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와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다. 내 인생에 내가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의 자아'라고 말했다. 친구는 내게 '그렇게 보여' 라고 말했다.


나는 좀 더 깊은 사람이 되고 싶고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거기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닌, 내 힘으로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계속 사랑하면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게 내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이지만, 끊임없이 계속 읽고 쓰기를 지속하고 싶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라는 것, 사유라든가 통찰이라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을 놓지 않고 싶다. 책을 읽는 족족 지식이 되어 머리에 쌓인다면 나는 박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머리가 좋은 사람 같은 것은 아니기에, 읽는대로 족족 그것들을 내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도 계속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글로 써내는 것은, 내가 나를 좀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이 되게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출근길의 독서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출퇴근의 독서는 일상이긴 하지만, 퇴근길의 독서는 포기할 때도 있는 한편(그럴 땐 영화를 본다), 출근길에는 결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경험상 출근할 때 지하철 안 집중력이 하루중 최고다. 그 때 읽는 것들은 정말로 내 몸이 쭉쭉 빨아들이는 것 같고 사고가 확장되는 게 막 느껴져. 그래서 너무 좋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그 순간을 다른 일로 낭비할 수 없어. 그 때만큼은 꼭 책을 읽으려고 한다.




















요즘 출근길에는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읽고 있는데, 와, 이 책은 진짜 너무 좋다. 내가 다 읽으면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또 리뷰를 잘 못써? 그렇지만 이 책은 내가 아침에 생각하며 읽기에 진짜 맞춤한 책이고, 저자의 통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라 너무 좋다.


레이첼 모랜은 인생의 순간순간을 어릴 때부터 그냥 넘겼던 사람이 아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눈앞에 닥친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거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분명히 파악하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렇게나 좋은 책이 나왔겠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사유와 통찰이 가득해서 형광펜 들고 밑줄 긋기를 수시로 하고 있고, 포스트잇 플래그도 덕지덕지 붙여가며 이제 겨우 절반을 읽었다. 매번 이렇게나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한 문장들을 토로할 수 있다니, 이런 책을 써줌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응원도 격하게 보내고 싶다. 당신은 글을 더 써야 합니다. 이 책은 이 책 자체로 매우 의미있고 대단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당신의 생각과 통찰을 드러내는 글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매 꼭지가 다 인상적이지만, 특히나 나는 '타락의 상호작용'에서 뒷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성구매자와 성매매여성이 서로 함께 타락해가는 것.


성구매 경험이 있는 남자, 그리고 성구매를 계속 하는 남자들은 무수히 많다. 남자사람 친구들로부터 그런 경험을 듣기도 했고, 애인으로부터 들었던 적도 있다. 애인이나 아내가 있으면서도 성구매를 하고, 그것을 굳이 숨겨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일 아닌가. 일전에 회사 남자동료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내 여자친구는 자기 임신하면 내 성욕 어떻게 참냐고 성매매 하라고 했어' 라며 자랑했다. 오, 신이시여. 그는 여자친구가 매우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맙소사. 그런 과정에서 아마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성매매를 대체 왜 하냐는 물음에 '거기서는 아내나 여자친구가 해주지 않는 걸 해주거든.' 어떤가, 다들 들어보지 않았는가.



자, 바로 이 지점에서 타락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그 남성은 생리혈에 성적으로 도취되었다. 그의 성향은 평생 성매매 여성을 방문하도록 이끌었는데, 당연히 사생활에서 만나는 여성들과는 이런 욕망을 공유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성매매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자신과 인생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기대를 할 수 없는 변태 성향을 다른 계층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남성의 고집이다. 여성들은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종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되게 나뉜다.

내 친구는 생리혈이 가장 많이 나올 때 그 구매자와 만나기로 하고 적어도 만나기 하루 전에 탐폰을 착용해서 피에 흠뻑 젖도록 했다. 그 구매자는 항상 단호하게 탐폰이 완전히 젖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만나면 그녀는 탐폰을 빼고 그 구매자는 어린 시절 경험을 다시 살게 된다.

나의 친구와 그 캐나다인 성구매자 사이 특이한 타락의 상호작용은 이렇다. 그 친구는 그 구매자가 만났던 모든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갖게 만드는 그의 더럽고 역겨운 습관이 지속되어 그 구매자가 자신의 가치를 낮추도록 도모했으며, 그 구매자는 다른 어떤 여성에게도 제시하지 못할 역할을 감히 그녀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녀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성매매 내 타락의 상호작용은 바로 이와 같다. 영향을 주고, 반영하며 합병하면서 쌍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요구되면 제공되고, 찾으면 충족되고, 제시되면 받아들여진다. 타락은 스스로 갱신하고 재생하는 데 고수이고, 특정 박테리아가 습한 장소에서 가장 잘 번식하듯이 타락은 성매매를 가장 최적의 환경으로 여긴다. (p.146)




아, 너무 소름끼치게 완벽한 구절이 아닌가. 여기서 예로든 생리혈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변태성향이긴 하지만, 다른 요구라 해도 마찬가지다. 감히 아내나 여자친구에게는 요구하지 못할 거라는 걸 스스로 알면서 성매매 여성에게는 요구하는 바로 그 지점, 그것으로 일단 여자들은 나뉘어진다. 이 변태를 요구할 수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로. 그리고 성매매시 그 요구가 허용됨으로써 그 남자의 그 변태성향, 사라져야 할 잘못된 욕망은 지속,유지될 수 있다. 그가 나쁜 행동을 없애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매매 여성은 다른 여자들이 허락하지 않을만한 행위를 허락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게 된다. 레이첼 모랜은 이것을 '타락의 상호작용'이라고 표현한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이런 일들을 듣고 보고 경험하면서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이면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닌가. 그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를 레이첼 모랜은 깊이 들여다보는 거다. 게다가, 그걸 글로 정리해 써낼 수 있는 사람이라니. 나는 너무 어마어마한 글을 만난 것 같다. 이 어마어마한 글을 만나는 바람에 나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생각해보게 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지점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아, 리뷰 써야되는데 여기다 너무 할 말 다 해버렸네. 



이런 독서를 대체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나는 더 읽고 싶다. 더 읽고 더 알고 더 생각하고 싶다.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 역시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사고가 확장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내 안에 많은 것들을,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차곡차곡 쌓고 싶다. 사람이 단단해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정말이지 독서가 으뜸이다. 독서가 진짜 최고되는 것이야.



여러분, 책을 읽자. 여러분 페이드 포 읽자. 페이드 포 진짜 너무 너무좋다. 너무 너무 좋아 진짜. 한 인간이 사유랄 수 있는 최대치, 통찰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 책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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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1-3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최고! 에 공감합니다. 책은 사랑이죠ㅎㅎㅎ. 명료하고 깔끔한 리뷰 읽고 많이 생각하고 도움받고 갑니다.

다락방 2019-12-02 09:00   좋아요 1 | URL
으흐흐 알라딘은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좋아요. 독서 좋다는 말에 호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예요.
월요일 아침입니다. 즐겁게 시작하세요!

붕붕툐툐 2019-1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 지하철 독서의 매력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읽고 싶지만 젤 안 읽히는 책을 그 시간에 읽어요~ 페이드포 읽고 싶은 책에 눌러 담았습니다:)

다락방 2019-12-02 09:01   좋아요 0 | URL
오오 븅븅툐툐님도 출근 시간에 제일 집중이 잘 되시나요? 후훗. 오늘 아침에도 역시나 책을 읽으면서 왔어요. 그럴 때는 정말이지 출근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집니다. 우리 언제나 좋은 책 읽으면서 생각 많이 많이 하면서 살아갑시다!
 


















기존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볼 때마다 재미있고 좋다는 말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사두었는데, 정작 내가 이 책을 읽게된 건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때문이었다. 보부아르는 이 책이 지식을 가진 남자가 창녀를 구원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거다. 물론 다른 책을 깐 거에 비하면 잠깐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긴 하는데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 어차피 사둔 책, 보부아르 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보자, 하고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그러니 고전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것일테다. 누군가 이 책 재미있냐, 라고 물어오면 나는 고민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게다가 의미도 있다. 남자 주인공 '래리' 는 어떤 면에서 너무 닮고 싶고 부러우니까. 내가 딱 원하는 그런 타입이다. 물론 내가 만나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은 타입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런 타입. 삶 전반에 걸쳐서는 절대 닮고 싶지 않지만, 그가 공부를 열망하고 알고 싶어하고 열심히 해서 외국어도 몇 개나 마스터하는 그 과정들에 있어서만큼은 '으윽 나도 이러고 싶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지적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아마 최근에 몸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이 책 속에서 그려내는 여성, 그 여성을 보는 편협한 시각에 대해서. 이 책속에는 다양한 생김새와 다양한 성격의 여자가 나오지만, 그러나 그 여자들 모두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여자들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한계 때문에 그런 면도 분명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중산층의 백인 남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래리'와 '이사벨'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참전한 군인이었던 래리는 참전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살면서 세속적인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계속 공부하고 싶고 삶의 진리를 알고 싶다. 이에 이사벨은 그를 설득하고자 한다.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취업을 해야 한다, 고. 계속 공부만 하고 살고싶다는 건 나태하고 책임회피라고. 그러나 래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내 대답은 이거야. 모든 미국인이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길을 따라가니까. 당신이 미처 모르고 있는 건, 공부하고 싶다는 내 욕구가 대단히 크다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레이가 큰돈을 벌겠다는 열정을 가진 것처럼 말이야. 몇 년쯤 공부를 하며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조국에 대한 배신이 되는 일일까? 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내게도 미국에 기여할 만한 무언가가 생길지도 몰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말이야. 물론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 하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적어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보다 더 궁색하게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 (p.119)



이사벨은 그런 그가 너무 답답하다. 결혼을 해야 되는데, 결혼할 남자가 공부만 하겠다고 하니 미치겠다. 자기는 파티에도 가야 하고 예쁜 옷도 입고 다녀야 하는데.



"당신은 정말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구.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남들이 하는 것들을 하고 싶단 말이야. 파티에도 가고, 춤추러도 가고 싶고, 골프도 치고 승마도 하고 싶어. 예쁜 옷도 마음껏 입고 싶고. 친구들처럼 멋진 옷을 못 입는 게 여자한테는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아? 친구들이 싫증나서 파는 헌 옷을 사서 입는 게 어떤 기분일지, 누군가 딱한 마음에서 새 옷을 선물해 주면 그것을 고마워하며 받아야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마음에 드는 헤어스타일을 하러 좋은 미용사한테 가지도 못할 거야. 전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난 싫어. 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당신이 도서관에 책이나 읽으러 가 버리면, 나더러 하루 종일 혼자 뭘 하라는 거야? 가게의 유리 진열장이나 들여다보며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뤽상부르 공원에 앉아서 애가 놀다가 다치지 않는지 보기나 하란 말이야?" (p.121)




나는 위의 래리의 입장도 밑의 이사벨 입장도 둘다 너무나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나는 래리 같은 삶을 살고 싶을지언정, 내가 만나는 남자가 래리 같은 남자라면 나 역시도 거침없이 이별을 말할 것이다. 공부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다면, 그가 먹고 살아갈 돈은 누군가가 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자신은 계속 공부를 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아, 너무 싫다. 그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래리는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돈을 상속받아 괜찮다. 다만, 이사벨이 원하는 그런 부유한 삶을 사는 데에는 못미칠 뿐. 이사벨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만 한다. 래리가 원하는 삶은 지금 래리의 형편으로 가능한데, 나 역시 그러한 형편이라면 아마 래리처럼 말하고 래리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 현재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책 읽고 여행다니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데. 책 읽고 영화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글 쓰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데.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 퇴근까지 갇혀있다가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삶은, 그 자체로 짜릿함도 없진 않지만,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좀 더 오랜 시간을 책 읽으며 살고 싶다. 물론 노력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겠지만, 래리처럼 공부에만 몰두해서 원하는 책을 읽을 수단인 외국어들도 다 배우고 싶다. 그렇지만 회사에 출퇴근 하면 퇴근 뒤에 녹초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의 내 삶이야.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공부하고 싶고 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자꾸 질문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는 내가 하고 싶은 거다.


또한 이사벨의 입장도 역시 알겠다. 나 역시 편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다. 이사벨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파티며 춤.. 같은 거 안좋아하고 골프.. 관심 없다는 게 .. 뭐 그렇지만 승마라면 좀 좋은데? 아무튼 나도 좋은 곳으로 여행 다니면서 먹고 싶은 거 맛있게 먹고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젊은 이사벨이 요구하는 삶이란 것이, 나랑 디테일은 다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사벨이 저런 얘기를 몇 년전의 한국에서 글로 쓰거나 말로 했다면 아마 남자들이 김치녀 된장녀라고 욕했겠다, 라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했다. '뭐야, 남자가 고생해서 돈 벌어오면 너는 그걸로 예쁜 옷이나 산다는 거냐?!' 하는 비난을 아마 대부분의 한국남자가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 여기서 이사벨과 나의 차이가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왜? 내가 직장에 다니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해서 회사에 나를 가둬두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내가 살고 있어. 그렇게 한달동안 일하면 통장에 잠깐이지만 월급이 똭- 꽂힌다. 나는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와인 냉장고를 채우고(요즘은 못채우고 있다. 돈이 ... 돈이.. ), 비행기를 예약한다.



내가 원하는 삶과 상대가 지향하는 삶이 다르면, 같이 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일테다. 한쪽은 공부만 하고 싶고 한쪽은 놀고만 싶은데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어울리는 한쌍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저들은 어떻게도 헤어지는 게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또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낫다고 보여진다. 나였어도 래리랑 헤어질 것이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이 달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이 래리랑 헤어지는 건, 래리가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내가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벨에게는 그것이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이 책의 초판은 1944년에 쓰여졌다. 게다가 이 책의 배경은 1940년대 전이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지금의 나와 달랐다는 거다. 여자들에게 일자리도 그리고 남자와 같은 임금도 보장되지 않았다. 여자의 삶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 여자가 부자로 살고 싶다면, 부자인 남자랑 결혼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돈이 필요하다면 아버지에게 그 다음엔 남편에게 기댔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이사벨이 래리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나와 다르다. 그 후에 이사벨은 부자 남자 '그레이'를 사귀고 결혼해서 대단한 부자로 산다. 게다가 그레이는 이사벨을 너무나 사랑해 굉장히 다정하게 잘 대해준다. 그러니까 래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까지는 나와 이사벨이 같지만, 그 후의 삶은 나와 이사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사벨은 1940년대를 살아가고 있고 나는 2019년을 살고 있으니까. 남녀 임금차이가 결코 그때보다 나아지진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일을 한다는 선택지가 내 앞에 있고 이사벨에게는 다른 남자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예쁜 옷을 마음껏 입고 싶다고 말하는 이사벨을 그려 넣은 것이 여성 혐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건 그저 이사벨이란 사람 자체의 욕망일 것이다. 게다가 남편에게 그걸 기대하고 바라는 것 역시도 여성혐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서머싯 몸이 그 시대적 배경과 여자들이 놓여있었던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서머싯 몸은 '이런 여자도 있고 이런 여자도 있지' 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단지 썼을 뿐이고, 딱히 그런 여자들에 대해 나쁜 시선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는 전무한 것. 그에게 삶을 아름답게 구성하고 삶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달려가고자 애를 쓰는 건, 남자들만의 몫이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지점인 거다, 그에게는.

쉽게 얘기하자면, 서머싯 몸 속의 소설에서 남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었지만 여자들에게는 현재만 있다는 것.



래리는 남편을 잃고 알콜 중독에 약물중독이 되어 이 남자 저 남자랑 자고 다니는 구제불능의 소피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 알았던 소피는 시를 쓰는 맑은 영혼이었다며. 이에 이사벨은 격분한다. 그렇게 막돼먹고 지저분한 여자에게 래리를 줄 순 없다고. 하아..


자, 래리가 소피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결혼하려고 한걸까? 그것은 막돼먹은 소피의 인생을 구원하고자 한 것. 이것부터가 너무 괘씸하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랑 함께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구원이 가능할거라고 믿은 것. 내가 소피였다면, 내가 아무리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내 인생을 바꿔줄 의도로 결혼하자고 한 남자에게 예스를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몸은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 남자가 매춘부를 현모양처로 바꾸는 일. 화자인 몸이 분노하는 이사벨에게 말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매춘부하고 결혼한 친구들이 있지. 한 명은 스페인 사람이고 두 명은 동양 사람인데, 전부들 아내를 현모양처로 바꿔놨다구.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줬으니 고마워서라도 잘하겠지. 게다가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으니까." (p.343)



매춘부란 무엇이고 현모양처란 무엇인가.

인생의 저 깊은 수렁에 빠진 건 매춘부이고 궁극적으로 추구할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현모양처란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해주었기에 남자에게 감사해야 하는것이 그녀들의 몫인가. 그렇다면 매춘부를 매춘부로 만드는 건 누구인가..

몸은 매춘부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여자라고 할 순 없지. 존경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술을 좋아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사람도 많아. 물론 좋은 습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 혹은 불친절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든." (p.341)



이런 몸의 말에 이사벨은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방방 뛰는데, 그러니까 이거다. 매춘부가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을 혐오하거나 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 인생은 남자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어, 그건 가능해!


이게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매춘부는 왜 매춘부다? 매춘부로부터 성을 구매하는 건 누구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들에게 일자리가 풍족하고 남녀와 같은 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면, 여자들에게도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경제권이 있었다면 여자들이 매춘부로 내몰렸을까? 참나원 어처구니가 없고요. 이러니까 보부아르 님이 제2의 성에서 까주신 겁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성매매를 하는 남자도 싫지만, 매춘부에 대해 시혜적인 시선을 가진 남자도 개역겹다 진짜. 그래봤자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보지 않는거니까.



그렇게나 망가진 여자를 비난하는 이사벨과, 그런 여자들이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남자들은 그녀들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몸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에서 가져온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으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은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27)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라보는 곳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사소한 많은 부분들이 다른 걸 이해하며 지낼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것이 선이라는 바로 그 지점으로(어쩌면 악이라도) 같아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함께 생각하는 윤리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윤리와 나의 윤리가 충돌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함께할 수 있을까.



요즘 페이드포 읽으면서 또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가득이다. 페이드포 추천사는 정희진쌤의 것인데,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 책을 언급한다. 아, 또 얼마나 포르노그라피 읽고 싶어지는지! 그러나 알다시피 그 책은 절판인 상태. 어딘가에서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게 맞긴 한건가요? 진행되고 있나요?


나는 안되겠다, 원서라도 사서 천천히 매일 한 줄씩이라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얼라리여~ 원서도 절판이여? 알라딘에서는 살 수가 없어. 나는 아마존으로 갔다. 얼라리여~ 이것은 새 책으로 구매하려면 몇 만원을 줘야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또 중고가 몇 권 나와있어? 나는 배송료 포함 2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일단!! 주문을 마쳤으나, 그러나... 그 다음은 어찌될 것인가.. 나는 매일 한 줄 읽기에 도전할 것인가. 내가 이 책을 샀다는 소식에 친구는 앞으로 밑줄 긋는 부분 공유해달라 했는데, 아아, 신이시여, 저는 그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자, 면도날로 시작한 이 페이퍼는 포르노그래피로 끝마친다. 이제 밥 때가 되었으므로. 이만총총.














그가 말한 남자는 이전에 그녀에게 두세 번 수작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적당히 거절했더랬다. - P283

"직업이야 구하면 되잖습니까."
"그게 문젭니다.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을 안 하니까요. 아무 일도 안 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아마 전쟁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 좀 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벌써 1년이나 쉬었는걸요. 그 정도면 충분하잖습니까."
- P39

이사벨은 매우 아름다웠다.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좁고 긴 스타일의 치마 밑단이 통통한 다리를 감춰 주었다. 드레스의 가슴께로 풍만한 젖가슴 라인이 도드라져 보였다. 맨살이 드러난 양팔도 통통한 편이었지만 목선은 매우 아름다웠다.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틀림없이 굉장히 아름답고, 탐나도록 매력적인 아가씨였지만, 만일 몸 관리에 신경 쓰지 않으면 보기 흉하게 뚱뚱해질 것이 분명했다. - P43

그녀는 확실히 다른 아가씨들보다 말수가 적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끝이 약간 위로 들린 조그만 코와 큰 입, 녹색이 도는 푸른 눈을 가진 재미있는 얼굴이었다. 엷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굉장히 마른 몸매라서 가슴이 남자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납작했다. - P43

"나는 내 형제들과 달리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지 않았다네. 기회는 있었지만 거절했지. 그보다는 사회에 나가고 싶었거든.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말이야. 케임브리지에 들어갔더라면 그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네. 경험 많은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 더 빨리 많은 걸 깨닫게 되지. 이끌어 줄 누군가가 없으면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어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법일세." - P58

그즈음 엘리엇의 나이는 65세였다. 이제 머리도 더 하얗게 세고 얼굴에 주름도 늘었으며 눈 아래에 살도 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변함없이 날신하고 자세도 꼿꼿하게 유지했다. 언제나 모든 생활 습관에서 절제와 적당함을 추구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세월이 자신을 유린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사람 같았다. 옷은 런던의 최고급 양복점에서 맞췄고, 머리 손질과 면도는 단골 이발사에게 맡겼으며, 최상의 컨디션과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마사지를 받았다. - P199

당시에는 여자들이 보통 낮에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그녀 역시 그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샴페인 색깔의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늘씬하고 맵시 있게 뻗어 있었다. 얼굴이 예뻐도 다리가 유일한 콤플렉스인 여자들이 많지만, 이사벨은 처녀 때 볼품없던 다리는 사라지고 이제 보기 드문 각선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에 넘치는 건강미와 쾌활함과 젊음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면, 이제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는 인공적인 기술과 육체적인 노력과 절제에서 기인한 것일 테지만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 P228

"그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앞에 안 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더라구요.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죠? 드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면 사랑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든다고. 그땐 참 냉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얘긴 것 같아요."
"래리를 보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안 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천국과도 같은 고통인걸요." - P270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욕망하고 열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그러니 남편들이 적당히 때와 장소를 봐 가면서 시시덕거리는 걸 갖고 여자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게 꼭 남자들한테만 해당된다고 할 순 없죠." - P279

이 그림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게 된 그는 돈과 지위를 가진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수잔은 그에게 독설을 퍼붓기보다는 그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 P284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슴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듯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 P313

"저는 여자들을 잘 알아요. 여자는 한 번 그렇게 망가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구요. 소피가 그렇게 된 건 원래부터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피가 래리한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조만간 헤어질 거예요. 타고난 피가 그런 애니까. 소피가 원하는 건 야수같은 남자예요. 그런 남자와 있을 때 흥분이 되니까요. 그러니 결국 야수를 찾아 나설 거예요. 래리까지 지옥으로 밀어 넣고 말걸요." - P342

우리는 하숙집에 방 두 칸을 얻어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거실로 썼죠. 일은 그만둰다고 했지만 그녀가 계속 하겠다고 했어요. 저 역시 낮에 혼자 있을 수 있으니 그 편이 좋았죠. 부엌도 맘대로 쓸 수 있어서 그녀는 출근 전에 제게 아침을 해 주고 정오에는 집에 들러 점심을 만들어 줬어요. - P426

"이제 진짜 그 사람을 잃은 거군요."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의자 등받이에 얼굴을 기댄채 흐느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숨길 수 없는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내가 전한 소식이 산산이 부숴 놓은 그 희망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를 만나면서 적어도 그가 자신의 세상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에겐 얄팍한 유대의 끈이 되어 왔다는 정도만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유대의 끈을 마침내 끊어 버림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영원한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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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11-27 14: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너무 좋아요!!!!!!
피곤한 오후인데 눈이 번쩍 뜨입니다! @@
왼쪽에 코너 하나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다락방과 함께 하는 고전 다시 읽기>

- 2019-11-27 21:36   좋아요 1 | URL
다락방과 함께하는 고전 뚜까패기!! ㅋㅋㅋ

- 2019-11-27 21:37   좋아요 0 | URL
다락방 그는 오래 전 보부아르가 철학자를 먼지로 만들어 버렸 듯 숱한 고전들을 가루가 되어 흩날리도록 두드려 부쉇다고 한다..

단발머리 2019-11-27 21:37   좋아요 1 | URL
뚜까패기,가 훨씬 낫네요!
역시 공쟝쟝님 감성~~~^^

- 2019-11-27 22:03   좋아요 0 | URL
감성이라뇨.... (폭력에 대한 열린 감슈성..???ㅋㅋㅋ)

다락방 2019-11-28 08:18   좋아요 1 | URL
어휴 여러분 ㅋㅋㅋㅋㅋㅋ
무슨 말씀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지들 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우 좋아하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고있다)

다 뚜까팹시다!! 으르렁-

초록별 2019-11-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을 통해 많은 분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낙입니다~~^^;
오늘 글은 피로회복제 박...스네요. 시간도 없으실 텐데 재미난 글로 한바탕 웃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연재 부탁드려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다락방 2019-11-28 08:17   좋아요 0 | URL
제 글 되게 긴데 초록별님 꼬박꼬박 잘 읽어주시네요. ㅎㅎㅎ
북플로 보면 엄청 길텐데요. 제가 너무 피씨 서재활동 하는 사람이라.. 글이 길어요. 하하하하.
즐거운 북플활동 하세요!!

비연 2019-11-28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성> 다 읽은 후 (꼭!) 이것도 읽어야지!

다락방 2019-11-28 08:16   좋아요 1 | URL
비연님, 이제 12월입니다. 한 달 남았습니다?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으하하하

비연 2019-11-28 13:12   좋아요 0 | URL
흠? 흠? 흠!!! ㅜㅜㅜㅜ 한달 남았다니. 지금 수많은 송년회를 뚫고 나름(!) 열심 노력 중입니다..(철푸덕)

jiny5677 2021-01-0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리뷰를 읽다가 블로그에 있는 페미니즘 서적 관련 리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종종 찾아올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1-01-05 08: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성주의 책 읽으며 글 쓰고 있으니 지니님 오셨을 때 읽을거리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음화화핫!!

밥이좋다 2022-01-1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미스터리세계로 인도하신 다락방님을 이책으로 다시 뵙네요. 이책도 거의 100년이 된 책이라서 요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는 남자라 쉽게(?) 받아들였지만) 내용이 많았다는 것을 다락방님 페이퍼로 깨닫습니다.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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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에 토종이 있다면
영국엔 백남 문학이 있구먼.
이 책은 가히 백남 문학의 정수라 할만한다. 토종하고 겨뤄 싸우면 누가 이길것인가..
재미는 있지만 백남 문학의 정수여...
보부아르가 왜 깠는지 너무 잘 알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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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1-27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남 문학의 정수 ㅋㅋㅋㅋㅋㅋ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19-11-27 10:31   좋아요 2 | URL
저 지금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쓰고 있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스피 2019-11-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백남이 뭔말인가 했더니 백인남자였네요^^

다락방 2019-11-28 08:18   좋아요 0 | URL
네 한남은 한국남자 백남은 백인남자 으흐흐

책식동물 2019-12-2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안 읽어서 중고로 판매하려고 했는데 이걸 보고 판매하지 않기로 했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12-27 18:3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ㅋㅋ 이 책에 대해 제가 길게 쓴 페이퍼도 있으니 살펴보셔요 ㅋㅋㅋㅋㅋ

junha9814 2023-07-07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국여자의 천박함은 고전명작에도 오물을 뿌리는 구나. 이런명작을 읽고나서 느낀점이 그런거라니. 제발 그런 천박한 지성가지고서 고전명작 더럽히지 말고 니들 수준에 딱 맞는 82년생 김지영 ,bl물 ,아이돌 오빠들 보면서 노세요

사이다 2024-11-22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렴 한 때 20대 남자의 베스트셀러가 라노벨인 것 보다는 저분의 교양이 낫지 않을까요~?^^ 댓에 있는 언급하신 책을보니 공감 능력도 부족하신 것 같은데 다른 책 많이 읽으시며 사회의 문제점이나 파악하시길^^ 공감도 지능이라 합니다.
 














'톰 리플리(맷 데이먼)'는 피아노를 치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다. 하루는 다른 반주자를 대신해 한 파티에서 잠깐 연주를 하게 되는데, 그때 그 연주자의 자켓을 빌려입었고, 그 자켓은 '프린스턴' 대학의 자켓이었다. 그 자켓을 보면 누구나 '아 저사람은 프린스턴을 나왔구나'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자켓.


그걸 보고 조선업계의 어마어마한 부자 미스터 그린리프 씨는 그에게 '내 아들도 거기 다녔다'며 알은체를 하고, 그런 인연으로 그에게 '이탈리아에서 돈이나 흥청망청 써대는 아들을 좀 데려와달라'고 부탁한다. 여비를 챙겨 주면서.


리플리는 프린스턴에 다닌 적이 없지만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들인 '딕키 그린리프(주드 로)' 역시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은 채로 여비를 챙겨 이탈리아로 떠난다. 딕키를 만나기 전 딕키에 대해 공부하고, 딕키가 좋아한다는 재즈에 대해 공부한다. 그리고 우연히 이탈리아에서 만난 척 딕키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프린스턴 동창이라고 말한다. 그 일로 그들은 친해지게 되고, 딕키는 자신이 약혼녀 마지(기네스 팰트로)와 함께 사는 집에서 함께 거주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형제처럼 둘도없는 친구가 된다.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좋은 집에서 생활하고 호화로운 개인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 모두는 그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리플리가 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이 생활은 그에게 너무너무 좋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딕키는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한다. 자신들은 이탈리아 북부로 옮길 것이고, 너도 이제 네 갈길로 가라, 고. 돈 한 푼 없이 자신들에게 붙어 사는 게 너무 싫다면서 그에게 지루하고 지겹다고 말한다. 이 부유한 생활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리플리는 그와 다툼 끝에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척 연기를 한다. 로마로 가 호화로운 호텔을 잡아 그곳에서는 딕키가 된 자신이 살고, 허름한 호텔을 잡아 그곳에서는 리플리가 되어 산다. 그러면서 서로를 찾는 연락을 하면서 그가 계속 살아 있는 듯 딕키의 행세를 하며 딕키의 반지를 끼고 딕키의 옷을 입고 딕키의 돈을 쓴다.



그러나 이 생활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딕키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친구인 '프레디'는 단번에 리플리가 딕키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눈치챈다. 그의 행동이며 딕키의 집이라고 마련해둔 곳이 수상하기만 하다. 눈치챘다는 걸 알게된 리플리는 프레디도 죽여버린다. 그리고 계속 딕키인 듯 행동을 한다.




이 영화 역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듣고 보게 됐다. 이 영화는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 작품이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가 이 영화들의 원작이다. 이 책으로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리플리 증후군이란 병적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이수정 교수님은 이렇게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자존감이 지극히 낮아서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초라하다는 자존감 낮음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거짓말을 해도, 그렇게 해서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해도 만족할 수가 없어서 더 나은 것, 더 나은 위치로 거짓말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
















나 역시 이런 거짓말들이 자존감 낮은 데서 시작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리플리가 프린스턴 대학 조끼를 빌려입었다 해도, 만약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어? 우리 아들도 프린스턴 나왔는데?' 라는 누군가의 알은체에 '아, 이거 내 조끼 아니야~ 나는 거기 안나왔어~' 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를 나오지 않았으니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괜히 프린스턴 나온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 순간에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날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이야' 하고 굳이 고쳐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약 계속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된다면 고쳐줄 것이다. 아, 사실은 내가 그날은 말을 안했는데~ 하면서. 그러나 리플리는 프린스턴 대학생이 되고, 딕키의 친구가 된다. 그러다 결국 딕키까지 되어버려. 그러면 그가 딕키가 되었다면, 그렇게 딕키와 프레디를 죽였다면, 그러면 끝일까?



누구나 살면서 거짓말을 해본 경험은 있을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해봤다면 당연히 거짓말하는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페이퍼로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거짓말은 보통의 에너지로 되는 게 아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편한 것은 정직하게 사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써서 말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정직하다면, 진실을 말하는 게 어렵지 않다. 내가 하버드를 나오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물음에 '나 하버드 안나왔는데' 라고 말하면 된다. 왜냐면 나는 하버드를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내가 하버드를 나왔다고 거짓말을 해버리면, 다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계속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그 거짓말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쌓고 쌓고 쌓아야 한다. 친구도 알아야 하고 교수도 알아야 하고 전공도 말해야 하고 교정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아, 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쉽계 예로 들면 양다리를 걸치는 게 거짓에 거짓을 쌓는 일 아닌가. 왜 '쿨'의 노래에도 있잖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겉과 속의 이름이 달라서 양다리 들통난 일...



한번 받던 영화 또 보고, 했던 얘기 다시 또하고, 저녁 식사 두번 했더니 왜 이렇게 헷갈리던지~ 같은 편지 적어 보냈어. 며칠 후에 날 벼락이 떨어졌어. 겉과 속에 이름 틀렸었나봐








이 영화를 보는 일은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누구나 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지내야 하잖아. 혹여라도 이게 탄로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리플리 역시 스트레스 였겠지.  경찰의 압박이 오고 딕키의 약혼녀인 '마지' 마저도 눈치채는 것 같을 때, 그 스트레스는 얼마나 극에 달했을까.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자신은 그 거짓말을 지속하기 위해서 살인도 저질렀다.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으면서 고생 안하고 사는 걸 지속하기 위해,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계속 쫄린채로 딕키인 척 살아야 하는데, 대체 왜 그렇게 사는가.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도 없고 그러니 리플리의 그 순간순간의 선택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없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리플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으으 나였다면 어땠을까, 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대입해서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하잖아? 리플리는 되기 싫었다. 초반에 거짓말 할 때부터 이미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렇게나 스트레스가 심한데 리플리는 왜 대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가. 그렇게 계속 거짓에 거짓을 쌓다가 리플리는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도 뭔지 모르고, 그건 엉망이 된것에 다름아닌데 대체 왜...




딕키의 아버지도 딕키의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도 진실로부터 멀리 있어 리플리를 신뢰한다. 딕키의 약혼녀였던 마지만이 리플리가 딕키를 죽였다는 걸 의심하지만, 딕키의 아버지는 마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오히려 '남자에겐 여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하면서 진정하라고 해... 하아- 이 얼마나 상징적인 장면인가. 진실을 아는 여자는 미친 여자가 되어 침묵을 강요당해버려. 그렇게 세상은 남자들에게 계속 범죄를 저지르게 또 판이 돌아간다.. 아, 이 얘기 하니까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 얘기로 이어가고 싶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고 페이퍼가 너무 길어질 것이니까 그러지 말기로 하자.




수사는 종료됐고 딕키가 프레디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있고, 딕키의 아버지는 리플리를 신뢰하여 많은 돈을 그에게 주기로 한다. 리플리는 이제 피아노 치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뜻밖의 행운에 활짝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딕키를 아는 사람이 또 있고, 리플리를 아는 사람도 또 있고,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들은 또 생길텐데, 그럴 때마다 리플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분명한 건, 자신의 거짓말을 지속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부유함을 지속하기 위해 살인을 한 사람은, 그 다음 살인까지 결정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거다. 진실을 아는 자를 죽임으로써 거짓말을 견고히 하려는건데, 진실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거짓에 거짓을 쌓고 또 거짓을 쌓아 이룬 세상은 결국 악으로 가득차게 된다. 아니, 대체 스트레스로 가득한 그 삶을 왜 선택하는가.




나는 예전부터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어느 학교 졸업했어?'라고 묻는다면 '하버드 나왔어' 라고 심드렁하게 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로망은 로망일 뿐, 하버드 근처에 가본적도 없으므로...

정직하게 사는 게 답이다. 정직하게 사는 게 결국은 자신을 위한 선이다. 정직하게 사는 게 자신에게 가장 편한 길이야. 정직하게 산다면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갑자기 누가 뭘 물어도 그러하다. 고민하지 않아도 돼. 거짓을 말하면 잠깐 하버드 졸업한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내게 남는 게 무어람? 하버드 졸업했다한들, 남들이 그렇게 믿는다한들, 나는 지금의 나인데..



대학시절 편의점 알바할 때 다른 알바생들한테 이런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나 원래 재벌집 딸인데 아빠가 서민의 삶을 체험해보라 해서 알바하는 거야' 라고. 물론, 아무도 믿지 않고 다들 빵빵터지기만 했다... 흐음.. 이 직장에 들어와서도 다른 직원들한테 이렇게 거짓말 해보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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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11-27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맷 데이먼의 리플리는 아마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 작일 겁니다.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가 5권으로 나온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절판 되어서 책을 구매하지 못했내요.사진에서 보듯 박스셋이 넘 멋있는데 절판이라 많이 아쉽네요.

다락방 2019-11-27 21:22   좋아요 0 | URL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라는 작품의 리메이크라고 제가 본문에 이미 적었습니다. 그걸로 볼까 리플리로 볼까 망설이다 리플리로 본겁니다.

카스피 2019-11-27 23:5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그만 그부분을 놓쳐 버렸네요^^;;;

slobe00 2019-12-04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하버드 법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라니.. 그런 이야기를 툭 던지실 수 있다니 정말 존경합니다.. 저희 강아지 눈꼽만도 못한 자존감의 소유자인 저는 이런 이야길 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요...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나 닥터스를 읽은 세대라면 아마도 그런 로망 다 갖고 있을 텐데 ㅎㅎ

다락방 2019-12-10 17:44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 [투 윅스 노티스]에서 ‘산드라 블럭‘이 ‘휴 그랜트‘가 물었던가, 무심하게 ‘하버드 법대 나왔어요‘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 진짜 너무 멋있어서 그때부터 로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미 대학 졸업해버린 훌쩍 후에 말입니다. 철이 덜들었달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있어 보이잖아요. 하버드 법대출신 이라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강간을 정의하면 한 문장으로 가능하다.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면 그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이다. 여성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문제인데도, 여성의 관점을 반영한 이런 정의가 법에 적용된 적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없다. (p.10)




























제니퍼는 유부남 애인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의 별장에 도착한다. 유부남은 그녀의 엉덩이에 환장하지만 침대에서 빠져나와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아이들을 챙긴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돌아가고.


사막 한가운데의 별장인지라 오가는 이도 없고 매우 고요하며 이 사막 한가운데에 제니퍼와 애인 단둘만 있다. 게다가 별장은 매우 크고 좋아서 앞에 수영장도 있고 넓은 방도 여러개며 먹을것도 충분히 준비되어있다. 애인과 단둘만 있을거라 생각했던 제니퍼는 갑자기 낯선 남자 두 명의 방문에 놀라는데, 다음날 함께 사냥하기로 한 유부남의 친구들이 하루 먼저 도착한 것.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제니퍼와 유부남의 친구들이지만 인사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시게 되는데, 유부남의 친구들인 남자1, 남자2는 이미 제니퍼의 미모에 반해서 정신줄을 놓았다.


제니퍼는 자신이 가진 외모가 매우 특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예쁘고 몸매가 뛰어나다는 걸 아는 사람. 그녀는 유부남과 남자들 앞에서 술을 마시고 섹시댄스도 추고, 유부남과 섹스하러 가는 것도 굳이 감출 생각도 없다. 사막 한가운데에, 다른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에,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만 있는 상황. 그 중 남자 한 명은 자신의 애인이라고 해도, 과연 이 상황은 안전할 것인가.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애인이 잠깐 집을 비웠다. 두시간쯤 밖에 나갔다 올 계획이고 남자1은 취해서 뻗어 있고 남자 2는 제니퍼에게 '여기에 우리 둘만 있네' 라며 노골적으로 제니퍼에게 다가간다. 제니퍼는 그에게 점차로 두려움을 느끼는데, 남자2는 '너 어제는 나랑 섹스할 것처럼 춤추지 않았냐'면서 그녀를 강간한다. 그 소리에 남자1이 강간 현장인 침실에 오게 되고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데, '너도 할거 아니면 문닫고 나가' 라는 남자2의 말에, 남자1은 조용히 문을 닫고 강간을 못본체 한다. 닫힌 문 뒤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남자1은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애인이 헬리콥터를 불러주지 않으면 이 별장에서 나갈 수도 없어서 애인이 돌아오자마자 헬리콥터를 빨리 불러달라, 나 집에 가고 싶다고 애원한다. 친구인 남자2로부터 '사실은 말야..' 하며 그녀를 강간했다는 얘기를 들은 유부남 애인은, 그녀의 통장에 돈을 넣었으니 캐나다 가서 새출발 할 수 있다면서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한다. 여자는 집에 가고 싶다고 계속 얘기하자 유부남 애인은 그녀에게 폭력을 쓴다. 닥치라고.



여자는 이제야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챈다. 자신의 애인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냅다 뛴다. 그러나 냅다 뛴다고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그녀에게 여기는 낯선 곳이며 또한 사람 하나 없는 사막이다. 게다가 남자 세 명은 이곳에 사냥하기 위해 모인 터라 총을 가지고 있어. 그녀는 도망치고 그녀를 추격하는 남자가 셋. 그녀는 달리다가 절벽을 맞닥뜨리고, 거기에서 애인은 그녀를 밀어 떨어뜨린다. 이에 그녀도 놀랐겠지만 친구들도 놀란다. 야,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이때 애인이 말한다.



"그냥 두면 우리 15년간 감옥에 있어야 해."



15년간 감옥에 있기 싫었던 남자들은 그녀를 죽이는 데 합의한셈.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인데, 나는 이 장면에서 매우 부러웠다. 강간범들이 자신의 죄가 발각되면 15년형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장면이. 대한민국에서는 감자탕의 고기만 덜어줘도 섹스에 합의한 게 되는데. 설사 강간이라고 밝혀져도 형이 짧은데. 모든 법과 처벌이 강간범 살리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섹슈얼리티로 인한 여성의 고통은 비가시화된다. 낙태, 구타, 성매매등 대개의 여성 섹규얼리티 관련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다. 그래서 섹슈얼리티 문제는 법 제정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관련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남성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시각과 의지가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p.33)










그렇게 그들은 그녀를 죽이고, 죽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계획대로 사냥을 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시신을 처리하자, 라고 얘기를 나누지만, 돌아오는 길에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시체가 없다. 그녀는 죽지 않았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복수를 준비한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기에 복수를 해야하지만, 그러나 그 넓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복수 말고는 답도 없다. 그녀에겐 전화가 없어 스스로 헬리콥터를 부를 수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 이동할 수도 없다. 그리고 스포일러, 그녀는 이 모두를 응징한다. 








이 영화를 안 지는 좀 되었으나 강간 때문에 뒤로 제쳐둔 영화였다. 이번에 한 리뷰를 읽고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강간 장면이 너무 걱정이 됐다. 아, 강간 장면 어떡하지, 그냥 넘길까. 뒤에 복수만 볼까. 도무지 강간 장면을 볼 자신이 없는 거다. 그래, 보다가 못보겠으면 감아버리자, 건너뛰자, 생각하는데, 영화속에서는 섹스씬도 그리고 강간씬도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 영화에서 강간을 다룰 때 그 강간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폭력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강간범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지만 강간에 집중해서 보여주질 않아, 그 점이 좋았다. (강간씬이 노골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강간전의 장면들은 고통스러우므로 시청할 시 주의를 요함. )



제니퍼는 예쁘고 아름다운 외모가 자신이 가진 자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 그것을 권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봐,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나를 보면 남자들이 좋아하잖아, 이게 바로 권력이야,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시선은 그녀를 권력자로 인식해 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여자의 외모를 권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녀는 한낱 성적대상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던 얼굴과 몸은 사실은 그녀에게 전혀 힘이 아니었던 거다. 섹시댄스를 추었기 때문에 섹스를 원하는 여자가 되어버리는 현실 앞에, 우리는 과연 예쁜 게 좋은 거지, 몸매가 착해야 해, 라는 신념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남자2는 유부남으로부터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얻어 맞아 코피가 나고 코뼈가 부러진다. 그는 바닥에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그 강간범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대 맞고 이렇게 아픈데, 주먹 한 대에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면서, 한 대 맞으면 그렇게 아파하면서, 어떻게 한 여자를 강간할 수가 있을까.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강제로 삽입을 하는 남자는 실상 주먹 한 대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인 거다. 자신의 고통은 있어서는 안되고 그러나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은건가. 강간이라는 더러운 죄를 저지른 것으로도 끔찍했지만, 그가 한 대 맞고 울부짖는 자라서 더 끔찍했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가.





˝그 사람들은 전부 섹스와 문란함 얘기만 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강간은 섹스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강간은 나쁜 섹스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강간은 아예 섹스가 아니에요. 섹스는 합의하에 이루어지고 강간은 그렇지 않죠. 그건 섹스가 아니에요. 강간범에게는 섹스일까요? 강간범은 섹스를 섹스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강간은 섹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죠. 누가 뭐래도 섹스는 무기가 될 수 있어요. (p.120)










제니퍼가 당한 강간은 끔찍한 폭력이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 그녀의 영혼은 찢어질 것 같았을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 그 고통을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강간 때문에도 그녀의 몸과 영혼은 치명타를 맞았지만, 강간을 목격하면서도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남자에 대해서는 더 치명타를 맞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뻔히 잘못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서도 못본체 하는가. 그는 이 강간의 동조자다. 그런 한편 이 모든걸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제니퍼는 애인으로부터 더한 고통에 맞닥뜨린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래서 이 사막의 별장까지 같이 왔는데, 자신을 지켜줄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자신에게 강간에 대해 입다물기를 원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자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다. 이 강간은 강간범이 한 것이며 동시에 강간범 목격자가 한짓이고, 침묵을 강요한 애인이 한 짓이다. 강간 사건이 하나 발생하기 위해서는 강간범만 있었던 게 아니다. 동조자들이 있었다.




남자들이 함께 모여 여자를 어떻게 ‘따먹고‘ ‘박아볼까‘ 이야기를 하고 ‘진도‘를 운운할 때, 이들은 성관계는 여자랑 하긴 해도 남자끼리의 감정적 유대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성 동지들에게 ˝나랑 자는 여자보다 너희들이 더 중요해˝라고 전하는 것이다. (이게 많은 남자가 어떤 여자랑 성관계를 갖는지에는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에 여자와의 성관계는 착취가 목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남자들끼리 이런 대화가 이루어질 때, 남성 청자도 남성 화자와 여자의 성관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여자에게 ‘박고 있는‘ 남자 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성 동지들이 지켜보며 서 있다. 남자가 여성 착취에 성공하면 그건 모두의 승리가 되고, 승리로 말미암아 남자끼리의 유대감이 강화되며, 이들은 여성성을 발밑에 깐 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하나가 된다.
- P198






세상에 강간이 등장하는 영화 만큼이나, 그 강간범들을 찢어 죽이는 영화들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영화속 제니퍼가 결국은 이 강간범을 다 죽여버리는 장면을 보여준 것처럼, 결국 처참하게 피흘리고 죽어갈 거라는 영화들이 같은 비율로 나온다면 어떨까. 강간 장면에 집중해 촬영하기보다 잔인한 복수에 더 집중하는 영화들이 나온다면 어떨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이 영화에 강간 장면이 나올까봐 두려웠다. 그것을 보게될까봐 두려웠다. 언젠가 남자들이 영화속 강간씬만 잘라서 공유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너무 끔찍하다. 한 쪽에겐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한쪽에겐 즐길 거리가 된다는 것이. 그 장면을 편집해서 보고 또 보고 하는 남자들은 모두 강간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강간범들에 다름 아닌가. '나는 달라, 나는 아니야, 실제로 강간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하는 말들이 핑계가 될까? 그런 강간영상을 소비하고 즐거워하면서 강간에 동조하고 있는데?


포르노도 마찬가지다. SNS 에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신고하다 보면 그 장면들은 모두 여성인 내가 보기에 끔찍한 장면들이다. 구강 성교를 하는 장면과 얼굴에 정액을 뿌려대는 그 장면들이, 나에겐 아주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런게 SNS 에 그냥 올라오다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신고를 누른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은 왜 촬영되어지고 유포되는가. 누군가는 그런 걸 즐겨 보기 때문이겠지. 같은 장면을 봐도 한쪽은 폭력적으로 느끼고 한쪽은 이걸 해보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건,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일어나는 일인가.

한 명은 강간을 하고 한 명은 못본체 하고 한 명은 침묵을 강요하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건가.

이들 모두 강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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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9-11-2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모니카 벨루치 나왔던 ‘이리버서블‘ 생각나네요.
어느 남자악당이 모니카 벨루치를 강간하는데 화면 저 끝에 어느 남자가 지나가다 강간을 봅니다.
그 사람은 망설이다 그냥 가 버립니다.
감독이 1)강간의 남성연대를 표시하려 한 건지 2)남의 일에 끼었다 손해보기 싫은 이기심을 비판하려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망설이다 그냥 간 남자‘ 때문에 그러잖아도 끔찍한 그 강간장면이 더욱 보기 괴로워지죠.

참, 한 가지 더 생각났는데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법>도 저는 고미숙 <호모 에로스>만큼 감동하며 읽었어요.

다락방 2019-11-25 08:19   좋아요 0 | URL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말씀하시는군요. 저 그 영화 개봉 당시에 극장에서 보고 엄청 우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주말에 여행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에 영화 한 편 보고 밥 먹고 헤어지자, 했었는데 영화보고 다들 너무 기분이 나빠서 밥을 안먹고 그냥 집에 갔었어요. 그 영화 촬영후 모니카 벨루치는 병원에 며칠 입원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자이므로 패쓰하고, 고미숙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주말에 읽으려고 했는데 못읽었어요. 크레마를 가지고 비행기와 지하철을 탔지만.... 한 글자도 못읽었네요. 하하하하하

심술 2019-12-01 21: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리 제목이 <돌이킬 수 없는>이었죠.

목수정은 좋아하시지 않으시는군요. 잘 기억해 뒀다가 다락방님께 또 목수정 추천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락방 2019-12-02 09:02   좋아요 0 | URL
하하 아뇨 제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까지 기억하진 않으셔도 되지요. 아하하하하하하하.
월요일이고 12월이네요. 으악 우울해져요.. ㅠㅠ

심술 2019-11-2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성의 사랑법>이 아니고 <야성의 사랑학>입니다. 실수했네요.

블랙겟타 2019-11-2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었던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에서도 <우리 의지의 반하여>에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강간도 아닌 섹스조차도 성욕의 해소를 넘어 ‘승자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주기 때문에 하기에 위의 <강간은 강간이다>의 발췌부분처럼 나쁜 섹스= 강간? 이라는 사고를 못 벗어나는 것 같아요. 전혀(!) 다름에도 그들의 시각으로는 약간 더 지나친 수준이라고 생각할테니깐요....

저도 특히 영화에서.. 감독의 좋은 의도로 만든 영화라 하더라도! (그러면 더더욱 그러면 안돼잖아!) 강간을 폭력적으로 연출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반드시 패스합니다. 어설픈 선의로 무장된 또다른 폭력이니깐요. (엄밀히 말하면 선의도 아니지..)

다락방 2019-12-02 09:04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의 말씀이 맞아요. 강간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알리려는 거야, 라는 의도라 할지라도(사실 저는 그 의도 자체도 믿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극적인 장면으로 일단 사람을 모으자, 가 더 그들의 의도에 맞는 것 같아요), 그것은 또다른 폭력이죠. 대체 그런 장면을 보여줘야 할 이유는 뭐랍니까?

강간이 섹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간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대체 언제쯤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게 될까요? 부지런히 책이 나오고 또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음에도 갈길이 멀어 보여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