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의 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남동생, 조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숨쉬듯 자연스럽고 또 그들로부터 그 말을 듣는 것도 그러한데, 왜 연애할 때 애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말을 해버리는 순간 내가 약자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나는 내가 사랑에 인색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랑이란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도무지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을 때, 그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서운함이 아니라 '화'가 날 때,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서 관계를 유지시키는걸까? 그 화가 온통 나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일상을 유지하는걸까?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 계속해나가는 걸까?
보통 부정적인 감정, 이를테면 우울함이라든가 슬픔, 화 같은 것들은,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옅어지기 마련인데, 지독한 화는 자고 일어나서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내게 기쁨과 안정만 선사하진 않는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상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간혹 부정적 감정을 주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다들 어떻게 견디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걸까?
어제 SNS 에서 정희진 의 사랑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였고, 강의를 옮겨온 거였다. 일단 링크하겠다.
“사랑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마침 정희진의 《낯선 시선》을 읽는 중이었다. 소설은 못읽겠다 싶어 부랴부랴 고른 책이었다. 오호라, 어디 읽어보자 하고 저 기사를 읽었는데, 와, 정말 너무 좋은 거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저는 밀당을 아주 싫어합니다. 일단, 밀당의 전제는, 더 사랑하는 쪽이 더 헌신하는 쪽이 약자라는 거죠. 연애에서'조차' 권력자가 되고 싶은 거죠. (중략)
제가 밀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노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약간, '저질 권력투쟁'이라고 할까요?
(중략)
밀당에 능해서 이룬 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어요? (기사中)
친한 친구들과 밀당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연애에 있어서 밀당은 필요한가, 하는 거였는데, 친구는 그때 내게 '난 대체 밀당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랬다. 나 역시도 밀당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해야하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밀당이 필요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굳이 밀당 같은 거 에너지 소모 하면서 할 필요 없지 않나?
정희진 쌤 강의를 들으면서도 느낀건데, 정희진 쌤은 '무지한' 남자를 엄청 싫어한다는 느낌이 든다. 해서, '무식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강의중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장 보니 빵터진 것.
명언이 있어요.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어서 혹은 무식해서다'. 말 많은 남자가 훨씬 낫습니다. 말 없는 남자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기사中)
물론 말 많이 한다고 해서 화제가 풍부하거나 유식한 남자인 것도 아니다. 입만 열면 개소리를 나불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지난번 회식 생각난다. 회식 중에 소주회사 판촉하는 여자직원이 와서 '우리 소주를 시키면 선물을 주겠다'고 하니까, 남자 부장이 예쁘다고 환호하며 '우리한테 술 한잔씩 다 따라줘요' 이러는 거다. 아 씨발.. 이게 지금 뭔소리야. 그 분은 정말 따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부장에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 분이 우리 술을 왜 따라요?" 하고는 그 분께 "괜찮아요, 따르지 마세요" 했더랬다. 아 딥빡침이...입을 다물어야 할 때를 아는 자는 얼마나 소중한가. 입에서 똥이 나온다 진짜.
그리고 이 모든 강의의 핵심은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연애상담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미 상담이 필요한 상태라면, 사랑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면 상담이 필요 없죠. 또 상담을 해 봤자, 자신이 변하든 상대가 변하든 해야 하는데, 그게 상담으로 가능한가요? 자기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저도 연애 상담을 많이 받는데, 실은 정보를 제공할 뿐이에요. 좋게 끝내고 싶다? 좋으면 왜 끝나겠어요? 상대방의 진심? 그런 건 없어요. 모든 것은 행위가 말해줍니다. 행위로만 판단하면, 의외로 인생이 편해집니다. 쓸데없는 기대와 고민이 사라지니까요. (기사 中)
아... 뭔가 진짜 훅 들어오는 말이지 않은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좋으면 그게 왜 끝나나... 행위가 말해준다. 그래, 팩트는 그 '행위'에 있지 않은가. 행위를 엄연히 저질러놓고 거기다 대고 왜그랬을까를 고민하는 건..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아- 행위로만 판단하면 인생이 편하진다는 데 내가 적극 동의하지만, 그렇지만, 아아, 또,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 행위로만 판단하면 결정이 쉬워지지만, 그런데, 거기에 나의 감정이란 것이 섞여 버리니까, 그래서 어려운 거잖아 ㅠㅠ
안되는 줄 아는데, 그래서 놓자니 너무 좋은데... 막 이렇게 되는 거잖아??? 어휴...
아무튼 이 훌륭한 글을 읽고 너무 좋아서 출력도 해서 읽고(이러면 안되는건가??) 밑줄도 긋고, 그래, 사랑을 공부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간 내가 사랑을 넘치게 가진 사람이었고 또 표현도 잘하는 사람이어서, 사랑에 대해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직까지도 사랑은 직접 빠져가며 몸으로 부딪쳐가며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그래 공부해보자, 공부가 어떻게든 도움이 될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는 사랑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고, 잘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책도 어제 주문했고(응?), 또, 이 시대 최고의 책, '이유경'의 《잘 지내나요?》를 펼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인 59페이지에서부터 65페이지까지를 읽었다. 훌륭한 책이라는 것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아직 이 책 안읽은 분들이라면, 강하게 일독을 권한다.
나는 사실 《낯선 시선》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건데...
내가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여러 명의 강의를 들어봤지만, 정희진 쌤 강의가 제일 좋았다. 들을 때마다 사고가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확- 들었던 거다.
이즈음의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기분으로 소설 읽었다가 젖은 휴지처럼 널브러질까봐, 정희진 쌤 책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한없이 축 가라앉지 말고, 똘망똘망 깨어있자! 하는 기분으로.
아..멋져..... 누가? 내가!
나는 자꾸 나를 제정신에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줄 놓지말자, 다짐하고, 해결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자, 하는 것이다.
역시나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짚어주는데, 마지막 부분의 '배려'에 대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 광고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름 문제의식을 느끼고 위원회와 인권 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마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p.284-285)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p.286-287)
진짜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다.
저 많은 문장들은 밑에 밑줄긋기로 첨부하도록 하겠다. 첨부하는 틈틈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고민도 좀 해보고.
이 책을 출근하는 도중 지하철안에서 다 읽을 것 같아, 다음 책은 뭘로 할까, 책장앞에서 고민하느라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왔다. 으이크, 평소보다 늦은 지하철을 타겠네, 했는데, 정작 책은 고르지 못한 채로 그냥 나왔으며, 한참을 서성이느라 지하철도 늦은 걸 탔다. 회사가서 골라보자, 내심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회사에도 책이 많이 있다는 뜻...이 맞다. 킁.
여기나 저기나 안읽은 책들이 쌓여있어. 아하하하하.
근데 어제 막 책 또 샀고..
우산 네 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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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식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앎은 그 과정 자체다. 짧은 글도 교차 확인이 필수적인데, 대조해서 점검할 다른 지식이 없다면? "국사가 어떻게 다양성이 가능하냐?" 라는 국사학자의 말은 정치인의 제스처라면 모를까, 지식인으로서 놀랄 만한 발언이다. 지식은 가르치는(‘주입‘)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합의 과정이다. 다양성은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p.35)
유명 인사인데 잦은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출판사 관계자와 통화중에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했더니, 남성인 그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선생님은 한참 모르시네. 우리나라는요, 병역만 아니면 다 컴백해요. 무슨 일을 저질렀어도 병역(비리)만 아니면 됩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큰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승준 봐요. 지금 벌써 몇 년째예요? 그 사람이요? 1년 안데 다시 책 냅니다. 두고 보세요." (p.37)
특권층의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부랴부랴 ‘국민은 모두 병사‘라며 국민개병(皆兵) 제도를 실시했다. 이는 국민의 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남성들은 신분과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환상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병역이 공평하기 시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병역과 관련해서 국민은 3등분 된다. 군대에 안 가는 사람, 가기 싫은데 가야 하는 사람, 못 가는 사람(여성, 장애인……). 특히 ‘못 가는 사람‘은 비(非)국민으로서 배제된 것인데 마치 면제된 것처럼 간주된다. 평등은 이 세 그룹 사이의 관계 분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병역 비리 논란은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 즉 그야 하는 남성과 안 가는 남성들 사이의 문제로 축소된다. (p.39)
분노의 이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한 사회의 성숙도와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다.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가 압도적이고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혐오 현상이다. 특히 다른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소하게 취급되기 쉽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말대로 "군대 문제만 아니면 다 용서되는" 경향은 군대 비리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자숙의 기간‘과 별도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두 번째 기회‘는 중요하다. 주가 조작, 불량 식품 생산, 논문 표절, 배우자 구타 같은 이유로 ‘13년 동안‘ 사회 활동, 아니 입국을 막는 경우가 있는가. 똑같은 잘못을 해도 매장당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이와 관련한 억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황교안 씨는 군대에 가지 않고도 승승장구해 왔다. 그는 가정 폭력 옹호 발언, 공안 검사 경력까지 ‘청문회 비리 종합 세트‘에 새로운 목록을 추가했다. (p.39-40)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p.51)
우리는 상대는커녕 자신조차 모른다. 우리가 강대국을 이용한다는 자신감은 부풀려진 자아, 망상적 자기애, 도취에 가까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관은 강자를 이용하려는 약자의 자세가 아니라 강자에 대한 동일시 욕망, 허세와 착각에서 나온다. 분명한 점은, 강자는 이러한 약자의 자기 분열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60)
이즈음 배우 신성일 씨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그의 인생은 개인사라 치고, 그가 문제의 핵심을 요약해주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독립된, 개별적 인격체다. 사랑은 결혼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p.62)
특히 ‘여성 혐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성 혐오라는 대칭적 용어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혐 대 남현‘이라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분법은 A와 not A라는 타자화의 문법으로, 평등으로 여겨지기 쉬운 속임수다. 미소지니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미소지니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기 힘든 단어다.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 남성 위주 사회는 너무 오래된 역사라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남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를 자각하고 여성이 자신의 이중 노동,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혐오인가? (p.83)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게급, 지식 자원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몸 상태가 다른 노숙인 같은 소수자들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p.94-95)
한편, 흥미롭게도 색은 실제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연속적, 상호 의존적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같은 색의 엷은 변화이기 때문이다(무지개 깃발은 동성애 문화의 상징). 빨강에서 시작하지만 파랑으로 끝나면서 보라색으로 다시 만난다. 마치 낮과 밤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거쳐 계속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p.104)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p.139-140)
2조 원(갤럭시노트7 폭발사건 리콜비용)을 다른 곳에 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 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 강사 월급제, 택시 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 폭력 피해 여성 쉼터,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 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 잠시 ‘로또‘를 꿈꾼다. 물론 그 돈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돈이고, 5와 7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2조 원. 이것은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향후 자본주의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내가 가장 궁금한)도대체 인류는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가 인간을 우러러볼 것인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과학 기술 발달의 목표는 편리함인가? 대안적 편리 개념은 없을까. 어디까지 발전해야 성이 찰까. 오래된 질문조차 멈춘 시대다. (p.144-145)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범에 부합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례식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 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p.166-167)
나는 연년생 삼 남매 집안의 큰딸이다. 우리 셋은 우애는 없는데 자주 만난다. 결국 주로 싸우고 헤어진다. 며칠 전 여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이렇게 화가 많을까……." 남동생은 평소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그러게 말야! 누나들은 왜 그렇게 만날 분노가 많아. 나를 봐, 화내는 거 봤어?" 그러자 여동생이 발끈했다. "야! 너, 말 잘했다. 맞아, 너는 화를 안 내. 근데 남을 화나게 하는 데 아주 선수야!" (p.174)
화내는 사람, 화나게 하는 사람. 누가 더 문제일까. 인간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개인의 반응이 결정한다. 스트레스가 좋은 예인데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1위 가까운 이의 죽음, 2위 결혼, 3위 이사 등), 고통은 개인의 스트레스 내성(耐性)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화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안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심리학의 입장이고, 한편으로 분노는 정의감이자 힘이기도 하다. 정당하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우아하고 차분하고 세련되게 대응해야 한다는 통념은 가해자의 이중 메세지다. (p.173-174)
사회 구조는 인성을 창조한다. 르네상스적 인간, 근대적 인간, 자본주의형 인간이란 말이 있는 이유다. 정부는 사회 구성원의 공존을 위한 인프라를 민영화 논리로 파괴하고, 기업은 승자 독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생존은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돈과 성공이 최고 가치고 미모, 행복, 마음의 평화까지 갖춰야 하는 사회다. 이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일단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은 맹렬히 추구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지, 출세까지 해야 되나. (p.177)
행복한 가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에게 회개를 설교하는 상황. ‘기(氣)가 막힘‘을 넘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발생하는 ‘악‘의 새로운 경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독을 뿜는 존재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무 말이나 한다. (p.180)
내가 속한 커뮤니티들은 ‘주류 사회‘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는 누가 결혼한다 그러면 보통 "뭐 하는 사람이냐? 언제 하냐?" 이렇게 묻지만, 내 친구들은 "여자야? 남자야?"라고 묻는다. 만일, 전자처럼 질문한다면 내가 속한 모임의 성원이 되기 어렵고, 그런 경우도 거의 없다. (p.186-187)
고통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의 눈물과 분노, 넋 나간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은 물론 당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감수성은 창의력의 기본 요건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마비, 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스로 정의한다. (p.218-219)
소통할수록, 가까워질수록 외로워진다. 더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럴수록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게서 상처받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더 상처받는다.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 특히 자기 충족적인 사람, 자기 몰두형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충만감을 느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가장 외롭다. (p.238)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남성들은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p.252-253)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같은 여자로서 신경숙의 성공에 대해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남자보다 더 심한 비판을 할 수 있느냐, 여성의 시기심이 더 강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감히 신경숙 씨의 경쟁자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나와 신경숙 씨는 여성이 아니다. 나는 그때 여성으로서 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독자‘로서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우연히 성별이 일치했을 뿐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데,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p.265)
2015년 10월 29일 박 대통령은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히 행사장에 입장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행사에 참석한 여성 인사들과의 모임은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종합 편성 채널의 남성 앵커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여대생이 여성 대통령을 반대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성이 여성을 배척하는 이런 분위기, 어떻게 보십니까?" 이 사건 역시 여성이 여성의 방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이 ‘대통령‘에게 항의한 경우다. 학생들이 여성 혐오가 있어서 여성 대통령 입장을 막은 것이 아니다. 행사장의 ‘좋은‘ 분위기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아니라 보수와 보수의 정체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p.266)
탁월한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가장 방해되는 구조는 여성 간의 갈등을 ‘시기심‘으로 명명하는 사회라고 분석한 바 있다. (p.267)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 장애인 처우가 나아졌어, 지금 굶는 사람은 없잖아……." 이런 말이 오갈 때 나는 묻는다. "그들한테 직접 물어보셨나요? 본인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처럼 일단 말하는 사람의 위치성이 논쟁거리다. 말의 정당성은 문구 자체보다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당신 말은 옳지만,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차별받는 당사자가 "저의 지위가 많이 상승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대개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 있으며 타인의 현실을 모른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발언 자격이 없다. 마치 일본이 우리에게 "예전에 비하면 너희에게 잘해주고 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격이다. (p.277)
‘나아졌다‘는 판단은 어느 시대에 근거한 것일까. 중세에 비하면 누구나 나아졌(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조선 시대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인데, 나아졌는지 아닌지 나는 ㄴ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의문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거지‘든, 왜 이들의 처지는 항상 과거와 비교되는가이다. 만일 2013년의 한국을 미국의 1600년대(조선 시대)와 비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p.277-278)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p.278)
음주 상태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양상은 자연과학의 의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로 ‘필름이 끊긴‘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술을 마셔도 남녀가 성별을 바꿔 행동하지는 않으며, 모르는 외국어를 갑자기 구사하지도 않는다. 술을 마셔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대개는 ‘집에 와서, 가족‘을 구타한다. (p.281)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나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하지만 이런 투쟁은 대개 실패하기 쉽다. 상대방이 수용할 리 만무하며 게다가 소위 ‘적을 닮아 가기‘ 쉽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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