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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강간의 역사를 드러낸다.
여성 입장에서는 강간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강제로 성적으로 침입하는 일이자,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부 공간을 동의 없이 침입당하는 일이다. (p.589)
강간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에 반해 일어나는 나의 몸에 대한 강제적 침입인만큼, 이토록 긴 강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우리 모두가 읽고 그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힘든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나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당신까지 힘들게 할까.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문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마지막 12장에 다 나와있다. 강간 문화를 바꿀 것, 법과 법 집행자를 바꿀 것, 그리고 여성 자신에 대한 생각과 시선도 바꿀 것. 이는 작년 불용시위에서도 여자들이 줄기차게 외쳐왔던 바고, 또 여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이며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천은 멀고도 멀어, 수전 브라운밀러조차도 그것이 단시일내에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관할 경찰서와 검찰, 배심원단, 판사석에서 상고법원과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법이 집행되는 모든 주요한 영역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강간 피해자에게 남성이 고안한 사법 체계 내에서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이중의 핸디캡을 부과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반영하도록 바뀌어야 하는 것은 법뿐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정의를 수호할 막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 역시 바뀌어야만 한다. (p.607)
여성이 완전한 평등을 쟁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법 집행의 핵심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parity를 획득하는 투쟁에 달려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확신한다. 법 집행enforcement 이란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강제력force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강제력은 초보적인 형태의 탈리오 법칙이 등장한 이래로 남성의 특권이었다. 남성의 몸집과 무게, 힘, 생물학적 구조뿐 아니라 여성의 진출을 차단하면서 의도적으로 남성만 특정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해온 법과 관습 덕택에 남성은 독점적으로 법을 집행할 특권을 누려왔다. (p.607)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경찰, 검사, 판사에 이르러 법을 집행하는 모든 이들이 지금처럼 남성 중심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혹항 성범죄에 '가장이다', '초범이다', '음주였다' 등의 각종 핑계로 감형해주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줄었을 것이다. 피해자인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강간과 성폭행 범죄가 일어나면 일단 여자를 꽃뱀으로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의 말을 의심부터 하는 게 아니라 믿기부터 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힘있는 자리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간당했다는 걸 알리고나서 그 여자가 받을 이익에는 뭐가 있을까? 그러나 그걸 얘기하는 순간 여자는 꽃뱀이 되고, 한 탕 하려는 여자가 되고, 행실이 바르지 못했을 거라는 의심을 받고, 그러게 왜 그랬느냐는 질책을 받는다. 지난달에 읽었던 《페미사이드》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강간을 신고했을 때 재판은 마치 피해자를 심문하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너는 정말 순수한 피해자인지, 니가 먼저 꼬리친 것은 아닌지, 니가 남자를 자극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강간 피해 말하기를 꺼려하게 되고 범죄는 묻혀진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말을 믿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p.607)
정치에도 마찬가지. 정치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최소한 남자들 만큼의 수라도 유지가 된다면 세상은 역시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직장 역시 마찬가지. 여자 상사가 더 많다면 직장 역시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법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강간 문화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여성이 남성을 자신의 합법적인 보호자로 인정하고, 입법 과정부터 법의 집행까지 남성들에게 맡겨두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일을 당장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p.607)
그러나 가해자를 보호하는 관대한 법 제도만이 강간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선동하는 데는 남성이 독점한 법 집행 권력 이상의 힘이 작용했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영속화된 문화적 가치가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발화성 높은 연료를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문화적 폭력을 격퇴하는 정면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p.609)
아마 지금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다 동의하고 진작에 생각했던 방법인 것이다. 얼마전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여남동수법 지지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후원을 한 것일테고. 그런데 수전 브라운밀러는, 더 하자고 얘기한다. 바로, 자신의 힘을 기르는 일.
남성은 언제나 강간범을 그들의 일원이 아닌 외부에서 온 늑대로 간주하고, 여성을 제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는 조심성 없고 멍청한 짐승으로 간주했다. 그 전제 위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가능한 한 다른 남성의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있을 것을 열렬히 촉구하고 질책하고 경고했다. 한마디로 남성들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특권을 여성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선 안 된다고 말해온 것이다. 좋은 의도로, 세심한 배려로, 진심 어린 걱정으로 충고를 한다지만, 충고에 담긴 메시지란 실상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라는 것 이상은 아니다. (p.623)
아 진짜 너무 싫다. 함부로 나서서 니 잣대로 조언하지 마라. 좋은 의도? 세심한 배려. 닥치시지. 부탁하지 않았는데 내뱉는 조언이란 건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입 다물어라.
자, 우리의 수전 브라운밀러는 말한다.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여성들도 승리를 알아야 한다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본인이 주짓수와 가라테 배웠던 경험을 얘기해가며,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운동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여성적이고 얌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승리하라, 싸우라, 이기라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아아, 나는 이 부분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간 무시해왔던 게 아닌가 싶어 심히 죄스러웠다. 지난 주말만 해도 에너지가 넘치는 파워풀한 여자조카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아이의 그 폭발할듯한 에너지를 좋아하면서도, 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말 잘들으라고만 했어. 아아, 형편없는 이모였다. 미안하다.. 조카야, 네 안에 있는 그 에너지를 맘껏 분출하렴.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체계적인 자기방어 훈련이며, 그런 훈련을 통해서만 금지에서 유래한 우리 내면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p.630)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법을 배웠으며 내가 그런 싸움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p.631)
무엇보다도 스스로 놀라웠던 점은 급반전과 찌르기, 주먹으로 치기 같은 기본 공격 동작들이 숙녀다운 몸가짐의 규범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내 자신에게도 대단히 낯선 동작인 반면,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자라면서 그런 동작을 배우고, 통달하면 박수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회는 남자아이가 그런 동작을 배울 때, 여자아이에게는 하얀 앞치마와 애나멜 메리제인 구두를 입히고는 그것을 더럽히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양육 초기의 그런 차이가 무시무시한 차이를 키웠다! 교습 첫 시간에 내 일본인 지도자는 수업에 들어온 여성 모두에게 차례로 와서 자기 가슴을 마음껏 때려보라고 권했다. 그건 전혀 무모한 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 시도에서 우리는 아무도 실제로 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내면에는 때리면 안 된다는 금기가 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비참할 만큼 발달되지 않은 우리의 근육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때리는 것에 대한 금기였다. (물론 훈련을 받으며 이 두가지 약점을 모두 빠르게 개선할 수 있었다.) (p.631)
더 많은 자리에 더 많은 여성들이 보여야 하는 당연한 방법 말고도 이렇게 여성 스스로 자신의 근육을 발달시키고 무엇보다 나 역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자신의 도덕적 금기를 깨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무척 즐거웠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하는 것, 그 경험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처음에는 낯설지만 좀 어렵겠지만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살아갈수록 여성이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은 도덕 코르셋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얌전히 말하고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그간 우리에게로 향했던 혐오발언을 키워오기만 한 것 같다. 게다가 혹여라도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참았던 시간들이 강간을 뿌리뽑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 코르셋을 버려야한다. 다른 사람들 생각해주다가 우리 자신의 인생이 엿된단 말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브라운밀러가 참여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오, 그것이 바로 미러링 운동이었다!
1968년 브루클린 출신의 프랜신 고트프리드Francine Gottfried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 업무를 맡게 되자, 그녀가 출근할 때 수천 명의 남성들이 지하철 출구에 모여들어 고트프리드의 몸매를 품평하고 성희롱을 했다. 이 사건에 자극받은 페미니스트 칼라 제이Karla jay 와 앨릭스 케이츠 슐먼 Alix Kates Shulman은 1970년, 여성이 그간 길거리에서 당해온 성희롱을 남성에게 그대로 '미러링'해서 돌려주는 '월스트리트 추파의 날Ogle-In' 시위를 기획했다. 브라운밀러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집단의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 나갔다. 이들은 지나가는 남자들을 노골적으로 음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며, 휘파람을 불고, '엉덩이가 실한데' '너무 작다~' '너무 빈약하네~' '이쁜이, 커피 한 잔 타줄래?' 같은 말을 던졌고, 한 동료는 남자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위는 성공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면서 세상에 반성폭력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옮긴이의 말, p.674)
처음엔 힘겨웠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넘치는 책이었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는데, 수전 브라운밀러가 멋지게 살고 계시다는 게 아닌가. 후훗.
이 책의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1970년대 미국에서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누구보다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전투적 급진 페미니스트였다. 뉴욕시 20층의 바다가 보이는 자신의 멋진 아파트에서 화단 가꾸는 법에 관한 책을 포함해 여러 권의 저서를 내며 80대인 지금도 멋지게 살고 계시다. (옮긴이의 말, p.683)
나 역시 급진 페미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멋지게 늙어가고 싶다. 80대에도 돈 벌면서 멋지게 늙어가야지. 어리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도덕 코르셋을 버리고 네 자신의 힘을 키우라고, 싸워서 이기고 승리하라고, 승리의 기쁨이 뭔지 알라고 말해주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 근육을 발달시키고 참지 말아야 할 일에 참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멋지게 늙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