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의 새 책이 나왔구나, 라고 반가워하고 있다가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있다는 것도 즐거운데,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을 다정한 친구로부터 선물받는다니. 아, 삶은 가끔 이토록이나 아름답다. 여행지에 들고 가 읽으면서,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황정은은 다르구나, 했다. 황정은은 다르네. 이승우를 읽다가 이승우는 다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을 황정은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황정은은 다르다.
황정은은 다르다.
그래서 기다린다.
뒤에 몇 장을 남겨놓은 지금, 몇 번이나 '아이쿠, 황정은 작정하고 썼구나, 이번에 작정하고 썼어' 생각했다. 해야 할 말을 다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썼어.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있고, 그 작가의 신간을 선물해주는 친구가 있는 삶은 만족스럽다고, 여행지에서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내 옆에는 항상 나와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정들을 마치고 숙소에서 그 날 하루를 정리하며 와인과 맥주를 홀짝이던 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고, 내 취향을 알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취향저격의 책을 선물받고, 다정한 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밤. 이정도면 삶에 있어서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지 않나.
오래전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본 영화인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비행기안에서 무얼볼까 하다가 이 영화를 다시보기로 했다. 마침 넷플릭스에 있더라. 정작 여행길이나 여행지에서는 보지 못하고, 어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살다보면 아주 급하게 섹스를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급하게. 그것을 섹스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혹은 그것은 섹스가 아닌가. 아니,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섹스라 불러야 할 것이다.
오래전에 본터라 이 영화의 처음 부분 기억은 없다시피 했는데, 알고보니 남자와 여자, 이 둘은 일단 15년 전에 한 캠프에서 처음 만난 사이. 그리고 5년 전에 다시 우연히 재회했었고, 그리고 1년전. 그리고 현재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절망과 슬픔 혹은 다른 어떤 위로가 필요한 감정을 안고 남자는 여자에게 연락했고, 술에 떡이 되어 여자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니 그 밤의 기억은 없고, 그러나 그 밤에는 섹스가 없었다. 그렇게 취해가지고 무슨 섹스람. 그러나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내가 벗어둔 옷들은 어디에 있나, 찾으면서,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하면서,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는, 15년전, 5년전, 1년전에 만난 적 있던 여자의 집에 와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매번 그 만남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터다. 호감도 있었다. 아무튼, 이 아침에, 여자는 출근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그 집은 여자를 비롯해 여자의 동료 의사들 남녀 합쳐 네 명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여자의 방에서 남자와 여자는 섹스를 한다. 여자는 '지각하면 안돼' 라고 말하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재빨리, 잽싸게 섹스를 시도한다. 키스 다음에 바로 콘돔으로 이어지는데, 바깥에서 동료 의사가 노크를 한다.
"우리 10분 안에 도착해야 해."
여자는 알겠다며 자신의 위에 올라와있는 남자에게 말한다.
"45초 안에 끝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누구나 살다보면 그렇게 급하게, 빨리 섹스를 해치워야(응?)하는 때가 있지 않나. 하고싶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섹스할 시간은 미처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다, 그러므로 재빨리, 잽싸게.
남자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비어져나오는 신음과 괴성을 막은 채로 45초 안에 후다닥- 그것을 끝낸다. 끝내고서 남자는 여자에게 얘기한다.
우리가 섹스했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눈빛이 마주치고, 불타오르고, 키스를 하고, 사정을 하기까지 모두 걸린 시간은 1분 남짓. 아아,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다. 잽싸게, 재빨리 섹스를 해치워야 하는 때. 누구나 다 그런 때가 있지 않나. 시간은 없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
다시 보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45초 안에 섹스를 끝내는 이들을 보면서 계속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 어느 보이밴드 였는데..국내 그룹..... 엔알지? 아 누구지? 태사자? 아 모르겠다. 아무튼 노래중에 '다섯걸음'이란 노래가 있었다.
원, 투, 쓰리, 포, 다섯걸음.
하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 그러니까 그게 너에게 가는 다섯 걸음이란 뜻이었나? 앞뒤와 맥락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저 원,투,쓰리,포, 다섯걸음. 딱 그 가사만 생각나는데, 45초안에 섹스를 끝내는 남자와 여자를 보면서 그 가사가 갑자기 생각났다.
원, 투, 쓰리, 포, 사십오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좋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희도, 애무도, 다독임도, 체위의 바꿈도 없는, 그러나 섹스. 45초 안의 섹스. ㅎㅎ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도해봐야지. 45초.
아침부터 섹스신 보면서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