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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아킨토스 ㅣ 고블 씬 북 시리즈
박애진 지음 / 고블 / 2024년 3월
평점 :

섹스 로봇 이야기 좀 그만 써라. 대체로 천편일률적인데 개허접이기까지 해서 그렇다. 요즘 문학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거냐?
그런데 이 섹스 로봇 이야기 《히아킨토스》는 이번 SF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았다.
배경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안드로이드인 제로델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한 공작을 성추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인간인지 혹은 안드로이드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어느 쪽도 타협하지 않으려고 한다.
소설은 성직자 카이유와 신부의 시선을 따라간다. 신부는 제로델을 안드로이드라고 보는 사법대신을 시작으로 인간으로 보는 여러 귀족 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제로델이 인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만인의 연인으로 생각하며 사랑을 주었고, 같은 인간 남성에게는 없었던 위안과 존중을 얻었노라고 했다. 소설이 진행되며 카이유와 신부는 자신의 모습 또한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사랑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인간이 행하기만 한다면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인간은 뭐지? 제로델의 이음새 없는 피부는 감각을 느끼고, 그의 몸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것과 똑같이 만들어졌다. 그의 살을 들어내면 나처럼 정맥과 동맥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하마노 지히로의 《성스러운 동물성애자》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동물과 성애를 나누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한 내용이다. 책에 나온 동물성애자들은 어떤 인간보다 나았다. 파트너 동물을 나와 동등한 존재, 생명체로 존중하는 모습은 순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 감상은 SF적 요소보다는 인간관계에서의 ‘존중’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로봇이 등장하는 SF 소설은 결국 인간을 파헤치는, 누구보다 인간을 고찰하는 장르가 아닐까? 여행이 내가 사는 곳을 더 잘 알게 해 주듯이.
사람들은 상대의 의사나 기쁨을 얼마나 생각할까? 소설에서 제로델은 인간이라고 하는 귀족 부인들은 기존에 남성과 구축한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했다. 여자의 행동반경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남자, 외도하는 남자, 자기의 점잖음만 중요하고 상대가 기쁨을 느끼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 왜 외모 관리 안 하냐고 묻는 남자, 술만 마시면 개가 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 인터넷 스크롤 한 번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들이 그 귀족 부인들을 제로델만큼 존중했을까? 그런데 귀족 부인들은 제로델을 존중했을까?
소설은 작품 내에서 구체적인 사례로 나타나는 사랑의 모습에 무엇이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다는 가치판단을 하는 대신 증언을 전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읽으며 어렴풋한 느낌을 받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 독자의 몫이다.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는 무엇인지도 답을 주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기는 하나 현재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도 많이 언급된다. 동성애, 성적 지향을 스스로 택하는 것(제로델은 남자라는 젠더를 택했으나 남성적인 외모는 선호하지 않은 듯하다, 젠더퀴어로 해석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전통적인 가족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꾸려야 한다는 주장,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사법의 보수적인 태도와 편견, 남성과의 성 경험에서 남성과 달리 만족을 얻지 못하는 여성(《왜 여성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섹스를 하는가》라는 책이 떠오른다.) 모두 우리의 시대에 시의성이 있는 문제이다. 당연히 이에 관해서도 박애진은 답하지 않는다.
나는 SF 독자가 아니지만, 이 책은 중근세 유럽을 위시하는 신분제, 그리고 마리 드 라파예트의 《클레브 공작부인》 같은 도입부 덕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다. 세계관 상으로는 더 활용할 만한 특징이 적지 않다. 인간은 여러 행성에서 살고, 행성 간의 전쟁이 있었고, 겉모습을 바꾸는 일이 무척 수월하고 등등. 그러나 작품에서는 이런 세계관적 특징이 많이 활용되지 못한 듯하다. SF라는 장르에 조금 더 걸맞은 배경이 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독자로서는 이 점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SF를 잘 읽지 않는 독자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고전, 사극, 심리 소설, 인간관계를 파고드는 소설을 좋아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SF 입문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소설이 던진 질문에 관해 오래오래 살면서 나만의 답을 구하자고도 제안하고 싶다.
존중은 평생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리뷰를 대가로 제공 받았습니다.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좋은 기회 감사합니다.
죄의식이 들어올 겨를조차 없었던 촉박한 시간, 찰나이자 영원으로 타오르던 전신의 감각들, 그토록 커다란 위안, 가늠할 길 없던 기쁨. 그건 죄일 수 없었다. 그 밤, 그 절망적인 밤, 끝없던 시신들의 밤, 그를 구원한 건 인간이었다. 사랑이었다. 다만 사랑이었다. - P137
많은 경우 ‘공정하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마라, 반대하지 마라,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를 포장하는 데 쓰였다. 중립이 선택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으로 그 또한 선택이고 결정이듯, 때로 가장 비겁한 형태의 회피이듯, 원뜻 그대로의 공정 또한 오직 이론으로만 존재했다. 어느 결정을 공정하게 보느냐는 개개인의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선택이었다. - P188
자신과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P227
방대한 지식을 가진 존재이나 지식의 양이 인격을 결정짓지 않는다. 인격은 체험하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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