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볼 때마다 재미있고 좋다는 말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사두었는데, 정작 내가 이 책을 읽게된 건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때문이었다. 보부아르는 이 책이 지식을 가진 남자가 창녀를 구원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거다. 물론 다른 책을 깐 거에 비하면 잠깐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긴 하는데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 어차피 사둔 책, 보부아르 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보자, 하고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그러니 고전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것일테다. 누군가 이 책 재미있냐, 라고 물어오면 나는 고민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게다가 의미도 있다. 남자 주인공 '래리' 는 어떤 면에서 너무 닮고 싶고 부러우니까. 내가 딱 원하는 그런 타입이다. 물론 내가 만나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은 타입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런 타입. 삶 전반에 걸쳐서는 절대 닮고 싶지 않지만, 그가 공부를 열망하고 알고 싶어하고 열심히 해서 외국어도 몇 개나 마스터하는 그 과정들에 있어서만큼은 '으윽 나도 이러고 싶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지적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아마 최근에 몸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이 책 속에서 그려내는 여성, 그 여성을 보는 편협한 시각에 대해서. 이 책속에는 다양한 생김새와 다양한 성격의 여자가 나오지만, 그러나 그 여자들 모두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여자들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한계 때문에 그런 면도 분명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중산층의 백인 남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래리'와 '이사벨'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참전한 군인이었던 래리는 참전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살면서 세속적인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계속 공부하고 싶고 삶의 진리를 알고 싶다. 이에 이사벨은 그를 설득하고자 한다.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취업을 해야 한다, 고. 계속 공부만 하고 살고싶다는 건 나태하고 책임회피라고. 그러나 래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내 대답은 이거야. 모든 미국인이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길을 따라가니까. 당신이 미처 모르고 있는 건, 공부하고 싶다는 내 욕구가 대단히 크다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레이가 큰돈을 벌겠다는 열정을 가진 것처럼 말이야. 몇 년쯤 공부를 하며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조국에 대한 배신이 되는 일일까? 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내게도 미국에 기여할 만한 무언가가 생길지도 몰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말이야. 물론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 하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적어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보다 더 궁색하게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 (p.119)



이사벨은 그런 그가 너무 답답하다. 결혼을 해야 되는데, 결혼할 남자가 공부만 하겠다고 하니 미치겠다. 자기는 파티에도 가야 하고 예쁜 옷도 입고 다녀야 하는데.



"당신은 정말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구.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남들이 하는 것들을 하고 싶단 말이야. 파티에도 가고, 춤추러도 가고 싶고, 골프도 치고 승마도 하고 싶어. 예쁜 옷도 마음껏 입고 싶고. 친구들처럼 멋진 옷을 못 입는 게 여자한테는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아? 친구들이 싫증나서 파는 헌 옷을 사서 입는 게 어떤 기분일지, 누군가 딱한 마음에서 새 옷을 선물해 주면 그것을 고마워하며 받아야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마음에 드는 헤어스타일을 하러 좋은 미용사한테 가지도 못할 거야. 전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난 싫어. 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당신이 도서관에 책이나 읽으러 가 버리면, 나더러 하루 종일 혼자 뭘 하라는 거야? 가게의 유리 진열장이나 들여다보며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뤽상부르 공원에 앉아서 애가 놀다가 다치지 않는지 보기나 하란 말이야?" (p.121)




나는 위의 래리의 입장도 밑의 이사벨 입장도 둘다 너무나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나는 래리 같은 삶을 살고 싶을지언정, 내가 만나는 남자가 래리 같은 남자라면 나 역시도 거침없이 이별을 말할 것이다. 공부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다면, 그가 먹고 살아갈 돈은 누군가가 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자신은 계속 공부를 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아, 너무 싫다. 그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래리는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돈을 상속받아 괜찮다. 다만, 이사벨이 원하는 그런 부유한 삶을 사는 데에는 못미칠 뿐. 이사벨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만 한다. 래리가 원하는 삶은 지금 래리의 형편으로 가능한데, 나 역시 그러한 형편이라면 아마 래리처럼 말하고 래리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 현재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책 읽고 여행다니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데. 책 읽고 영화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글 쓰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데.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 퇴근까지 갇혀있다가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삶은, 그 자체로 짜릿함도 없진 않지만,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좀 더 오랜 시간을 책 읽으며 살고 싶다. 물론 노력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겠지만, 래리처럼 공부에만 몰두해서 원하는 책을 읽을 수단인 외국어들도 다 배우고 싶다. 그렇지만 회사에 출퇴근 하면 퇴근 뒤에 녹초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의 내 삶이야.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공부하고 싶고 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자꾸 질문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는 내가 하고 싶은 거다.


또한 이사벨의 입장도 역시 알겠다. 나 역시 편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다. 이사벨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파티며 춤.. 같은 거 안좋아하고 골프.. 관심 없다는 게 .. 뭐 그렇지만 승마라면 좀 좋은데? 아무튼 나도 좋은 곳으로 여행 다니면서 먹고 싶은 거 맛있게 먹고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젊은 이사벨이 요구하는 삶이란 것이, 나랑 디테일은 다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사벨이 저런 얘기를 몇 년전의 한국에서 글로 쓰거나 말로 했다면 아마 남자들이 김치녀 된장녀라고 욕했겠다, 라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했다. '뭐야, 남자가 고생해서 돈 벌어오면 너는 그걸로 예쁜 옷이나 산다는 거냐?!' 하는 비난을 아마 대부분의 한국남자가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 여기서 이사벨과 나의 차이가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왜? 내가 직장에 다니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해서 회사에 나를 가둬두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내가 살고 있어. 그렇게 한달동안 일하면 통장에 잠깐이지만 월급이 똭- 꽂힌다. 나는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와인 냉장고를 채우고(요즘은 못채우고 있다. 돈이 ... 돈이.. ), 비행기를 예약한다.



내가 원하는 삶과 상대가 지향하는 삶이 다르면, 같이 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일테다. 한쪽은 공부만 하고 싶고 한쪽은 놀고만 싶은데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어울리는 한쌍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저들은 어떻게도 헤어지는 게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또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낫다고 보여진다. 나였어도 래리랑 헤어질 것이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이 달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이 래리랑 헤어지는 건, 래리가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내가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벨에게는 그것이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이 책의 초판은 1944년에 쓰여졌다. 게다가 이 책의 배경은 1940년대 전이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지금의 나와 달랐다는 거다. 여자들에게 일자리도 그리고 남자와 같은 임금도 보장되지 않았다. 여자의 삶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 여자가 부자로 살고 싶다면, 부자인 남자랑 결혼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돈이 필요하다면 아버지에게 그 다음엔 남편에게 기댔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이사벨이 래리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나와 다르다. 그 후에 이사벨은 부자 남자 '그레이'를 사귀고 결혼해서 대단한 부자로 산다. 게다가 그레이는 이사벨을 너무나 사랑해 굉장히 다정하게 잘 대해준다. 그러니까 래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까지는 나와 이사벨이 같지만, 그 후의 삶은 나와 이사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사벨은 1940년대를 살아가고 있고 나는 2019년을 살고 있으니까. 남녀 임금차이가 결코 그때보다 나아지진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일을 한다는 선택지가 내 앞에 있고 이사벨에게는 다른 남자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예쁜 옷을 마음껏 입고 싶다고 말하는 이사벨을 그려 넣은 것이 여성 혐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건 그저 이사벨이란 사람 자체의 욕망일 것이다. 게다가 남편에게 그걸 기대하고 바라는 것 역시도 여성혐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서머싯 몸이 그 시대적 배경과 여자들이 놓여있었던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서머싯 몸은 '이런 여자도 있고 이런 여자도 있지' 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단지 썼을 뿐이고, 딱히 그런 여자들에 대해 나쁜 시선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는 전무한 것. 그에게 삶을 아름답게 구성하고 삶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달려가고자 애를 쓰는 건, 남자들만의 몫이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지점인 거다, 그에게는.

쉽게 얘기하자면, 서머싯 몸 속의 소설에서 남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었지만 여자들에게는 현재만 있다는 것.



래리는 남편을 잃고 알콜 중독에 약물중독이 되어 이 남자 저 남자랑 자고 다니는 구제불능의 소피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 알았던 소피는 시를 쓰는 맑은 영혼이었다며. 이에 이사벨은 격분한다. 그렇게 막돼먹고 지저분한 여자에게 래리를 줄 순 없다고. 하아..


자, 래리가 소피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결혼하려고 한걸까? 그것은 막돼먹은 소피의 인생을 구원하고자 한 것. 이것부터가 너무 괘씸하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랑 함께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구원이 가능할거라고 믿은 것. 내가 소피였다면, 내가 아무리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내 인생을 바꿔줄 의도로 결혼하자고 한 남자에게 예스를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몸은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 남자가 매춘부를 현모양처로 바꾸는 일. 화자인 몸이 분노하는 이사벨에게 말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매춘부하고 결혼한 친구들이 있지. 한 명은 스페인 사람이고 두 명은 동양 사람인데, 전부들 아내를 현모양처로 바꿔놨다구.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줬으니 고마워서라도 잘하겠지. 게다가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으니까." (p.343)



매춘부란 무엇이고 현모양처란 무엇인가.

인생의 저 깊은 수렁에 빠진 건 매춘부이고 궁극적으로 추구할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현모양처란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해주었기에 남자에게 감사해야 하는것이 그녀들의 몫인가. 그렇다면 매춘부를 매춘부로 만드는 건 누구인가..

몸은 매춘부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여자라고 할 순 없지. 존경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술을 좋아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사람도 많아. 물론 좋은 습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 혹은 불친절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든." (p.341)



이런 몸의 말에 이사벨은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방방 뛰는데, 그러니까 이거다. 매춘부가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을 혐오하거나 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 인생은 남자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어, 그건 가능해!


이게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매춘부는 왜 매춘부다? 매춘부로부터 성을 구매하는 건 누구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들에게 일자리가 풍족하고 남녀와 같은 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면, 여자들에게도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경제권이 있었다면 여자들이 매춘부로 내몰렸을까? 참나원 어처구니가 없고요. 이러니까 보부아르 님이 제2의 성에서 까주신 겁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성매매를 하는 남자도 싫지만, 매춘부에 대해 시혜적인 시선을 가진 남자도 개역겹다 진짜. 그래봤자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보지 않는거니까.



그렇게나 망가진 여자를 비난하는 이사벨과, 그런 여자들이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남자들은 그녀들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몸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에서 가져온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으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은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27)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라보는 곳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사소한 많은 부분들이 다른 걸 이해하며 지낼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것이 선이라는 바로 그 지점으로(어쩌면 악이라도) 같아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함께 생각하는 윤리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윤리와 나의 윤리가 충돌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함께할 수 있을까.



요즘 페이드포 읽으면서 또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가득이다. 페이드포 추천사는 정희진쌤의 것인데,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 책을 언급한다. 아, 또 얼마나 포르노그라피 읽고 싶어지는지! 그러나 알다시피 그 책은 절판인 상태. 어딘가에서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게 맞긴 한건가요? 진행되고 있나요?


나는 안되겠다, 원서라도 사서 천천히 매일 한 줄씩이라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얼라리여~ 원서도 절판이여? 알라딘에서는 살 수가 없어. 나는 아마존으로 갔다. 얼라리여~ 이것은 새 책으로 구매하려면 몇 만원을 줘야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또 중고가 몇 권 나와있어? 나는 배송료 포함 2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일단!! 주문을 마쳤으나, 그러나... 그 다음은 어찌될 것인가.. 나는 매일 한 줄 읽기에 도전할 것인가. 내가 이 책을 샀다는 소식에 친구는 앞으로 밑줄 긋는 부분 공유해달라 했는데, 아아, 신이시여, 저는 그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자, 면도날로 시작한 이 페이퍼는 포르노그래피로 끝마친다. 이제 밥 때가 되었으므로. 이만총총.














그가 말한 남자는 이전에 그녀에게 두세 번 수작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적당히 거절했더랬다. - P283

"직업이야 구하면 되잖습니까."
"그게 문젭니다.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을 안 하니까요. 아무 일도 안 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아마 전쟁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 좀 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벌써 1년이나 쉬었는걸요. 그 정도면 충분하잖습니까."
- P39

이사벨은 매우 아름다웠다.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좁고 긴 스타일의 치마 밑단이 통통한 다리를 감춰 주었다. 드레스의 가슴께로 풍만한 젖가슴 라인이 도드라져 보였다. 맨살이 드러난 양팔도 통통한 편이었지만 목선은 매우 아름다웠다.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틀림없이 굉장히 아름답고, 탐나도록 매력적인 아가씨였지만, 만일 몸 관리에 신경 쓰지 않으면 보기 흉하게 뚱뚱해질 것이 분명했다. - P43

그녀는 확실히 다른 아가씨들보다 말수가 적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끝이 약간 위로 들린 조그만 코와 큰 입, 녹색이 도는 푸른 눈을 가진 재미있는 얼굴이었다. 엷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굉장히 마른 몸매라서 가슴이 남자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납작했다. - P43

"나는 내 형제들과 달리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지 않았다네. 기회는 있었지만 거절했지. 그보다는 사회에 나가고 싶었거든.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말이야. 케임브리지에 들어갔더라면 그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네. 경험 많은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 더 빨리 많은 걸 깨닫게 되지. 이끌어 줄 누군가가 없으면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어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법일세." - P58

그즈음 엘리엇의 나이는 65세였다. 이제 머리도 더 하얗게 세고 얼굴에 주름도 늘었으며 눈 아래에 살도 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변함없이 날신하고 자세도 꼿꼿하게 유지했다. 언제나 모든 생활 습관에서 절제와 적당함을 추구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세월이 자신을 유린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사람 같았다. 옷은 런던의 최고급 양복점에서 맞췄고, 머리 손질과 면도는 단골 이발사에게 맡겼으며, 최상의 컨디션과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마사지를 받았다. - P199

당시에는 여자들이 보통 낮에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그녀 역시 그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샴페인 색깔의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늘씬하고 맵시 있게 뻗어 있었다. 얼굴이 예뻐도 다리가 유일한 콤플렉스인 여자들이 많지만, 이사벨은 처녀 때 볼품없던 다리는 사라지고 이제 보기 드문 각선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에 넘치는 건강미와 쾌활함과 젊음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면, 이제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는 인공적인 기술과 육체적인 노력과 절제에서 기인한 것일 테지만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 P228

"그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앞에 안 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더라구요.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죠? 드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면 사랑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든다고. 그땐 참 냉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얘긴 것 같아요."
"래리를 보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안 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천국과도 같은 고통인걸요." - P270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욕망하고 열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그러니 남편들이 적당히 때와 장소를 봐 가면서 시시덕거리는 걸 갖고 여자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게 꼭 남자들한테만 해당된다고 할 순 없죠." - P279

이 그림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게 된 그는 돈과 지위를 가진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수잔은 그에게 독설을 퍼붓기보다는 그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 P284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슴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듯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 P313

"저는 여자들을 잘 알아요. 여자는 한 번 그렇게 망가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구요. 소피가 그렇게 된 건 원래부터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피가 래리한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조만간 헤어질 거예요. 타고난 피가 그런 애니까. 소피가 원하는 건 야수같은 남자예요. 그런 남자와 있을 때 흥분이 되니까요. 그러니 결국 야수를 찾아 나설 거예요. 래리까지 지옥으로 밀어 넣고 말걸요." - P342

우리는 하숙집에 방 두 칸을 얻어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거실로 썼죠. 일은 그만둰다고 했지만 그녀가 계속 하겠다고 했어요. 저 역시 낮에 혼자 있을 수 있으니 그 편이 좋았죠. 부엌도 맘대로 쓸 수 있어서 그녀는 출근 전에 제게 아침을 해 주고 정오에는 집에 들러 점심을 만들어 줬어요. - P426

"이제 진짜 그 사람을 잃은 거군요."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의자 등받이에 얼굴을 기댄채 흐느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숨길 수 없는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내가 전한 소식이 산산이 부숴 놓은 그 희망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를 만나면서 적어도 그가 자신의 세상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에겐 얄팍한 유대의 끈이 되어 왔다는 정도만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유대의 끈을 마침내 끊어 버림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영원한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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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11-27 14: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너무 좋아요!!!!!!
피곤한 오후인데 눈이 번쩍 뜨입니다! @@
왼쪽에 코너 하나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다락방과 함께 하는 고전 다시 읽기>

공쟝쟝 2019-11-27 21:36   좋아요 1 | URL
다락방과 함께하는 고전 뚜까패기!! ㅋㅋㅋ

공쟝쟝 2019-11-27 21:37   좋아요 0 | URL
다락방 그는 오래 전 보부아르가 철학자를 먼지로 만들어 버렸 듯 숱한 고전들을 가루가 되어 흩날리도록 두드려 부쉇다고 한다..

단발머리 2019-11-27 21:37   좋아요 1 | URL
뚜까패기,가 훨씬 낫네요!
역시 공쟝쟝님 감성~~~^^

공쟝쟝 2019-11-27 22:03   좋아요 0 | URL
감성이라뇨.... (폭력에 대한 열린 감슈성..???ㅋㅋㅋ)

다락방 2019-11-28 08:18   좋아요 1 | URL
어휴 여러분 ㅋㅋㅋㅋㅋㅋ
무슨 말씀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지들 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우 좋아하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고있다)

다 뚜까팹시다!! 으르렁-

초록별 2019-11-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을 통해 많은 분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낙입니다~~^^;
오늘 글은 피로회복제 박...스네요. 시간도 없으실 텐데 재미난 글로 한바탕 웃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연재 부탁드려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다락방 2019-11-28 08:17   좋아요 0 | URL
제 글 되게 긴데 초록별님 꼬박꼬박 잘 읽어주시네요. ㅎㅎㅎ
북플로 보면 엄청 길텐데요. 제가 너무 피씨 서재활동 하는 사람이라.. 글이 길어요. 하하하하.
즐거운 북플활동 하세요!!

비연 2019-11-28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성> 다 읽은 후 (꼭!) 이것도 읽어야지!

다락방 2019-11-28 08:16   좋아요 1 | URL
비연님, 이제 12월입니다. 한 달 남았습니다?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으하하하

비연 2019-11-28 13:12   좋아요 0 | URL
흠? 흠? 흠!!! ㅜㅜㅜㅜ 한달 남았다니. 지금 수많은 송년회를 뚫고 나름(!) 열심 노력 중입니다..(철푸덕)

jiny5677 2021-01-0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리뷰를 읽다가 블로그에 있는 페미니즘 서적 관련 리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종종 찾아올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1-01-05 08: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성주의 책 읽으며 글 쓰고 있으니 지니님 오셨을 때 읽을거리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음화화핫!!

밥이좋다 2022-01-1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미스터리세계로 인도하신 다락방님을 이책으로 다시 뵙네요. 이책도 거의 100년이 된 책이라서 요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는 남자라 쉽게(?) 받아들였지만) 내용이 많았다는 것을 다락방님 페이퍼로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