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에 갔을 때 친구와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렀다. 우리는 항상 여행지에 가면 첫날 밤에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이 여행을 즐기자고 건배를 하곤 했다. 그 날도 그랬는데, 마침 우리 옆에는 한국인 젊은 남녀커플이 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온 것 같아 거의 다 먹어갔고, 테이블이 바싹 붙어있는 탓에, 그들이 와인을 잔으로 주문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커플은 아주 젊어 보였는데, 그러니까 20대로 보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명절에 해외로 둘이 여행을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20대 때에는 외국에 가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29살에 뉴욕에 가긴 했지만),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올 수 있었을까. 동남아라는 여행지의 특성상 비행기값도, 호텔비도, 물가도 저렴하니 마음먹으면 오지 못할 이유야 없지만, 정말 나 때랑은 많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동남아로 여행갔을 때는 유독 젊은 커플이 많이 보였다.
친구와 신나서 와인을 시키고 스테이크를 주문해 먹었다. 리조또와 사이드도 주문해 먹었고.
그런데 자꾸 옆 테이블이 신경쓰였다.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젊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낯선 나라에 여행왔다는 게. 낯선 곳에 와 낯선 사람들 틈에서 낯선 언어로 음식을 주문하고, 그리고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 보내는 것. 그것은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저 나이때는 해보지 못했던 것. 그러고보면 나는 한 번도 연애중인 남자와 함께 이국을 여행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해보지 못한 걸 저렇게 젊은 나이에 해보는 그들이 마냥 부러웠다. 저들은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까.
김금희의 짧은 소설을 읽고 있다. 부모와의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 연인들의 이야기등, 많은 짧은 이야기들에 많은 사람들의 많은 사연이 담겨있는데, 그러다보니 여행에 대한 것도 많다. 친구들끼리 여행 간것도 있지만 연인들이 간 것도 있어.
한동안 상조와 윤경은 원피스에 대한 기억을 맞춰보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하나의 기억이 더해지면 그것을 상쇄하는 전혀 다른 기억이 등장하는, 극성이 다른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밀어내는 듯한 시간이었다. 원피스가 상조의 집에 있다고 확신하는 지점부터 상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윤경은 둘이 교토 여행을 갔을 때 그 원피스를 입었고 료칸에 두고 오는 바람에 상조네 집 주소로 돌려받았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상조는 여행에서 윤경이 그런 원피스를 입었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윤경은 이성적으로라면 꼼꼼히 삭제해야 했지만 불행히도 아이폰의 아이클라우드에 저절로 저장되어버린 사진들을 뒤적여 그들이 은각사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을 보내주어야 했다. 사진에서 둘은 웃고 있었다. (원피스를 돌려줘, p.19)
이성적이라는 건 뭘까. 어쩌면 상조는 여행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처럼, 사진 조차 말끔히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관련된 물건도 다 버렸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윤경은 아이클라우드를 뒤지면 그들이 함께한 여행에 관련된 사진을 찾아낼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아이클라우드를 부러 뒤지는 게 아니어도, 그저 그 자리에 늘 그랬던 것처럼 있다. 나는 아예 삭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라면? 그렇다면 꼼꼼히 지워야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가 왜 사진을 지워야하는지 모르겠다. 내 지갑속에도 여전히 사진은 고이 간직되어 있다.
윤이 파리 살롱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인 사장이 파리에서 직접 사용했던 온갖 낡은 물건들과 대대손손 찍은 흑백의 가족사진들과 책들과 프랑스풍 자수로 된 테이블보가 덮여 있는 이곳이 윤과 경이 떠났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8개월 남짓된 무렵이었고 그들의 감정은 반짝였다. 마치 밤이면 더욱 빛나는 에펠탑처럼. (파리 살롱, p.64-66)
윤은 경과 다퉜다. 다투고 나서 처음 만나는 걸 파리 살롱으로 정했다. 그들의 반짝이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경을 불러냈다. 그러나 경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함께한 여행인데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억되고 간직될 수 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워버려야 할 무엇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지갑에 고이 사진을 간직하고, 핸드폰에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자 하는 상대는 다른 연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것들을 삭제하고, 지워내고, 잊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그건 그가 그 자신에게 하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나의 기억과 나의 핸드폰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윤이 경과 파리를 갔다니, 연애를 시작한 지 8개월차에 갔다니, 나는 그것도 너무 신기했다. 파리라면, 동남아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곳인데,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 여행을 어떤 기억으로 남겼을까. 어떤 추억을 쌓았을까.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일본에 간 상조와 윤경은 어떻고. 윤경이 즐겨 입던 원피스를 입고 함께 여행했던 일본은,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상조와 윤경은 헤어진 지 일년째인데, 그 사이에 그들 사이에는 또 다른 어떤 이야기들이 쓰여졌을까. 윤경이 클라우드를 뒤져서 사진을 찾아냈다는 것은, 사실 그 사이에는 굳이 그 사진을 볼 일이 없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상조는, 기억에도 없는 만큼 부러 사진들을 지워냇을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할 경우, 전여자친구와의 여행사진을 핸드폰에 남겨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으니까. 그랬을테니까.
어쩌면 지금은 이렇게나 많은 젊은 커플들이 함께 외국으로 여행가기도 하는 모양이구나, 새삼 생각했다. 나는 여태 살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보고 싶었으나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의 젊음과,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이 부러웠다. 여행을 가서 반드시 즐거우리란 보장은 없지만, 함께 여행지를 고르고 예약을 하고,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함께 낯선 곳에 도착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걷는 일은 분명 특별한 일이니까. 그 시간들은 그대로 그 당시에 차곡차곡 쌓였을 테니까.
그 여행은 그러나 각자에게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들은 다툴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여행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어, 라고 생각될 수도 있고, 우리는 여행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아, 했을 수도 있다. 아, 그 사람하고 함께한 여행은 정말 달콤했는데, 라는 추억을 불러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그들은 각자 다른 상대와 또다른 곳을 여행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같은 곳을 아예 다른 상대와 가게 될 수도 있고.
다낭에 가서 옆 테이블의 커플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외국으로 여행간 커플들을 보고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로망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실현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추억이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복잡한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항상 비행기를 같이 타보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앞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그조차도 잘 모르겠다.
그와 이국에서 만난 일은 있다. 내가 낯선 나라로 가고 그 역시 낯선 나라로 나를 만나기 위해 왔던 일. 우리는 각자 비행기를 예약하고 각자가 살고 있는 땅에서, 만나기 위해 서로의 나라로부터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만났다. 나보다 조금 더 공항에 일찍 도착한 그는, 내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낯선 나라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지 않고 환승 게이트로 가 헤매이는 동안, 입국 수속을 받기 위해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나갔을 때 그는 거기에 있었고, 그렇게 만나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었다. 내가, 이국에서, 그를 만난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공항에 있는 마트에 들어가 장을 보았다. 아마 우리가 지금 호텔로 들어가면 서로의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피곤해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을테니, 장을 좀 봐가지고 들어가자. 우리는 과일을 샀고 안주를 샀다. 각자가 서로를 위해 가지고 온 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 룸서비스를 시켜두고 각자가 가져온 술을 꺼냈다. 나는 꽃다발도 준비해둔 터다. 한국에서부터 그 나라까지, 나는 꽃을 가지고 갔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술을 마셨고, 스테이크를 먹었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음악을 들었다. 내가 산책을 하는 동안 그는 수영을 했다. 함께 샤브샤브를 먹고 쇼핑을 했고 방향을 잃었을 땐 멈추어서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방향을 찾기도 했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서는 나란히 엎드려 마사지 해주는 직원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를 마사지해주던 여자분은 한국의 이민호를 사랑한다 말했다. 여기선 누구나 이민호를 사랑해요,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다가 말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는 놀랐다는 듯, 왜 그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가 대답했다.
"She loves me."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민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해서, 나와, 그와, 그 곳에 있던 두 명의 마사지해주시던 분들이 함께 깔깔대고 웃었더랬다. 나는 그의 그런 점들을 좋아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내 사랑을 믿던 일. 그것에 자신을 가지던 일.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으나, 그는 나 이전에 그곳에 다른 여자와 '함께' 그곳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한 동안 그 시간은 또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각자의 풍경으로 적혔을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 역시 그렇지만, 어쩌면 그는 틈틈이 지난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묻지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어쩌면 지난 시간과 나와 함께 있던 시간을 나름대로 혼자 비교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혼자 산책하러 호텔 바깥으로 나갔을 때, 그곳의 온도와 습도와 공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껏 좋아했더랬다. 나는, 이곳이 좋아. 나는 동남아를 좋아한다! 그렇게 혼자 걸으면서 사진을 찍어 동생들과 엄마에게 보냈을 때, 엄마랑 동생 모두가 얘기했다.
"너 행복해 보여."
나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내가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는 잊고 싶어할 수 있다.
상조는 기억에도 없는 원피스를 윤경은 기어코 찾아내 들이밀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한 여행은 서로에게 각자 다른 식으로 적힐 수 있다.
함께한 파리가 기억을 불러내 우리를 다시 사이좋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파리 살롱을 약속 장소로 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상대는 우리가 꼭 만나야 되느냐며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핸드폰과 내 지갑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은, 상대에게는 지워내야 할 것들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이 모든 건 헤어졌을 때 얘기. 만약 둘이 여전히 진행중이라면,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오래 함께한다면 역시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건 고스란히 함께하는 추억이 되어 자꾸만 되씹어볼 이야기들이 될 수 있다. 우리 일본 갔을 때 말야, 라고 시작하는 얘기에, 어, 우리 은각사 앞에서 사진 찍었잖아, 라고 대응할 수 있고, 우리 파리갔을 때 말야, 응 근데 에펠탑 앞에 너무 춥지 않았어? 할 수도 있다. 우리 맛사지 받았을 때 당신이 웃겼잖아, 라고 하면 야, 근데 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잖아, 로 응수할 수도 있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함께라면. 그러면 부러 한 쪽이 지워낼 필요도 또 부러 한쪽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함께 나란히 계속 차곡차곡 쌓아가는 둘만의 이야기가 될테니까.
다낭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와인과 스테이크를 먹던 그 젊은 커플은 그 날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앞으로 오래오래 그 날을 얘기하며 함께 웃게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만나 그 날의 이야기를 애써 지우려 하게될까. 어쩌면 어느 한 쪽은 지우지도 잊지도 못한 채로 계속 혼자 되새길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게 나쁜 건 아니니까. 반드시 함께해야만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아닌 것처럼, 이제 그들이 함께가 아니라고 해서 새드엔딩인 것도 아니다. 함께라면 함께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각자라면 또 각자인 이유가 있겠지. 인생의 그 지점에서 그들은 그 순간에 함께 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었든, 그 때라면 또 인생의 그 지점에서 그런 모습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김금희는 자신의 짧은 단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라고 말했지만, 나는 나의 그 낯선 나라에서의 시간들에 대해 저 말을 하고 싶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앞으로도 오래 그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