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영어 선생님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며 이 영화의 줄거리를 수업시간에 얘기해 주었었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비디오로 나왔을 때 친구들이랑 봤는데, 오, 재미 없었어... 이게 엄청 흥행을 했던 영화였고, 데미 무어의 인기도 엄청 올라갔었는데, 그런데 재미가 없네? 하고는 친구들하고 실망하며, 친구의 사촌언니가 추천한 영화 《더티 댄싱》을 그 다음에 함께 봤었다. 오오, 더티 댄싱은 재미있다, 너무 재미잇어 나는 완전 정신줄 놓고 몇 번이나 반복해봤으며, ost 를 달달 외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랑과 영혼》을 몇 해 전에(아마도 2-3년전쯤) 텔레비젼을 통해 다시 보게 됐는데, 그 때는 너무 재미있는 거다. 아, 이 영화를 내가 너무 어릴 때 봐서 재미가 없었던건가, 이거 왜이렇게 재미있지? 하고 엉엉 울면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지난 주말,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밤, 채널을 돌리다가 이 영화를 또 보게 됐다. 내 옆에는 남동생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뭐랄까, 홀린 듯이 보면서 이 영화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중간 지점부터 봤는데, 오다메(우피 골드버그)가 칼(토니 골드윈)이 부정한 방법으로 갖게 된 돈을 빼돌리는 부분 부터였다. 칼은 돈세탁 하는 걸 자신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샘(패트릭 스웨이지)에게 들켜 샘을 죽이게 되는데, 이에 억울한 영혼인 샘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자신의 애인인 몰리(데미 무어) 곁을 맴돌며 그녀를 그리워하고 또 지키고자 한다. 결국 복수에도 성공하고 그녀를 지키는데도 성공한 그의 앞에 하늘에서 한줄기 빛을 쏴준다. 그가 이제 하늘에 올라갈 시간이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영혼인 샘은 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아, 그 장면 보는데 너무 애틋한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작별인사 하는거,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발걸음이 안떨어질까.... 한껏 감상에 젖어서 나도 모르게 입밖에 내어 말했다. 


마침 데미 무어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샘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디토'라고 말하며 이별을 하고 있었다. 아 애절해 ㅠㅠ



다락방: 야, 사랑하는 사람 두고 얼마나 발걸음이 안떨어질까. 올라가긴 가야되는데 얼마나 가기 힘들까..아 너무 애틋하네.

남동생: 저 여자는 저렇게 남자 보내고 또다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다락방: 어.

남동생: 백프로지!

다락방: 당연하지. 또하지.

남동생: 그럴 거야.

다락방: 근데, 수시로 샘 생각은 나겠지. 

남동생: 그렇겠지? 싸워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저렇게 헤어졌으니.

다락방: 응. 다른 사랑은 할 수 있겠지만, 저런 남자를 어떻게 잊어...



그렇게 우리의 밤은 깊어갔던 것이었다.........



아, 대화를 나누면서 뭔가 함께 본다는 거 너무 좋으네.. 뉴스를 함께 보는 것만큼 영화를 함께 보는 것도 좋구나. 토요일에 사주 보러 다녀왔는데, 내가 이번 해에 결혼하고 싶어한다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결혼하고 싶은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생....-0-




토요일에는 친구랑 사주를 보러 다녀왔다. 친구의 사주를 보면서 선생님은 친구에게 여행이 얼마나 좋은지를 얘기하셨다. 친구에게 여행은 정말 좋은 거라고, 나에게 여행이 좋은 것보다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거였다. 오! 친구와 나는 함께 여행을 다니는 여행친구인데, 우리 둘이 여행가는 게 다른 누구와 가는 것보다 제일 좋아서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친구는 젖은 흙이고 나는 마른 흙이라 서로를 귀찮게 하지도 않고 좋을거라고, 게다가 친구에게는 혼자 하는 여행보다 동행이 함께하는 여행이 필요한데, 내가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된다는 거였다. 후훗. 우리가 늘상 같이 다니는 이유가 있었군. 나로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이 친구랑 가는 게 좋을거라고. 괜히 내가 이 친구랑 다니는 게 아니었구만. 그러면서 선생님은 여행지도 각자에게 맞는 곳이 따로 있는데, 친구에게는 캐나다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유럽이라고 하셨다. 캐나다랑 유럽이 좋다,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어떨까 싶어 '저는 어디가 좋아요?' 물으니, 선생님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락방 씨는 어디든 다 좋고 다 잘맞아요.



이러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딜 가도 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 넘나 짱인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역시 그렇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그러니까 나 스스로도 되게 그렇게 느꼈던 게, 지난번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넘나 추워 볼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아 근데 내가 여기 안왔으면 이런 날씨 어떻게 알것이며, 저 얼음 바다를 어떻게 봤겠어?' 라면서 막 신났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이 조증의 연속인가 싶을 정도로 신났는데, 지난 호치민 여행에서는 중간에 더위를 먹어서 점심을 한 숟가락 먹고 더이상 먹지 못해 호텔에 들어가 혼자 쉬었던 시간이 있었다. 이 때에도 나는 '아 동남아 더워서 이제 못오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스스로 나도 모르게, '아, 이렇게 더운 나라에 오면 씐나서 돌아다니기 보다는, 중간에 자꾸 찬 거 마시고 찬바람 쐬고 하면서 쉬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렇게 해야한다는 걸 또 하나 배우네' 라고 했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반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어쩜 이렇게 생각하지? 동행은 호치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동남아랑 안맞는 것 같아' 라고 했는데, 나는 '중간에 쉬어주기만 하면 더 좋은 여행이 되겠네' 이랬던 것. 그러니까 어디다 데려다 놔도 적응을 하고 뭐랄까, 나름의 장점을 찾아내어 막 씐나하는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사주에도 어딜 가도 좋다고 나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져! ♡.♡ (내가 나한테 반함)




토요일에 친구랑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안산 여동생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책을 좀 읽다가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고, 잠깐 멍때리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며 '여기 가려면 중앙역에서 내려야 해요 안산 역에서 내려야 해요?' 묻는다. 그가 보여준 카톡 창에는 도로명 주소 하나가 찍혀 있었다. 주소에 '고잔동'이 되어 있길래, '고잔동 이니까 고잔역 아닐까요?' 라고 묻고는, 어떤 역인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다가, 아 네이버 길찾기! 하고는 도착지에 그 주소를 그대로 넣었다. 그리고 수단으로는 '대중교통'을 선택하고. 그랬더니 샤라라랑~ '중앙역' 이라고 나온다. 내가 찾는 과정을 다 보고 있던 청년에게 그 결과를 내어보이며, 중앙역에서 내리면 되겠네요, 했더니,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뭔가 나의 똑똑함에 내가 반해서, 아아, 나는 진짜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나구나, 하고는 또 너무 씐났는데, 잠시 후 그 청년은 다시 "고맙습니다" 하고는 꾸벅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네, 그러고 같이 고개를 숙였더랬다. 아, 나는 너무 똑똑해, 나는 너무 현명해, 문제 해결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 지혜로워~ 하면서 스스로에게 또 반해가지고 있는데, 어느틈에 지하철은 중앙역에 닿았다. 내 옆자리 청년은 내리려고 일어서서는 출입문 앞에 가 섰는데, 그러면서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또 고개를 숙여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게 아닌가! 너무 좋고 웃겨가지고 나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줬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순간 나는, '이것은 그린라이트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뭘 저렇게 자꾸 고마워해, 나한테 뻑갔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뻘건 립스틱 바른 여자가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고 '어떻게 저런 멋진 여자가 다있지' 세상 놀랐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명함을 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생각하다가, 아아, 그렇지만 저 청년과 나 사이에는 한 이십년 정도의 나이차이가 있을 것 같아서...관뒀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꼬꼬마 청년아, 살면서 나같은 여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렴, 이런 여자 흔치 않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살 나의 조카는 태권도 학원을 다니는데, 그 태권도 학원과 같은 빌딩에 조카가 다니는 미술학원도 있다고 한다. 조카가 미술 학원을 갔다가 중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는데, 태권도 사범님을 똭- 만났단다. 조카는 반갑게 사범님~ 하고 인사를 했는데, 사범님은 조카에게 어딜 가냐 물었고, 조카는 화장실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카가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사범님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조카의 손을 잡고 다시 미술학원까지 데려다 줬다는 거다. 아아, 너무 멋져... 너무 자상하다. 이 얘기를 씐나서 조카가 했다는데, 여동생은 다음날 사범님에게, 선생님은 나이도 어린데 어쩌면 그렇게 어린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냐 물었다는데, 이 사범님은 말그대로 굉장히 젊고, 이번 해에 처음으로 태권도 선생님을 하는 것이며, 나의 조카가 자신의 첫 제자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각별히 생각한다는데, 아아, 그렇게 젊고 다정한 선생님이라니 너무 멋져, 게다가 나도 지난번에 조카 만나러 갔다가 사범님 봤는데 진짜 완전 잘생겨서(송승헌을 닮았다) 기억하고 있었던 바, 여동생으로부터 이 에피소드를 듣고는 말했다.


"사범님한테 안정적 직업을 갖고 있는 열네살 연상의 여자는 어떤지 물어봐봐."


여동생은 빵터졌고, 엄마는 내게 '너는 니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냐?' 물으셨다 ㅋㅋㅋㅋㅋㅋ어, 안정적이잖아? 했더니 엄마는 '너 그만둔다고 맨날 그러는데 그게 뭐가 안정적이냐' 이러고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커플이 나의 소개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내게 소개팅을 제안했더랬다. 자신도 나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것. 처음엔 '어 그래' 라고 했다가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그 남자 안정적 돈벌이는 하고 있니?' 그는 돈을 벌고 있다고 했지만 뭔가 안정적인 것 같지 않아서, 굳이 내가 그런 남자를 뭐하러 만나나 싶어 '그냥 술친구로 소개시켜줘' 했더랬다. 그런데 이것도 딱히 필요가 없는 거다. 나는 혼자 와인 홀짝이면서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고, 지구본에서 나라 찾아보고 이러는 게 세상 씐나는데, 뭐하러 내 나이 또래의 남자를 만나서 굳이 술을 마시나, 그게 딱히 지금보다 '더'즐거울 것 같진 않은데, 빡칠 일이나 생기겠지....하고는 말았는데, 

이 얘기를 회사의 여자동료에게 하니, 그 여자동료가 그런다.


"차장님이 뭐하러 남자를 소개 받아요. 소개팅 대신에 갖고 싶었던 가방 있으면 그거나 사달라고 해요."


하는 거다. 오오, 맞네.


"그러게? 쓸데없이 남자 소개 받느니 멀버리 백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네? 그게 나를 더 즐겁게 하겠네?"


오... 멋진 깨달음이다. 내가 이렇게 스스로 혼자 즐거운데, 여기에 괜히 남자 하나 만나가지고 스트레스 받느니, 예쁜 가방이나 들고다니는 게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남자 대신 가방! >.<





그나저나 내가 지난 주에 알라딘에서 네 박스를 주문했다고 말했던가.... 우산 네 개가 내게로 오고있다.... 그러면 총 다섯개가 된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므로 나는 올해, 더이상은, 정말로, 책을 사지 않도록 하겠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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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5-2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 청년 훈훈하네요 ㅋ
그나저나 4박스라니.. 락방님. 철푸닥.

다락방 2017-05-22 09:03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들은 내년이나 내후년에 배송되어서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집에 읽을 책이 쌓여 있어서요...Orz

transient-guest 2017-05-24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쌓아놓고 읽다가 못 읽은 책은 나중에 은퇴하면 읽기로 했습니다. ㅎㅎ 조금 시골로 가서 살고 싶네요.

다락방 2017-05-24 08:01   좋아요 0 | URL
저도 자연속에 파묻히면 허구헌날 책읽어서 쌓아둔 책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생각합니다...그럴 수 ... 있겠지요? 하하하하하

transient-guest 2017-05-24 08:02   좋아요 0 | URL
결론은 농장으로 ㅎㅎㄹ

다락방 2017-05-24 08:04   좋아요 0 | URL
농장에 가면 농장주도 있고 책도 읽을 수 있고...........다 해결되는 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즈음의 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남동생, 조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숨쉬듯 자연스럽고 또 그들로부터 그 말을 듣는 것도 그러한데, 왜 연애할 때 애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말을 해버리는 순간 내가 약자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나는 내가 사랑에 인색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랑이란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도무지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을 때, 그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서운함이 아니라 '화'가 날 때,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서 관계를 유지시키는걸까? 그 화가 온통 나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일상을 유지하는걸까?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 계속해나가는 걸까?


보통 부정적인 감정, 이를테면 우울함이라든가 슬픔, 화 같은 것들은,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옅어지기 마련인데, 지독한 화는 자고 일어나서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내게 기쁨과 안정만 선사하진 않는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상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간혹 부정적 감정을 주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다들 어떻게 견디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걸까?


어제 SNS 에서 정희진 의 사랑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였고, 강의를 옮겨온 거였다. 일단 링크하겠다.


“사랑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마침 정희진의 《낯선 시선》을 읽는 중이었다. 소설은 못읽겠다 싶어 부랴부랴 고른 책이었다. 오호라, 어디 읽어보자 하고 저 기사를 읽었는데, 와, 정말 너무 좋은 거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저는 밀당을 아주 싫어합니다. 일단, 밀당의 전제는, 더 사랑하는 쪽이 더 헌신하는 쪽이 약자라는 거죠. 연애에서'조차' 권력자가 되고 싶은 거죠. (중략)

제가 밀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노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약간, '저질 권력투쟁'이라고 할까요? 

(중략)

밀당에 능해서 이룬 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어요? (기사中)



친한 친구들과 밀당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연애에 있어서 밀당은 필요한가, 하는 거였는데, 친구는 그때 내게 '난 대체 밀당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랬다. 나 역시도 밀당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해야하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밀당이 필요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굳이 밀당 같은 거 에너지 소모 하면서 할 필요 없지 않나?



정희진 쌤 강의를 들으면서도 느낀건데, 정희진 쌤은 '무지한' 남자를 엄청 싫어한다는 느낌이 든다. 해서, '무식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강의중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장 보니 빵터진 것.



명언이 있어요.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어서 혹은 무식해서다'. 말 많은 남자가 훨씬 낫습니다. 말 없는 남자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기사中)



물론 말 많이 한다고 해서 화제가 풍부하거나 유식한 남자인 것도 아니다. 입만 열면 개소리를 나불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지난번 회식 생각난다. 회식 중에 소주회사 판촉하는 여자직원이 와서 '우리 소주를 시키면 선물을 주겠다'고 하니까, 남자 부장이 예쁘다고 환호하며 '우리한테 술 한잔씩 다 따라줘요' 이러는 거다. 아 씨발.. 이게 지금 뭔소리야. 그 분은 정말 따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부장에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 분이 우리 술을 왜 따라요?" 하고는 그 분께 "괜찮아요, 따르지 마세요" 했더랬다. 아 딥빡침이...입을 다물어야 할 때를 아는 자는 얼마나 소중한가. 입에서 똥이 나온다 진짜.



그리고 이 모든 강의의 핵심은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연애상담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미 상담이 필요한 상태라면, 사랑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면 상담이 필요 없죠. 또 상담을 해 봤자, 자신이 변하든 상대가 변하든 해야 하는데, 그게 상담으로 가능한가요? 자기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저도 연애 상담을 많이 받는데, 실은 정보를 제공할 뿐이에요. 좋게 끝내고 싶다? 좋으면 왜 끝나겠어요? 상대방의 진심? 그런 건 없어요. 모든 것은 행위가 말해줍니다. 행위로만 판단하면, 의외로 인생이 편해집니다. 쓸데없는 기대와 고민이 사라지니까요. (기사 中)



아... 뭔가 진짜 훅 들어오는 말이지 않은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좋으면 그게 왜 끝나나... 행위가 말해준다. 그래, 팩트는 그 '행위'에 있지 않은가. 행위를 엄연히 저질러놓고 거기다 대고 왜그랬을까를 고민하는 건..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아- 행위로만 판단하면 인생이 편하진다는 데 내가 적극 동의하지만, 그렇지만, 아아, 또,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 행위로만 판단하면 결정이 쉬워지지만, 그런데, 거기에 나의 감정이란 것이 섞여 버리니까, 그래서 어려운 거잖아 ㅠㅠ

안되는 줄 아는데, 그래서 놓자니 너무 좋은데... 막 이렇게 되는 거잖아??? 어휴...








아무튼 이 훌륭한 글을 읽고 너무 좋아서 출력도 해서 읽고(이러면 안되는건가??) 밑줄도 긋고, 그래, 사랑을 공부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간 내가 사랑을 넘치게 가진 사람이었고 또 표현도 잘하는 사람이어서, 사랑에 대해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직까지도 사랑은 직접 빠져가며 몸으로 부딪쳐가며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그래 공부해보자, 공부가 어떻게든 도움이 될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는 사랑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고, 잘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책도 어제 주문했고(응?), 또, 이 시대 최고의 책, '이유경'의 《잘 지내나요?》를 펼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인 59페이지에서부터 65페이지까지를 읽었다. 훌륭한 책이라는 것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아직 이 책 안읽은 분들이라면, 강하게 일독을 권한다.


















나는 사실 《낯선 시선》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건데...

내가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여러 명의 강의를 들어봤지만, 정희진 쌤 강의가 제일 좋았다. 들을 때마다 사고가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확- 들었던 거다.

이즈음의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기분으로 소설 읽었다가 젖은 휴지처럼 널브러질까봐, 정희진 쌤 책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한없이 축 가라앉지 말고, 똘망똘망 깨어있자! 하는 기분으로.

아..멋져..... 누가? 내가!

나는 자꾸 나를 제정신에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줄 놓지말자, 다짐하고, 해결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자, 하는 것이다.



















역시나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짚어주는데, 마지막 부분의 '배려'에 대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 광고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름 문제의식을 느끼고 위원회와 인권 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마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p.284-285)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p.286-287)




진짜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다.




저 많은 문장들은 밑에 밑줄긋기로 첨부하도록 하겠다. 첨부하는 틈틈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고민도 좀 해보고. 


이 책을 출근하는 도중 지하철안에서 다 읽을 것 같아, 다음 책은 뭘로 할까, 책장앞에서 고민하느라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왔다. 으이크, 평소보다 늦은 지하철을 타겠네, 했는데, 정작 책은 고르지 못한 채로 그냥 나왔으며, 한참을 서성이느라 지하철도 늦은 걸 탔다. 회사가서 골라보자, 내심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회사에도 책이 많이 있다는 뜻...이 맞다. 킁.



여기나 저기나 안읽은 책들이 쌓여있어. 아하하하하.

근데 어제 막 책 또 샀고..

우산 네 개 받는다...

-0-




모든 인식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앎은 그 과정 자체다. 짧은 글도 교차 확인이 필수적인데, 대조해서 점검할 다른 지식이 없다면? "국사가 어떻게 다양성이 가능하냐?" 라는 국사학자의 말은 정치인의 제스처라면 모를까, 지식인으로서 놀랄 만한 발언이다. 지식은 가르치는(‘주입‘)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합의 과정이다. 다양성은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p.35)

유명 인사인데 잦은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출판사 관계자와 통화중에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했더니, 남성인 그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선생님은 한참 모르시네. 우리나라는요, 병역만 아니면 다 컴백해요. 무슨 일을 저질렀어도 병역(비리)만 아니면 됩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큰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승준 봐요. 지금 벌써 몇 년째예요? 그 사람이요? 1년 안데 다시 책 냅니다. 두고 보세요." (p.37)

특권층의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부랴부랴 ‘국민은 모두 병사‘라며 국민개병(皆兵) 제도를 실시했다. 이는 국민의 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남성들은 신분과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환상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병역이 공평하기 시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병역과 관련해서 국민은 3등분 된다. 군대에 안 가는 사람, 가기 싫은데 가야 하는 사람, 못 가는 사람(여성, 장애인……). 특히 ‘못 가는 사람‘은 비(非)국민으로서 배제된 것인데 마치 면제된 것처럼 간주된다. 평등은 이 세 그룹 사이의 관계 분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병역 비리 논란은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 즉 그야 하는 남성과 안 가는 남성들 사이의 문제로 축소된다. (p.39)

분노의 이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한 사회의 성숙도와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다.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가 압도적이고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혐오 현상이다. 특히 다른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소하게 취급되기 쉽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말대로 "군대 문제만 아니면 다 용서되는" 경향은 군대 비리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자숙의 기간‘과 별도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두 번째 기회‘는 중요하다. 주가 조작, 불량 식품 생산, 논문 표절, 배우자 구타 같은 이유로 ‘13년 동안‘ 사회 활동, 아니 입국을 막는 경우가 있는가.
똑같은 잘못을 해도 매장당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이와 관련한 억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황교안 씨는 군대에 가지 않고도 승승장구해 왔다. 그는 가정 폭력 옹호 발언, 공안 검사 경력까지 ‘청문회 비리 종합 세트‘에 새로운 목록을 추가했다. (p.39-40)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p.51)

우리는 상대는커녕 자신조차 모른다. 우리가 강대국을 이용한다는 자신감은 부풀려진 자아, 망상적 자기애, 도취에 가까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관은 강자를 이용하려는 약자의 자세가 아니라 강자에 대한 동일시 욕망, 허세와 착각에서 나온다. 분명한 점은, 강자는 이러한 약자의 자기 분열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60)

이즈음 배우 신성일 씨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그의 인생은 개인사라 치고, 그가 문제의 핵심을 요약해주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독립된, 개별적 인격체다. 사랑은 결혼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p.62)

특히 ‘여성 혐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성 혐오라는 대칭적 용어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혐 대 남현‘이라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분법은 A와 not A라는 타자화의 문법으로, 평등으로 여겨지기 쉬운 속임수다. 미소지니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미소지니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기 힘든 단어다.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 남성 위주 사회는 너무 오래된 역사라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남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를 자각하고 여성이 자신의 이중 노동,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혐오인가? (p.83)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게급, 지식 자원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몸 상태가 다른 노숙인 같은 소수자들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p.94-95)

한편, 흥미롭게도 색은 실제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연속적, 상호 의존적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같은 색의 엷은 변화이기 때문이다(무지개 깃발은 동성애 문화의 상징). 빨강에서 시작하지만 파랑으로 끝나면서 보라색으로 다시 만난다. 마치 낮과 밤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거쳐 계속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p.104)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p.139-140)

2조 원(갤럭시노트7 폭발사건 리콜비용)을 다른 곳에 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 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 강사 월급제, 택시 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 폭력 피해 여성 쉼터,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 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 잠시 ‘로또‘를 꿈꾼다.
물론 그 돈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돈이고, 5와 7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2조 원. 이것은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향후 자본주의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내가 가장 궁금한)도대체 인류는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가 인간을 우러러볼 것인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과학 기술 발달의 목표는 편리함인가? 대안적 편리 개념은 없을까. 어디까지 발전해야 성이 찰까. 오래된 질문조차 멈춘 시대다. (p.144-145)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범에 부합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례식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 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p.166-167)

나는 연년생 삼 남매 집안의 큰딸이다. 우리 셋은 우애는 없는데 자주 만난다. 결국 주로 싸우고 헤어진다. 며칠 전 여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이렇게 화가 많을까……." 남동생은 평소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그러게 말야! 누나들은 왜 그렇게 만날 분노가 많아. 나를 봐, 화내는 거 봤어?" 그러자 여동생이 발끈했다. "야! 너, 말 잘했다. 맞아, 너는 화를 안 내. 근데 남을 화나게 하는 데 아주 선수야!" (p.174)

화내는 사람, 화나게 하는 사람. 누가 더 문제일까. 인간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개인의 반응이 결정한다. 스트레스가 좋은 예인데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1위 가까운 이의 죽음, 2위 결혼, 3위 이사 등), 고통은 개인의 스트레스 내성(耐性)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화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안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심리학의 입장이고, 한편으로 분노는 정의감이자 힘이기도 하다. 정당하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우아하고 차분하고 세련되게 대응해야 한다는 통념은 가해자의 이중 메세지다. (p.173-174)

사회 구조는 인성을 창조한다. 르네상스적 인간, 근대적 인간, 자본주의형 인간이란 말이 있는 이유다. 정부는 사회 구성원의 공존을 위한 인프라를 민영화 논리로 파괴하고, 기업은 승자 독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생존은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돈과 성공이 최고 가치고 미모, 행복, 마음의 평화까지 갖춰야 하는 사회다. 이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일단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은 맹렬히 추구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지, 출세까지 해야 되나. (p.177)

행복한 가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에게 회개를 설교하는 상황. ‘기(氣)가 막힘‘을 넘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발생하는 ‘악‘의 새로운 경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독을 뿜는 존재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무 말이나 한다. (p.180)

내가 속한 커뮤니티들은 ‘주류 사회‘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는 누가 결혼한다 그러면 보통 "뭐 하는 사람이냐? 언제 하냐?" 이렇게 묻지만, 내 친구들은 "여자야? 남자야?"라고 묻는다. 만일, 전자처럼 질문한다면 내가 속한 모임의 성원이 되기 어렵고, 그런 경우도 거의 없다. (p.186-187)

고통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의 눈물과 분노, 넋 나간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은 물론 당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감수성은 창의력의 기본 요건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마비, 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스로 정의한다. (p.218-219)

소통할수록, 가까워질수록 외로워진다. 더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럴수록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게서 상처받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더 상처받는다.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 특히 자기 충족적인 사람, 자기 몰두형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충만감을 느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가장 외롭다. (p.238)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남성들은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p.252-253)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같은 여자로서 신경숙의 성공에 대해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남자보다 더 심한 비판을 할 수 있느냐, 여성의 시기심이 더 강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감히 신경숙 씨의 경쟁자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나와 신경숙 씨는 여성이 아니다. 나는 그때 여성으로서 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독자‘로서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우연히 성별이 일치했을 뿐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데,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p.265)

2015년 10월 29일 박 대통령은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히 행사장에 입장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행사에 참석한 여성 인사들과의 모임은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종합 편성 채널의 남성 앵커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여대생이 여성 대통령을 반대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성이 여성을 배척하는 이런 분위기, 어떻게 보십니까?" 이 사건 역시 여성이 여성의 방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이 ‘대통령‘에게 항의한 경우다. 학생들이 여성 혐오가 있어서 여성 대통령 입장을 막은 것이 아니다. 행사장의 ‘좋은‘ 분위기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아니라 보수와 보수의 정체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p.266)

탁월한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가장 방해되는 구조는 여성 간의 갈등을 ‘시기심‘으로 명명하는 사회라고 분석한 바 있다. (p.267)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 장애인 처우가 나아졌어, 지금 굶는 사람은 없잖아……." 이런 말이 오갈 때 나는 묻는다. "그들한테 직접 물어보셨나요? 본인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처럼 일단 말하는 사람의 위치성이 논쟁거리다. 말의 정당성은 문구 자체보다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당신 말은 옳지만,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차별받는 당사자가 "저의 지위가 많이 상승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대개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 있으며 타인의 현실을 모른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발언 자격이 없다. 마치 일본이 우리에게 "예전에 비하면 너희에게 잘해주고 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격이다. (p.277)

‘나아졌다‘는 판단은 어느 시대에 근거한 것일까. 중세에 비하면 누구나 나아졌(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조선 시대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인데, 나아졌는지 아닌지 나는 ㄴ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의문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거지‘든, 왜 이들의 처지는 항상 과거와 비교되는가이다. 만일 2013년의 한국을 미국의 1600년대(조선 시대)와 비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p.277-278)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p.278)

음주 상태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양상은 자연과학의 의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로 ‘필름이 끊긴‘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술을 마셔도 남녀가 성별을 바꿔 행동하지는 않으며, 모르는 외국어를 갑자기 구사하지도 않는다. 술을 마셔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대개는 ‘집에 와서, 가족‘을 구타한다. (p.281)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나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하지만 이런 투쟁은 대개 실패하기 쉽다. 상대방이 수용할 리 만무하며 게다가 소위 ‘적을 닮아 가기‘ 쉽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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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5-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시선] 꼭 읽어봐야지!!

오늘 페이퍼에 소개된 책들은 정말 최고군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5-19 14:12   좋아요 0 | URL
네, 최고의 책을 최고의 책과 함께 소개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낯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7-05-1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낯선 시선> 줄 좀 그었는데 ㅎㅎ 너무 많아 다 옮길수가 없어 스리슬쩍 패쓰했는데 다락방님 올려주신거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키햐~~ 조오타~~ ㅎㅎㅎ

그나저나 세트로 훌륭한 책 이유경 작가님의 <잘 지내나요?> 59-65페이지를 꼼꼼히 읽고 싶은데 제 책을 친구에게 선물한 관계로 오늘 바로 재구매 들어갑니다. 히힛 😊

다락방 2017-05-19 16:04   좋아요 0 | URL
저 밑줄긋기 올리다가 지쳤더랬어요. 중간에 포기할까...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굳건한 의지!! 를 가지고 결국 다 옮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정말 저는 대단한 것입니다.

아니, 그나저나 단발머리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시군요? 좋은 책은 선물도 하시는, 아주 현명하고 아름다운 분이셔요. 지구상에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모르게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버려요. 후훗.

사랑합니다 2017-05-1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지만 밀당하고 싶어요

다락방 2017-05-19 21:14   좋아요 0 | URL
ㅎㅎ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심리는 어떤건가요?

사랑합니다 2017-05-20 20: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못된 심리지요

clavis 2017-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이유경씨의 ˝잘 지내나요?˝의 59ㅡ65페이지를 읽기 위해 교보로 나섭니다.알라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서 빨리 읽어야 무식도 덜어지고,말도 덜 적어질 수 있고,그렇겠지요??? 시를 안주셔서 시집도 한아름 사올겁니다 팽~!!

2017-05-22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5-22 09:02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이렇게 귀엽기 있긔없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7-05-22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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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좆같은 일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다가 툭, 하고 좋은 일이 끼어들면서 연속되는 것 같다. 구겨진 얼굴로 다른 부서에 업무차 내려가 남자과장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가려고 하자 잠깐만 기다리라며 서랍을 열었고, 서랍 속에는 딸기맛 초코파이 한 박스가 들어 있었다. 이거 드세요, 하면서 꺼내주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순간 웃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남자 과장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스타벅스에서 화이트캬라멜초코 인가..화이트모카초코...인가 암튼간에 우라지게 단 커피를 벤티 사이즈로 매일 마시는 캐릭터다. 단 거 무지 좋아하는 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딸기맛 초코파이라니, 고맙게 받아가지고 올라왔다. 좆같은 일들 속에 드물게 일어난 기쁜 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먹을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그러면 좆같은 삶을 살아온 다른 여자의 얘기를 잠깐 해보자.


















'호노르'는 젊은 시절부터 출판사에서 근무하는데, 그녀가 맡은 역할은 출판사 대표인 '모리아니'의 비서겸 경리이다. 회사가 아주 어려울 때부터 늘 거기 있었고, 그리고 자기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대표 모리아니를 좋아하고 있다. 그 대표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고(정확히 기억안나는데 그쯤이다), 그녀의 나이 역시 그에 비슷하게 되었는데, 이제나 저제나 대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자신이 대표의 아내가 될 수도 있을거란 생각을 갖고 살고 있었다. 자기는 계속해서 대표의 옆에 있었고,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도 신경써서 대표를 배려했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징표를 믿었다. 그것은 숨겨진 이정표와 같아서 진심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을 목적지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씩, 그러나 아주 체계적으로 모리아니의 환경을 바꿔나갔다. 달력을 산뜻한 그림으로 바꾸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재고를 책장에서 치우고 모리아니가 마시는 디카페인 모카커피에 카르다모(소두구. 중동지방에서 커피에 넣어 먹는 향신료_역주)을 아주 조금씩 넣었다. 생강과의 이 식물은 긴장을 해소시키는 효능이 있어 세계대전도 막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모리아니는 그녀가 만들어낸 이런 좋은 영향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계량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모리아니의 사무실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졌고 아랍 박하와 백단향의 향기가 풍겼으며 꽃이 시드는 일이 없었다. 그 뒤로 모리아니의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p.114)



파산을 앞두고 우울에 쩔어 있는 모리아니를 위해, 비서인 호노르는 은밀하게 그를 늘 배려해왔던 거다. 그런데, 그 출판사에, 호노르의 절반쯤 되는 나이인 베티가 들어온다. '매끈하고 빵빵하고 예쁜' 아가씨. 그리고 모리아니는 사십년정도의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그런 베티에게 청혼하겠다고 하는 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진짜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욕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지만, 오늘 만큼은 욕을 좀 계속 하기로 하겠다. 참, 호노르의 삶이 너무 좆같지 않은가. 몇 십년을 옆에서 배려하고 신경써줬는데, 자기 나이의 절반쯤 되는 여자에게 청혼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아무리봐도 그여자는 다른 남자랑 사귀고 있는데, 늙은 이 남자에게 관심도 없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생 헛살았다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건가. 아니, 그런데 호노르는 왜 진작에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지? 왜 그렇게 기다리기만 한거야? 만약 고백했다면 모든 일들이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는데. 물론 모리아니가 그녀를 거절했을 확률도 크지만, 설사 거절했다한들, 호노르는 아예 다른 삶을 꿈꾸는 쪽으로 바뀌었을 수 있잖아. 이게 뭐야 완전 죽쒀서 개주고.... 모리아니는 '하이든'이라는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남으로써 출판사가 갑자기 엄청 돈을 많이 벌게되면서 자기 돈도 많아지게 되는데, 그 모든 재산을 매끈하고 빵빵한 젊은 여자 베티에게 줄 생각인 거다. 평생 자기 옆에 있었던 여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로.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모리아니야, 베티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단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생.... 




모리아니는 베티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고 베티를 포기한다. 암은 그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는 이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럴 때, 그에게 호노르가 간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비스킷을 챙겨준다.




"호노르, 혹시 지금 울 거면 그 전에 내 영국 비스킷 좀 갖다줘."

호노르는 그가 말한 알루미늄 통을 값비싼 식재료들이 부패해가는 식료품 창고에서 찾아냈다. 스페인산 훈제육 위에도 파란 곰팡이 잔디가 깔렸고, 소시지는 거의 미라가 됐고, 과일들은 비쩍 말라 버렸고, 통조림 깡통들은 팽팽하게 배가 불러 위험해 보였고, 식료품 선반 사이에는 수많은 거미줄 터널이 창궐해 있었다. 이 집에는 분명 여자의 손길이 필요했다. 호노르는 비스킷 통을 열기가 겁났지만 다행히 내용물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호노르, 우리 집 지붕에 독수리들이 앉아 있지 않았어? 시체 냄새 맡고 기다리는 거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격 없는 말투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p.266)




나는 가급적 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이 호노르 에 대해서라면 무자비하게 스포일러가 되고자 한다. 살면서 이런 일 한 번쯤 한다고 벌받지 않겠지. 후훗. 그래서 호노르가 어떻게 되냐고?




클라우스 모리아니는 베니스의 병원에서 죽었다. 그리고 죽기전 병상에서 그의 비서였던 호노르 아니젠드라트와 결혼하고 출판사와 개인 재산 전부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p.317)



크- 그간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고, 함께 지낸 시간도 짧았지만, 아하하하하, 출판사와 재산 전부를 유산으로 받았다. 만쉐! 이제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일만 남았구나. 후훗. 글쎄,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간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노년에 돈이 많아진 것에 대해 '좋은 삶이구나' 할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외롭고 긴 날들이었다고 할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거야 이미 벌어진 일이니, 노년에 돈이 있는 건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호노르, 맛있는 것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아요!!! 








역시 짝사랑을 하더라도 돈 많은 남자를 짝사랑하는 게 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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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5-1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런 스포일러 좋아요. 카르다모, 처음 들어봐요.

다락방 2017-05-17 10:50   좋아요 0 | URL
전재산을 다 받았다는 거에 제 마음도 좋아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와같다면 2017-05-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보이지 않는 징표를 믿었다. 그것은 숨겨진 이정표와 같아서 진심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을 목적지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많이 담아서 쓴 문장같아요

다락방님과 제 마음을 건드리네요

다락방 2017-05-17 11:37   좋아요 0 | URL
어휴, 나와같다면 님의 댓글을 읽고 저 문장을 다시 읽으니 마음에 휭-하니 바람이 불어요. 하아-
 
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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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안읽었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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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05-1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감사합니다 시원하게 패스^^

다락방 2017-05-16 13:54   좋아요 0 | URL
네 패스하시고 다른 책 읽으세요! ㅎㅎ

유부만두 2017-05-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그 시간이 아깝고 그러나요?

다락방 2017-05-16 17:40   좋아요 1 | URL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팔랑팔랑 넘어가서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닌데요, 그 시간에 다른 책 읽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이게 뭐냐...싶거든요. 아하하하하 ;;

그렇게혜윰 2017-05-1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레강스하면서 샤프하며 함축적이며 구체적인 이 한줄 리뷰!!!♥ㅋㅋㅋㅋ

다락방 2017-05-16 18: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무척 감사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7-05-1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안 읽으면 억울한 작품 많이 추천해 주세요~^^

다락방 2017-05-17 09:4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앞으로 열심히 그러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슬비 2017-05-16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만들어진다고 하니 영화만 봐도 될것같긴했어요.^^

다락방 2017-05-17 09:4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 만들어지면 볼까.. 생각중이긴 한데, 아 중간중간 너무 짜증나더라고요. 굳이 영화까지 봐야되나 이런 생각도 동시에 들어요 ㅎㅎ

라네쥬 2017-05-3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개하는 카드뉴스가 너무 흥미로워서 볼까 했는데 예전에 앞에 잠깐 봤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가서... 안 보고 있습니다. 솔직한 평 감사합니다. 안 봐도 될 거 같아요! ㅋㅋㅋ

다락방 2017-05-30 16:54   좋아요 0 | URL
네 안봐도 됩니다. 다른 재미있는 책 보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