형태의 탈리오 법칙이 등장한 이래로 남성의 특권이었다. 남성의 몸집과 무게, 힘, 생물학적 구조뿐 아니라 여성의 진출을 차단하면서 의도적으로 남성만 특정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해온 법과 관습 덕택에 남성은 독점적으로 법을 집행할 특권을 누려왔다. (p.607)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경찰, 검사, 판사에 이르러 법을 집행하는 모든 이들이 지금처럼 남성 중심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혹항 성범죄에 '가장이다', '초범이다', '음주였다' 등의 각종 핑계로 감형해주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줄었을 것이다. 피해자인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강간과 성폭행 범죄가 일어나면 일단 여자를 꽃뱀으로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의 말을 의심부터 하는 게 아니라 믿기부터 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힘있는 자리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간당했다는 걸 알리고나서 그 여자가 받을 이익에는 뭐가 있을까? 그러나 그걸 얘기하는 순간 여자는 꽃뱀이 되고, 한 탕 하려는 여자가 되고, 행실이 바르지 못했을 거라는 의심을 받고, 그러게 왜 그랬느냐는 질책을 받는다. 지난달에 읽었던 《페미사이드》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강간을 신고했을 때 재판은 마치 피해자를 심문하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너는 정말 순수한 피해자인지, 니가 먼저 꼬리친 것은 아닌지, 니가 남자를 자극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강간 피해 말하기를 꺼려하게 되고 범죄는 묻혀진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말을 믿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p.607)




정치에도 마찬가지. 정치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최소한 남자들 만큼의 수라도 유지가 된다면 세상은 역시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직장 역시 마찬가지. 여자 상사가 더 많다면 직장 역시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법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강간 문화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여성이 남성을 자신의 합법적인 보호자로 인정하고, 입법 과정부터 법의 집행까지 남성들에게 맡겨두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일을 당장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p.607)



그러나 가해자를 보호하는 관대한 법 제도만이 강간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선동하는 데는 남성이 독점한 법 집행 권력 이상의 힘이 작용했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영속화된 문화적 가치가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발화성 높은 연료를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문화적 폭력을 격퇴하는 정면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p.609)



아마 지금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다 동의하고 진작에 생각했던 방법인 것이다. 얼마전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여남동수법 지지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후원을 한 것일테고. 그런데 수전 브라운밀러는, 더 하자고 얘기한다. 바로, 자신의 힘을 기르는 일.



남성은 언제나 강간범을 그들의 일원이 아닌 외부에서 온 늑대로 간주하고, 여성을 제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는 조심성 없고 멍청한 짐승으로 간주했다. 그 전제 위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가능한 한 다른 남성의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있을 것을 열렬히 촉구하고 질책하고 경고했다. 한마디로 남성들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특권을 여성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선 안 된다고 말해온 것이다. 좋은 의도로, 세심한 배려로, 진심 어린 걱정으로 충고를 한다지만, 충고에 담긴 메시지란 실상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라는 것 이상은 아니다. (p.623)



아 진짜 너무 싫다. 함부로 나서서 니 잣대로 조언하지 마라. 좋은 의도? 세심한 배려. 닥치시지. 부탁하지 않았는데 내뱉는 조언이란 건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입 다물어라.



자, 우리의 수전 브라운밀러는 말한다.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여성들도 승리를 알아야 한다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본인이 주짓수와 가라테 배웠던 경험을 얘기해가며,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운동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여성적이고 얌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승리하라, 싸우라, 이기라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아아, 나는 이 부분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간 무시해왔던 게 아닌가 싶어 심히 죄스러웠다. 지난 주말만 해도 에너지가 넘치는 파워풀한 여자조카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아이의 그 폭발할듯한 에너지를 좋아하면서도, 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말 잘들으라고만 했어. 아아, 형편없는 이모였다. 미안하다.. 조카야, 네 안에 있는 그 에너지를 맘껏 분출하렴.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체계적인 자기방어 훈련이며, 그런 훈련을 통해서만 금지에서 유래한 우리 내면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p.630)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법을 배웠으며 내가 그런 싸움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p.631)



무엇보다도 스스로 놀라웠던 점은 급반전과 찌르기, 주먹으로 치기 같은 기본 공격 동작들이 숙녀다운 몸가짐의 규범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내 자신에게도 대단히 낯선 동작인 반면,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자라면서 그런 동작을 배우고, 통달하면 박수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회는 남자아이가 그런 동작을 배울 때, 여자아이에게는 하얀 앞치마와 애나멜 메리제인 구두를 입히고는 그것을 더럽히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양육 초기의 그런 차이가 무시무시한 차이를 키웠다! 교습 첫 시간에 내 일본인 지도자는 수업에 들어온 여성 모두에게 차례로 와서 자기 가슴을 마음껏 때려보라고 권했다. 그건 전혀 무모한 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 시도에서 우리는 아무도 실제로 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내면에는 때리면 안 된다는 금기가 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비참할 만큼 발달되지 않은 우리의 근육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때리는 것에 대한 금기였다. (물론 훈련을 받으며 이 두가지 약점을 모두 빠르게 개선할 수 있었다.) (p.631)



더 많은 자리에 더 많은 여성들이 보여야 하는 당연한 방법 말고도 이렇게 여성 스스로 자신의 근육을 발달시키고 무엇보다 나 역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자신의 도덕적 금기를 깨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무척 즐거웠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하는 것, 그 경험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처음에는 낯설지만 좀 어렵겠지만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살아갈수록 여성이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은 도덕 코르셋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얌전히 말하고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그간 우리에게로 향했던 혐오발언을 키워오기만 한 것 같다. 게다가 혹여라도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참았던 시간들이 강간을 뿌리뽑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 코르셋을 버려야한다. 다른 사람들 생각해주다가 우리 자신의 인생이 엿된단 말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브라운밀러가 참여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오, 그것이 바로 미러링 운동이었다!



1968년 브루클린 출신의 프랜신 고트프리드Francine Gottfried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 업무를 맡게 되자, 그녀가 출근할 때 수천 명의 남성들이 지하철 출구에 모여들어 고트프리드의 몸매를 품평하고 성희롱을 했다. 이 사건에 자극받은 페미니스트 칼라 제이Karla jay 와 앨릭스 케이츠 슐먼 Alix Kates Shulman은 1970년, 여성이 그간 길거리에서 당해온 성희롱을 남성에게 그대로 '미러링'해서 돌려주는 '월스트리트 추파의 날Ogle-In' 시위를 기획했다. 브라운밀러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집단의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 나갔다. 이들은 지나가는 남자들을 노골적으로 음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며, 휘파람을 불고, '엉덩이가 실한데' '너무 작다~' '너무 빈약하네~' '이쁜이, 커피 한 잔 타줄래?' 같은 말을 던졌고, 한 동료는 남자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위는 성공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면서 세상에 반성폭력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옮긴이의 말, p.674)




처음엔 힘겨웠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넘치는 책이었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는데, 수전 브라운밀러가 멋지게 살고 계시다는 게 아닌가. 후훗.



이 책의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1970년대 미국에서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누구보다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전투적 급진 페미니스트였다. 뉴욕시 20층의 바다가 보이는 자신의 멋진 아파트에서 화단 가꾸는 법에 관한 책을 포함해 여러 권의 저서를 내며 80대인 지금도 멋지게 살고 계시다. (옮긴이의 말, p.683)




나 역시 급진 페미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멋지게 늙어가고 싶다. 80대에도 돈 벌면서 멋지게 늙어가야지. 어리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도덕 코르셋을 버리고 네 자신의 힘을 키우라고, 싸워서 이기고 승리하라고, 승리의 기쁨이 뭔지 알라고 말해주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 근육을 발달시키고 참지 말아야 할 일에 참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멋지게 늙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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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3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래그가 거의 옆구리 색칠 급이네요!!😃

다락방 2019-01-31 10:46   좋아요 0 | URL
그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캘리번과 마녀에도 많이 붙이게 될까요? 후훗

단발머리 2019-02-01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컷이예요. 완독해서 그럴까요?
완독의 위엄!!!

다락방 2019-02-01 07:50   좋아요 0 | URL
완독해놓고 뿌듯하더라고요! 꺅 >.<
자, 저는 2월 도서 시작할 예정입니다. 후훗.

카알벨루치 2019-02-0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열정넘치는 에너자이저 응원합니다 ^^

다락방 2019-02-05 12:56   좋아요 1 | URL
으앗 연휴가 끝나가고 있어서 너무나 아쉽습니다. 카알벨루치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9-02-05 1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빨리 오셔야 또 활동하시죠 다낭에서만 계심 안되죠 ㅋㅋㅋ

- 2019-02-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게 늙어가는 페미언니! 저도 열심히 늙어..읽어 갈 테야요!! 완독 축하하구 새해복마니 받으셔용🤗

다락방 2019-02-05 12:57   좋아요 1 | URL
쟝쟝님, 여성주의책 같이읽어주어 정말 고마워요. 작년 한 해 그렇게 쟝쟝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여러모로 흡족합니다. 우리 같이 계속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읽고 싸웁시다. 같이 멋지게 늙어가요!

- 2019-02-05 16:17   좋아요 0 | URL
그래야쥬 ㅎ 멋지게 🏃🏽‍♀️🏃🏽‍♀️🏃🏽‍♀️

- 2019-03-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락방님 저 방금 책 다 덮고 엄청 신나서 신고 하러 북플 왔다가 이거 다시 읽고 옮긴이의 말 안읽은거 깨닫고 마저 읽으러 갑니다..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