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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아니 에르노'의 이 책을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불편해했던가를 나는 기억한다. 책의 어떤 문장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지나치게 집착에 쩔어있던' 여자였음을 기억하고 있었고, '지나치게 솔직했으므로' 읽기에 불편했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던 터다. 또한, '이렇게 솔직하게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앞으로 내가 또 읽을 것 같진 않아' 라고 생각했던 것도 역시 기억한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책장에 꽂힌 이 책의 책등을 볼 때마다 '언젠가 조카가 아주 흠뻑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이 책을 건네줘야지' 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광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집착에 쩔어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점이 사랑에 푹빠진 여자가 느끼는 바로 그대로임을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처럼 집착이 심하진 않지만, 사랑에 아주 흠뻑 빠진다면 아마도 그녀처럼 느끼게 될지도 몰라, 하고. 그러니 훗날 사랑에 빠지게 될 나의 조카에게 이 책을 건넨다면, 이 책은 조카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 어젯밤에는 책장 앞에 서서,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시' 읽어보자. '다시' 읽는 아니 에르노는 어떨까. 그때처럼 내게 '여전히' 불편한 느낌을 줄까, 아니면 이 책은 완전히 새로운 다른 책으로 내게 올까. 책을 두 번 읽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의 분량이 얇은 만큼, 한번 해보자 싶었다. 그리고 책을 펼치자마자, 아! 하고 놀랐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넑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p.11-12)
미숙이랑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크게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간신히 회사에 앉아있는 일들의 연속이었음을. 중요한 업무를 업무시간 내에 하는 것조차 불편했음을. 누군가를 '너무' 혹은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이, 우리의 이성을 얼마나 앗아가는지를. 메세지를, 전화를, 이메일을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는지를. 그리고 보낼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고심하는 것조차도. 또한 보내는 시기 조차도 지금이면 될까, 망설이던 순간들을.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는 마치 뇌가 혹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던 내가 없어졌고, 재치있다는 말을 듣던 내가 없어졌다.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 하며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까지 저질렀고, 말문이 막히는 일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의 나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행동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그 자체였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저 한줄 한줄이 다 내 얘기였다. 내 얘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내 얘기이며 동시에 지독하게 사랑에 빠진 모든 여자들의 얘기였다. 아니 에르노는 그저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글을 써냈을 뿐이었다. 지금 내가 읽는 아니 에르노는, 지나치게 솔직해셔 불편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고스란히 다시 해주는 작가였다.
아, 아니 에르노.
이 책을 쓸 당시의 아니 에르노는 이미 십년 이상의 결혼 생활을 한 뒤였고, 다 자란 아이들이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었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나이가 많다거나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멀리 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나 불륜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멀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그대로 사랑했고 또한 그런 자신에게 솔직했다. 아이들에게도 애인의 존재를 알리고 애인을 만나는 동안에는 아이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음을 또한 솔직하게 피력했다.
*『마리 클레르』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젊은이들은 이혼했거나 별거중인 어머니가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 가차없이 비난하고 있다. 한 소녀는 원망에 가득 찬 말투로 "엄마의 애인은 엄마가 허황된 꿈만 꾸게 만들어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로운 엄마에게 그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이 있을까? (p.22 원주)
나는 내 자신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원한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며, 자신을 가장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이라 믿는다. 그런 면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를 가장 잘 해낸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관찰한 사람. 물론 그녀가 계속 기다리고 신경을 썼던 사람은 그녀의 애인이지만, 만약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 사랑 역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그대로 하도록 두었다. 그 어떠한 핑계나 변명도 그녀에겐 필요 없었다.
사실, 그녀가 사랑한 그 남자가 그다지 '가치있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가치'때문에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그를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이 책속에서 만나는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읽는 내가(혹은 제삼자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시간을 그에게 집중한다. 그를 만날 때는 물론이며 그를 만나고 있지 않은 더 많은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는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p.17)
언젠가 나는 내가 좋아한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를 툭- 치면 당신에 대한 기억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다'고. 아, 이런 나와 아니 에르노가 대체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그 사람과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오는 것일 뿐, 나 스스로 애써 그런 것들을 찾아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이전에 즐기던 독서나 외출 따위의 모든 활동을 자제했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나는 상사가 요구하는 시간 외 근무를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p.34-35)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어버린 나는 일단 생각 자체가 불가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책을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혹여라도 책을 읽게되면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를 만나도, 텔레비젼을 보고 있어도, 나는 오직 내 옆에 있지 않은 사람을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마치 '여차하면 튀어나갈 수' 있는 마음의 상태였던 것 같다. 아, 사랑에 빠진 여자의 육체는 더이상 제것이 아니다. 의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러니 이 무너진 일상을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간혹 그 고통과 또 앞으로 다가오게 될 더 큰 고통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그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자, 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일은 나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고민을, 나처럼, 아니 에르노가 했다. 아니, 아니 에르노처럼, 내가 했다.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지금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특권일 수도 있는 질투 때문에 미칠 듯이 그 사람과 끝내버리기를 원하는 현재의 상황이.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 의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떠나는 바로 그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p.39)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게 얼마나 찌질한 면이 있는지를 비로소 맞닥뜨리게 된다. 나는 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가, 다만 쿨한척 하는 사람이 될 뿐임을 제대로 알게 된다.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여자가 그러한 것처럼, 집착하고 질투하며 신경질 적인 여자가 된다. 다만, 그런 것들을 상대가 보고 겪게 되는 상황이 끔찍할 것이라 짐작해, 내 의지로 내 마음을 좀 다스려보고자 노력할 뿐이다.
한시간도 채 못되는 독서, 책장을 몇장 넘기지 않고 끝나는 이 '짧은' 독서에서, 나는 사랑에 아주 단단히 빠진 여자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아니, 들켜버리고 만다. 사랑에 빠진 자신이 아주 지랄스럽게 느껴진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사랑에 빠졌다면 지랄스러운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