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L 코리아] 를 보면 샤방샤방한 분위기에 나오는 백뮤직이 있다. 지난주에 신성우 편을 보았는데, 신성우를 처음 보게 된 안영미의 마음을 표현할 때도 그 곡이 나왔다. 무슨 곡인지 잘 모르겠고 가사도 잘 못들었는데 여튼 그 분위기가 상당히 므흣므흣하고 상대에게 반한 마음을 잘 표현한다. 샤라라라라라라라~ 뭐 이런 곡인데. 여튼,


오늘 받은 문자메세지가 그랬다.


<소설이 필요할 때> 오늘 구매하시면 2,000원 신간적립금 응모권 증정



오! 백뮤직이 들려왔다. 샤라라라라라라라~ 그러나 이 책을 지르기에 앞서 신중해지도록 내 자신에게 명령한다. 기다려. 며칠 있다가 사자. 조금만 참아. 지금 사면 신용으로 사야 해, 며칠 기다리면 현금으로 살 수 있잖아. 기다려. 그리고 그때 5만원어치를 채워서 달력을 받자. 피터 래빗과 백희나 그림은 조카를 주자. 책읽는 명화는 내가 갖자. 그래 이번 달력은 삼종을 다 가지는거야! 기다려, 참아. 나는 이를 악문다.


젠장 삶은 왜이렇게 어려워. 나는 왜 맨날 이를 악물어야 해. 쓰벌.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트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어떤 노래들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러면 라디오 노래는 그대로 둔채로 나는 내가 생각한 노래를 계속 생각하는데, 오늘 아침 내가 생각한 노래는 '이아립'의 <누구도 일러주질 않았네>와 '김광진'의 <편지>였다.

출근길 내도록 편지를 생각하려니, 오래전에 보았던 토요드라마 [무동이네 집]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아마 무동이네 이모 였던가 고모 였던가...여튼 '김은정'은 '손지창'과 사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손지창은 정말 젊은 여자들 휘몰아칠 정도로 멋있었는데....뭐, 이건 그냥 넘어가고 어쨌든. 김은정은 손지창과 사귀면서 손지창이 너무 좋아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담아 편지를 보낸다. 그당시는 핸드폰이 없었던 상황. 문자메세지로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삐삐도 없었을 때다. 반드시 집전화나 손편지, 만나서 전하는 마음이 가능했다. 김은정은 그렇게 자신의 절절한 사랑을 편지에 담아 우체통에 넣는다. 

편지가 상대에게 가 닿기 까지는 며칠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김은정은 손지창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채로 손지창을 만났는데, 손지창은 김은정에게 이별을 고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던가, 하는 이유로 김은정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것. 김은정은 집에 돌아와 펑펑 운다. 그리고는 자기가 보낸 편지를 어쩌면 좋으냐고 더 운다. 그때 김은정의 동생이 언니의 사연을 알고 손지창에게 전화를 한다. 

우리언니가 보낸 편지가 곧 도착할텐데, 오빠 그거 읽지 마. 뜯지 말고 읽지 마.

손지창은 힘없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전화를 끊은 그의 손엔 이미 김은정이 보낸 편지가 들려 있었고 물론, 다 읽고난 후였다. 손지창이 김은정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그녀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던 것. 만약 김은정의 동생이 좀 더 빨리 전화했다거나, 손지창이 하루 전에 헤어지자고 했다면, 그랬다면 손지창이 김은정의 편지를 읽지 않았을 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인간의 호기심이 작동해, 편지가 더 늦게 도착했다 해도 읽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 그 사이의 시간차가 야속하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말을 적어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다.
편지가 상대에게 닿기 전, 상대는 내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별에 가슴아파하는 나는 내가 며칠전에 보낸 편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상대는 이별을 통보하고 씁쓸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내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그 안에는 사랑의 말들이 가득하다.



그 사랑의 말들을 읽었다고 해서 그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해, 내가 전에 말한 우리의 이별은 번복할게, 라고 할 수 있을까? 이별이, 번복이 될까? 이미 나는 너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혹은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 라고 말했던 게 나한테 와 닿아 가슴을 후려쳤는데, 이제와서 '너의 마음이 이렇다니 그 모든걸 없던 일로 할게' 라고 말한다 해도 그게 가능할까? 그런 말을 이미 이별을 말한 상대가 할 리도 없겠지만, 설사 한다 해도 내가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내 고백은 공중에 흩어지고 너에게 닿지 못했으며
너의 이별의 말만이 나에게 와 닿았다.

그 사이사이, 마주하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아래 곡은 그 당시 [무동이네 집] 에 삽입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던 두 곡.













사과 몇 개가 사무실 내 자리에 있다. 며칠전 회사에 사과 몇 박스가 생겼는데, 그걸 전 직원이 몇 개씩 나눠가진 것. 당연히 집에 들고 가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워 미루고만 있다가, 며칠전 오후에 배가 고파 먹었더니 너무 맛있는거다. 그래서 그냥 내 자리에 두고 배고플 때마다 먹자, 라고 생각했다. 빵보다는 사과가 나을테니, 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은 아침부터 사과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과를 씻으려 가려는 데 청소 아주머니가 바깥에 보인다. 나는 얼른 커다란 사과를 하나 더 집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아주머니, 사과 드세요. 제가 씻지 않았으니 씻어서 드셔야 해요, 라고 말씀드리며 사과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어휴 뭘 이렇게 맨날 줘요, 라고 고맙다고 하셨고, 두르고 있던 앞치마의 주머니를 벌리셨다.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계셨던 터라. 나는 그 주머니에 쏙- 사과를 넣어드렸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내 몫의 사과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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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4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05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4-11-0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바다 -별빛이 내린다.

다락방 2014-11-05 11:05   좋아요 0 | URL
아항. 맞아요. 그 가사가 별빛이 내린다 였던 것 같아요.

별빛이 내린다 샤라라 라라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낭만인생 2014-11-0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향기 가득한 글입니다.

다락방 2014-11-05 11:05   좋아요 0 | URL
어제 출근길에 지하철 안 옆자리 남자 향수 냄새가 아주 좋았습니다. 후훗

비로그인 2014-11-04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필요한 달력이 뭐죠? 말만 해요~~ ㅎㅎ
책을 다 사버리자 달력이 떴는데 살 책들이 또 생겨버렸어요 ㅠㅠ
그나저나 난 왜 백뮤직이 들려오는 문자를 못 받는거지? ㅠㅠ
편지. 저도 무지 좋아하는 노래예요^^

다락방 2014-11-05 11:39   좋아요 0 | URL
저 다 갖고 싶거든요. 음...책읽는 명화요! 그건 제 책상에 놓을거에요! ㅎㅎ 나머지 두 종류는 받아서 조카 갖다 줄거에요. 히히히히히

편지, 좋죠. 가슴에 바람이 부는 노래에요, 아른님. 흑흑.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되돌리지는 않겠소..

유부만두 2014-11-0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 나누는 다락방님.
참 예뻐요! 착한 어른이 도장 찍어드릴게요. ^^

다락방 2014-11-05 11:39   좋아요 0 | URL
착한 어른이 보다는 예쁜 어른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제게 예쁜 어른을 허락하지 않네요. ㅠㅠ

네꼬 2014-11-05 14:30   좋아요 0 | URL
예쁩니다 다락님. (참견)

다락방 2014-11-05 15:28   좋아요 0 | URL
네꼬님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4-11-0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동이네 집이라니. 전 엄청 좋아해서 보던 드라마인데 왜 저 김은정과 손지창 부분은 생각이 안 날까요???? 그런데 그 둘이 그렇게 헤어진건가요? 난 왜 기억이 안나지? ㅠㅠ 최민수와 김혜선만 생각나~~~~

다락방 2014-11-06 09:15   좋아요 0 | URL
저는 최민수와 김혜선이 생각 안나요 ㅋㅋㅋ 최민수가 무동이네 집에 나왔다니 뭔가 안어울려요 ㅋㅋㅋㅋㅋ 최유라는 생각나네요. ㅋㅋㅋㅋㅋ
그 뭣이냐, 거기에, 이재룡이 미술선생으로 나왔던거요. 그림 그릴때마다 퍼햅스 러브 틀어둬서 막내 김민희를 설레이게 했던...이재룡도 그때 멋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음식의 종류와 상관없이 음식 사진 보는 걸 즐긴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내가 원하는 식단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밥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즐겁다. 그렇다보니 여러가지 일로 지쳐있던 지난주를 보내고 맞이한 토요일, 이 책을 꺼내드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안하고 이 책을 꺼내서 아무데나 펼쳐 보았다. 이건 뭐, 음식을 이용한 점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런 사진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영어로 쓰여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정확히 저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진짜 이 사진을 보자마자 완전 너무 좋아서 울뻔했어...마치 몇해전 아주 힘들때 친구가 보내준 케빈스파이의 치즈파이를 한입 깨문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 그 치즈파이 맛이 고마워 왈칵, 눈물이 차올랐는데. 아, 저 크림 좀 보라지! 나는 커다란 포크로 크게 한 입 베어물고 싶어졌다. 뜨거운 커피나 와인과 함께여도 좋을 것이다. 한 입 베어물다가 그 맛에 놀라 연신 입에 넣고 결국은 저거 하나를 나 혼자 다 비워내고 싶어졌다. 그래, 커피보다는 와인이 낫겠다. 저걸 다 먹을 동안 와인을 마신다면 나는 아마 크게 취하겠지. 취해서, 기절해버리리라.


열여덟시간 정도를 기절해 있다 일어나면 내 모든 혈관들 틈틈이 눅진눅진 칼로리가 쌓였겠지. 자, 그럼 그 칼로리를 빼러 가자. 싸우나로 가자. 다섯시간 동안 싸우나를 들락날락 거리며 몸 안의 땀을 배출해내자. 등산 두시간으로 빼낼 수 있는 칼로리가 아닐테니.


아, 영혼이 치유되는 기분일거야. 내 마음을 어루만져줄거야, 저 넘쳐나는 크림은. 



아, 좋다 좋아. 너무 좋아서 나는 또 아무데나 펼쳐봤다. 그리고 이런 사진들을 보게 된다.










아..아름답다. 사람은 심신이 지칠수록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어야 해...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채워지는 것 같다.. 좋아..♡



















영화 《밀크》를 보면 마지막, 하비 밀크가 자신의 연인과 통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연인은 그에게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밀크는 크게 감동한다. 그 장면에서 나도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말을 든는건, 결국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얼마전에 트윗에서 주진우 기자의 글을 보았다. 이승환의 세월호 동조단식에 대한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다가 당연히, 이승환을 좋아한다는 M님 생각이 났는데, 그런 이승환의 행보를 보는 M님은 그 순간, 이승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옳다고 믿는 행동을, 나보다 먼저 더 깊이 실천해주고 있다는 데서 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자랑스러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가 이승환을 좋아하길 잘했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걸 최근에 신해철에게서 느꼈다.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좋아했고 존경했지만 사실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다. 그의 음악만을 들었고, 어릴적에 라디오를 들은 게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인데, 그의 사망후에 들려오는 그에 대한 소식은 내가 아는 것, 이상이었다. 그가 생전에 했던 말과 행동들이 자꾸만 크게 훅훅- 나를 후려 갈겨서 더 미칠것 같은 기분이 되었고, 나는 매시간,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내가 이 사람을 괜히 좋아한 게 아니야, 라는 마음. 아, 이 사람을 좋아하길 잘했어.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달라, 부터 시작해서 내 안에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차고 넘쳤다. 그의 장례식에 내 중학교 동창도 갔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도 갔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가서 국화를 한 송이 놓고자 찾아드는 걸 보면, 그는, 아주 잘 살아냈던 게 틀림없다. 나는 그가 자랑스럽다. 나는 그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말을 듣는 삶을 살겠다고, 삶의 방향을 정해놓는다.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는 계속 가방에 넣어두고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한꼭지씩 읽고 있다. 읽을수록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하게 되는건,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는 것이다.



사랑에 미래는 없지, 라고 생각하다 보니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난다. 중학교시절 주말의 명화인가 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 영화인데 제목이 기억안나.. 여자 세명이 주인공인 영화였는데, 소녀와 소녀의 엄마, 소녀의 이모가 각자 자신만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소녀의 엄마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고, 소녀는 외국인 여행객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더랬다. 그들은 서로에게 반했고,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누군가의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소년소녀의 사랑 마지막 장면에 둘이 같이 보트를 타던가 했는데, 그때 노를 젓는 사람이 통역을 해주다가 소년과 소녀가 키스를 하자 '이제는 통역이 필요없겠군' 하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사실 그보다 더 기억에 남은 건 소녀의 이모의 사랑이었다. 이모는 한 락가수를 좋아하고 있었다. 엄청 좋아해서 락가수의 공연에 찾아가는데, 가수의 가까이에서 환호하고 같이 뛰던중, 락가수의 눈에 띈다. 락가수는 그녀를 무대 위로 들어올려 같이 노래하고 같이 춤을 추고, 이모가 믿을 수 없을만큼, 그 뒤로도 얼마간 다정한 행동으로 이모의 연인이 되어준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짧았던 것이, 그 다음 공연에서 그 락가수는 다른 여자팬이 던져준 팬티를 자기 바지주머니에 접어 넣고, 그녀를 무대위로 들어올려 이모에게 했던 그대로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걸 보고 이모는 깨닫는다. 이 사랑이 끝났음을.


소녀의 소년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고, 락가수는 다른 팬과 사랑에 빠졌다. 소녀는 자신의 사랑을 잃었고 이모 역시 자신의 사랑을 잃었다. 사랑에 빠지는 현재는 존재하지만,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저 영화의 제목이 기억난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보고싶은데...저걸 처음 볼 때 내가 너무 어렸어가지고...ㅠㅠ



어제 자기전에 읽은 《사랑의 미래》는 이런 말을 내게 하고 있었다.



사랑은 무거운 생을 송두리째 들어 올리는 축제의 시간을 만나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한 시간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에너지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축제는 일시적이고,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축제는 그 안에 방탕과 폭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죽음과 맞먹는 삶의 폭발적인 낭비를 의미한다. (p.107)





오늘 출근길에는 날씨가 많이 춥더라.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지 모르는 장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머플러도 하나 사러 가야겠다. 예쁜 머플러로 사야지. 따뜻하게 목에 둘러야지.

점심에는 짜장면을 먹고 싶은데, 어쩌지. 그냥 짜장면을 먹을까. 짜장면을 먹으면 밥을 못먹고, 밥을 못먹으면 이내 허전해지는데...에라이. 짜장곱배기나 먹을까. 


삶은 어차피 짜장면이나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밥이냐를 선택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에 메세지로 내게 도착한 음악. 

사실 누군가 보내주는 음악을 잘 듣지는 않는다. 음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취향의 것이라 생각하므로. 그런데 어제는 the park 란 제목에 이끌려 들어보게 되었고, 그렇게 듣게 된 음악이 좋았다.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노래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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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4-11-0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어차피 짜장면이나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밥이냐를 선택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이 말이 마음에 닿네요...

다락방 2014-11-03 17:19   좋아요 0 | URL
네, 매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니까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거죠..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비연님.

단발머리 2014-11-0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 첫번째 크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너무너무 아름답고도 아름다워요. 찐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카하~~~
처음은 크림이요, 마지막은 짜장곱배기네요. 아름다운 시작, 푸근한 끝입니다.

다락방 2014-11-05 11:40   좋아요 0 | URL
완전 황홀하죠! 저거 진짜 같이 먹으면 소울 메이트가 될 것 같지 않아요, 단발머리님? ㅋㅋㅋㅋㅋㅋ
아 또 짜장 먹고 싶다... ㅠㅠ

Mephistopheles 2014-11-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다락방님이 자랑스러워요.

다락방 2014-11-05 11:40   좋아요 0 | URL
고..고...고맙습니다???

버벌 2014-11-0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다이어트중이에요.... 저는 지금 다이어트중이에요.. 저는 지금.. .ㅠㅠ

다락방 2014-11-06 09:19   좋아요 0 | URL
저도 다이어트 중이에요. 어제처럼, 작년처럼, 십년전처럼.............( ˝)
 
여기, 핀란드로부터 - 북위 60도에서 날아온 보통날의 기록들
김은정 글.그림, 떼무 리헬라 사진 / 라이온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글은 좋고 사진은 매우 만족스러워, 글쓴이가 보여준 핀란드의 일상 속에 나도 얼마간 섞여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음식 사진은 없나요? 음식 사진 좀 많이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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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4-11-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음식사진은 음식사진책에서-
오, 주말에 글 많이 올리셨네요. 약속 최소된 건 안타깝지만, 고맙게 읽고 갑니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발견도 감사. 지금 보니 전혀 닮지 않았는데 저는 왜 에릭 와이너 <행복의 지도>와 그 책이 헷갈렸을까요;;? 보관함에 담아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락방 2014-11-03 17:22   좋아요 0 | URL
크- 맞아요, 에르고숨님. 음식사진은 음식사진책에서, 가 진리죠.
그런데 저는 왜이렇게 낯선 나라의 여행기에서 음식사진을 찾아대는 걸까요? ㅜㅜ
에르고숨님의 이 댓글을 보고 <행복의 지도> 검색해봤는데요, 오오, 이 책 반값이네요? 저는 자연스럽게 장바구니에 풍덩- 넣습니다. 아하하하하. 지금 알라딘 달력 이벤트 시작했더라고요. 이번에 다 마음에 들어서 삼종 다 받으려고요. 피터 래빗하고 백희나 그림 달력은 조카 줘야지, 생각중이에요. 히히.

에르고숨 2014-11-03 19:41   좋아요 0 | URL
아앗, 저 그 책 아직 안 읽었어요. 높은 점수 장담 못함.
이번 달력이 다락방 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지름신의 축복을 받으셨군요.ㅋㅋ

다락방 2014-11-04 09:55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어제 급하게 살 책이 있어서 그 책과 함께 이미 주문했어요. 오늘 제 손에 들어옵니다. 으흐흐흐흐.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지만요. 하하하하하.
안그래도 땡투 하려고 보니 에르고숨님의 글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 아직 읽진 않으셨나보다, 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별점은, 제가 스스로 매겨보겠습니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해럴드는 A급 국도, B급 국도, 시골길, 산길을 택했다.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며 바르르 떨렸고, 그는 그것을 따라갔다. 낮에 걸었고, 달이 안내하면 밤에도 걸었다. 1킬로미터, 또 1킬로미터, 또 1킬로미터 물집이 심해지면 덕트 테이프로 묶었다. 자고 싶으면 잤고, 그런 뒤에 다시 일어나 걸었다. 별빛 아래를 걸었고, 부드러운 달빛 아래를 걸었다. 달은 눈썹처럼 걸려 있고, 나무줄기들은 뼈처럼 빛났다. 그는 바람과 험한 날씨를 헤치고 걸었고, 햇빛으로 표백된 하늘 밑을 걸었다. 해럴드는 자신이 평생 걷기를 기다려 온 사람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뿐이었다. (p.256)

 

 

해럴드는 오래전 같이 일한 직장 동료 '퀴니'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자신은 암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 중이고 해럴드의 생각이 났다며 작별인사를 적은 편지. 이에 해럴드는 왜 이십년간 그녀를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그녀의 쾌유를 비는 엽서를 쓴다. 그리고 우체통에 넣기 위해 걷는데, 우체통이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 놀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체통에 이 엽서를 넣고 전하는 일은, 어쩐지 지나치게 작은 일로 느껴진다. 그는 다음 우체통까지 걸어가 부치기로 하고, 그렇게 또 그 다음 우체통까지 간다. 그러다 결국, 그녀를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지금 걸어왔듯이, 계속 걸어서. 마침 배가 고파 치즈버거를 사먹기 위해 들렀던 주유소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그에게 믿음을 준다. 당신이 강하게 그녀의 회복을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그는 걷기에 적당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나왔지만, 핸드폰도 집에 두고 나왔지만, 내가 이렇게 걸어서 그녀에게 닿는다면, 그녀가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자신만의 믿음에 근거해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걷기는 단순히 그녀에게 닿고,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그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도 준다. 자연의 빛깔에 대한 신비로움도 걷기 속에 있었고, 이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고민도 들어주게 된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한발을 다른 한발 앞으로 움직이는 신체적 활동 말고도, 머릿속에 무수히 떠다니는 아주 많은 생각들을 의미했다. 그는 낯선 이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희망을 얻고 또 절망을 얻는다.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의 은밀한 욕망과 비밀을 엿듣게 되고, 또 자신도 지금 무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말하게 된다. 그의 과거와, 그의 머릿속 생각과, 그가 다른이와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는 일은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기쁨이었는데, 문득 내가 몇해전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님께 무작정 내가 힘들다고 토로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별한지 얼마 안됐었고, 어떻게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기사님께 마구 내 마음을 얘기했던 거다. 그때 기사님은 내 얘기를 다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아가씨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딱 그만큼이었던 거에요."

어떤 은밀한 얘기들, 이를테면 고민과 상처 비밀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하는 게 더 쉽다.

 

 

사람들은 우유를 사고 있거나, 차에 기름을 넣고 있거나, 심지어 편지를 부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부에서 감당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무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때로는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데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쉽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런 노력의 외로움. (p.118)

 

 

 

그런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가 사실은 삶의 진리를 고스란히 보여줄 때가 있다. 삶의 진리란 사실 크고 대단한 게 아니니까.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깨닫고 있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도 겪고 있고 깨닫고 있다. 그리고 입밖으로 그걸 내는 일은, 누군가의 대화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면에서 해럴드 프라이가 오래오래 길을 걸으며 무수히 많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내게도 고마운 일이었다.

 

 

"걷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셨군요."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냥 한 발 앞에 다른 발을 내놓으면 되는 거라고요. 하지만 본능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놀라곤 해요."

그녀는 혀로 아랫입술을 적시며, 말이 더 나와주기를 기다렸다. "먹는 것."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것도 그래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정말 어려워해요. 말하는 것도, 심지어 사랑하는 것도. 그런 게 다 어려울 수 있어요." 그녀는 해럴드가 아니라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는 것도요." 그가 말했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잘 못 주무세요?"

"늘 잘 자지는 못하죠." 그가 사과 쪽으로 또 손을 뻗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여자가 말했다. "아이들."

"네? 뭐라고 하셨죠?"

"또 다른 어려운 거요." (p.71)

 

 

그가 길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희망과 용기와 격려를 주기도 하지만, 그의 희망을 짓밟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래, 이건 안되는 거였어, 내가 간다고 퀴니의 죽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이 다리로 거기까지 걸어, 하고 주저앉게 되지만, 역시 그럴때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고 믿음에 확신을 주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해럴드는, 누군가 옳지 않은 행동,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지만, 그래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려는 이유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해럴드는 퀴니에게 닿기 위해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걷고 있듯이, 누군가는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를 향해 걷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모든 행위가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게 아닌가. 해럴드가 올거라는 믿음으로 퀴니가 기다리듯이, 퀴니에게 가기 위해 걷고 있는 해럴드를 모린이 기다리고,

 

 

"그이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나요." 그녀가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돌아오지요." 자음이 약간 뭉개진 렉스의 목소리가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주는 바람에 그녀는 즉시 안심했다. 당연히 해럴드는 돌아온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p.191)

 

 

마르티나도 자신을 떠나버린 남자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다.

 

 

"자기 물건은 다 놓고 갔어요. 개도, 정원 연장도, 심지어 새 등산화도. 그이는 걷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매일 잠을 깨면 이런 생각을 해요. 오늘은 그이가 돌아오겠지. 하지만 매일, 그이는 오지 않아요."

한동안 오직 정적만이 그녀의 말을 실어 날랐다. 해럴드는 인생이 정말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똑같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파트너의 개를 산책시킬 수도 있고, 신발을 신을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곧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일 년이 지났어요."

"모르는 일이지."

"알아요."

그녀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코를 훌쩍였다. 그러나 자신에게나 해럴드에게나 굳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타난 거예요. 버윅어폰트위드까지 걸어간다면서." 그녀가 다시 거기까지는 못 걸어간다고 할까 봐 그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아저씨 같은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있어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다리고 있어요." (p.183-184)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목적, 방향, 결국 최종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곳이 '당신' 이라면, 당신에게 닿기 위해 오늘을 버텨 내일을 맞이하고 또 그 내일로 오늘을 사는 거라면, 당신에게 닿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트리나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건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인생의 다른 재미를 놓치게 하는 독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건 아니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마르티나와 모린 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상대에게 닿기를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만추》의 탕웨이이거나 《호우시절》의 정우성인 것이다. 또한 해럴드처럼 닿아야 하는 상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닿아야 할 사람이 먼 곳에 있다면 역시 해럴드처럼 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를 타고 좋은 호텔에 묵고 그에게 닿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물리적인 거리와 육체적인 움직임이 아닌, 삶의 방식 자체가 '당신을 향해 걷는다'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에게 닿기 위해, 당신이 있는 곳을 보고 걷는 것. 이 행위는 언젠가 당신에게 닿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것이고 내 삶의 연속성을 지켜줄 것이다. 나는 당신을 보고 천천히 걸을 것이고, 걸으면서 졸리면 잠을 청할 것이며 배고프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걷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호되게 걸릴 수도 있고 열이 심하게 나서 끙끙 앓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거기에 있는 당신을 만나는 것이 결국 내 최종 목표라면, 나는 갈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에게로 걷는 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만나 함께 힘들어하고 함께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날들은 발가벗고 뒹구는 걸로 시간을 지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내 삶의 연속성이고, 이 연속성을 유지한 채로 나는 여전히, 늘 그래왔듯이 당신에게 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당신을 향해 걷는 것, 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어제는 토요일이었고, 약속이 취소된 나에겐 모처럼 아무것도 없는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이전까지의 삶이 나를 만신창이가 되게 했고, 그러므로 나는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책장을 덮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내가 주말이면 찾던 일자산으로 갔다. 일자산을 천천히 걸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내가 오로지 나만의 상념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해럴드가 그랬듯이 내가 후회할만한 과거를 떠올리며 마음껏 후회했고, 또한 내 불안한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너에게 내 불안한 미래를 함께하자고 말하긴 미안했기에, 라는 신해철의 노래 가사도 떠올리며 슬퍼졌다가 바람 소리에 귀기울였다. 숲의 화려한 색채에 감동하고, 잠깐 멈춰서서 호흡을 크게 해 숲에 가득한 풀냄새를 들이마셨다. 오래전 올림픽 공원을, 비오고 난 직후에 찾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비가 멎은 올림픽공원은 풀냄새로 가득했고, 나는 그 풀냄새 때문에 설레였으며, 그 풀냄새를 함께 맡으며 한뼘쯤 떨어진 거리에서 걷던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 설레이기도 했던 기억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두시간 동안 걸으면서도 이렇게 많은 상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당신을 향해 일상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기쁨과 축복과 행복과 또 불안과 슬픔이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를 떠올렸다. 그 책속에서 '늘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해요' 하던 것을 이 책,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에서는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하면 될까. 나는 해럴드의 고민과 생각을 물끄러미 본다. 그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머릿속 생각을 본다.

 

허투루 쓰여진 문장이 없고 여러번 밑줄을 긋고 책의 귀퉁이를 접을만큼 아름다운 책이다. 언젠가 나도 물리적으로도 당신에게 닿기 위해 걷기를 선택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땀을 흘리며 다리에 알이 박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내 삶이 당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최종적으로 내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내 선택을 내 의지로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버윅까지 간다는 것, 그저 한 발 앞에 다른 발을 내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단순성이 즐거웠다. 계속 앞으로 가기만 하면, 당연히 도착할 것이었다. (p.66)

 

 

 

 

 

녹색에도 수많은 색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해럴드는 겸손해졌다. 어떤 녹색은 짙어 거의 벨벳 같은 검은색이었으며, 어떤 녹색은 아주 옅어 노랑에 가까웠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가 햇빛을 반사했다. 어쩌면 창문이 반사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빛이 떨어지는 별처럼 떨리며 산들을 가로질렀다. 어떻게 전에는 이런 것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을까? (p.60)

그는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딛으며 계속 걸었다. 이제 자신이 느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신이 걸어온 거리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p.61)

"나도 버윅이 아주 멀다는 걸 인정해요. 또 내가 걷기 훈련도 받지 않았고, 몸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해요. 그러고 보니 내가 가능성이 없는데도 거기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나는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속에서는 포기하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도, 포기할 수가 없네요. 계속 가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 가고 있네요." (p.169)

해럴드는 자신이 털어놓은 것이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퀴니와도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그녀가 그것을 자신의 생각들 사이 어딘가에 안전하게 챙겨 둘 것이라고, 그것으로 자신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앞으로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이대며 자신에게 맞서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우정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런 우정 없이 살아온 그 모든 세월을 후회했다. (p.180)

"젊은 시절에는 이 나이가 된 사람들을 보며 인생이 다 정리되었겠거니 생각했는데, 내가 예순세 살에 이렇게 끔찍스러운 혼란에 빠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p.237)

"오, 해럴드." 그녀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254)

"늘 그리워하지요. 머릿속으로는 엘리자베스가 없다는 걸 알지만, 눈으로는 계속 보고 있어요. 유일한 차이라면 이제 고통에 익숙해졌다는 거지요. 땅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 것과 비슷해요. 처음에는 그런 구멍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계속 빠져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구멍은 계속 있지만, 구멍을 에둘러 다니게 되지요." (p.264)

그 대화가 모린에게 오래 남았다. (p.265)

그녀는 한때 퀴니 헤네시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녀는 장부를 정리했고,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기록을 했다. 몇 번 사랑을 했고, 사랑을 잃었다.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삶을 어루만졌고, 삶과 잠깐 놀았다. 하지만 삶은 미끌미끌한 놈이지. 마침내 우리는 문을 닫고, 삶을 두고 떠나야 한다. (p.385)

그녀는 아이의 공허한 머리를 들어 올리고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아이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아이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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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11-0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게도 필요한 감각예요. 계속 앞으로 걷는 느낌. 그 감각. 자꾸만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내쳐진 기분이 들곤 하는데, 그럴 땐 일단 발걸음을 내딛여야 하죠. 몸에 펌프질을 해야겠어요.

다락방 2014-11-03 17:22   좋아요 0 | URL
저는 열심히 걷고 있었는데 지금 잠깐 내동댕이쳐져서 저기 어디 깊고 어두운 곳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기분입니다, 드림아웃님. 우리 같이 펌프질해요. ㅠㅠ

치니 2014-11-0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팅이 다 날라갔었다니! 읽으면서 제가 다 억울할라 그러네요. 그런데도 이렇게 길고 충실한 리뷰를 쓰시다니, 다락방 님 정말 대단하세요. :)

다락방 2014-11-03 17:23   좋아요 0 | URL
이걸 다시 쓰면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어야 했는지..한숨만 쉬면 그나마 양반, 빡쳐빡쳐를 입에 달고 썼어요. ㅎㅎㅎㅎㅎ 한문장 쓰고 한숨 한문장 쓰고 욕... ㅠㅠ
대단은요, 무슨. 기승전결도 없는 리뷰 ㅠㅠㅠ
 
리디아의 정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13
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이복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어보고는 그냥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요즘 조카가 책을 읽는다는 동생의 말에 조카에게 줘야지 싶어 다시 꺼내 읽어보게 되었다. 아, 그런데 이 그림책이 이렇게 좋은 책이었던가, 왜 예전에 읽을 땐 미처 몰랐던가, 하고 감탄했다.

 

리디아의 아버지는 직업을 잃고 힘든 상황, 리디아는 당분간 외삼촌 집에서 살기로 한다. 외삼촌은 빵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리디아는 빵 만들기를 조금씩 배우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원예일에 몰두한다.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옮겨 심는등의 일들을. 외삼촌을 웃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한 리디아는 어느날 외삼촌 집 옥상의 버려지고 낡은 공간들을 본다. 아, 바로 여기다. 이곳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외삼촌을 웃게 만들어야지. 그날부터 리디아는 그 옥상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가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렇게 황폐했던 공간이,

 

 

 

 

이렇게 멋진 정원으로 완성된다.

 

 

 

 

 

외삼촌은 비로소 웃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외삼촌을 웃게 한 이 일이, 리디아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나는 크게 만족스러웠다. 리디아는 싹을 틔우고 꽃을 가꾸는 일에 크게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 일을 사랑한다. 빵을 굽는 법을 외삼촌으로부터 배우지만, 그를 웃게 하기 위해 선택한 일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어제도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자신이 먹을 밥을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을. 내가 혼자 오롯이 설 수 있어야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행복을 줄 수 있다.

 

이 책속의 리디아가 외삼촌을 웃게 하기 위해 맛있는 빵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든가, 춤과 노래를 배우려고 시도했다면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디아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고, 그래서 가장 잘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웃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걸 잘하는 거, 그게 방법인 것이다.

 

 

이 책속의 내용은 리디아가 보내는 편지로 채워진다. 읽기에 나쁘지 않고 그림도 마음에 든다. 편지라서 읽기에 더 수월하지 않은가 싶다.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언제나 여유롭고 행복한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지독한 가난 속에 놓여지고 어떤 아이들은 자라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지나치게 적기도 하다. 리디아는 실직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시절의 일부를 외삼촌네 집에서 보내야 했다. 이런 아이가, 실제로, 있는 것을,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그림책이 생겨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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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4-11-0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랑하는 그림책 중 한권입니다. 삼촌이 리디아를 꺼안을 때 그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앞표정을 상상하게 할때...아..눈물나와요. ^^;

새아의서재 2014-11-0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랑 <도서관>이란 책도 함께.. ^^

다락방 2014-11-03 17:27   좋아요 0 | URL
저는 <도서관>은 막 좋진 않았는데 이 책은 참 좋습니다, 달걀부인님. 처음엔 리디아의 아버지가 실직하고 외삼촌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요.. 흑흑 ㅠㅠ

마노아 2014-11-0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 그림책이에요. 다락방님도 좋아하는 책이 되어서 또 좋아요.^^

다락방 2014-11-03 17:28   좋아요 0 | URL
무려 마노아님 내 인생의 책입니까!! ㅎㅎ
처음 읽을 때는 그렇게 좋진 않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 책 참 좋아요, 마노아님.
저도 이제 그림책 보는 눈이 좀 생긴걸까요? ㅎㅎ

파란놀 2014-11-03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두고두고 되읽는 예쁜 그림책이에요. 그림책은 아이들이 새롭게 읽어 주기에 더욱 즐겁게 다시 돌아볼 수 있구나 싶기도 해요.

다락방 2014-11-03 17:30   좋아요 0 | URL
조카도 이 책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건 또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혜윰 2014-11-03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비드스몰의 그림이 전 참 좋아요^^
이 책의 경우 부부가 함께 써서 그런가 어쨌든 저도 좋아하는 그림책.

다락방 2014-11-03 17:31   좋아요 0 | URL
아, 이게 부부가 함께 쓴 책이에요? 제가 그림책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지식이 전무한 사람입니다. 뭐 다른 거에 대해서도 딱히 지식이 있진 않지만요. ㅋㅋ 그렇군요, 부부가 쓴 책.
참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렇게혜윰님.

2014-11-0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4-11-04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버랜드 시리즈는 꽤 봤는데, 이 책은 처음이네요.
그림이 예쁜데다 감동적인 이야기라니, 제가 먼저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4-11-04 09:5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이 책은 참 좋습니다.
헤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