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해마다 별 일없이, 평소와 같이 지나가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매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또 설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대박 설렜다가 정신차려보니 어젯밤. 아이코, 다 지나갔네, 했다. 크리스마스는 무엇인가.
나는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꾸며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엄마 아빠는 먹고 사는일에 급급해 트리 생각 하지도 못했다고 그간 생각해왔지만, 몇해전에야 비로소 먹고사는 일이 어렵지 않았어도 우리 엄마는 트리 꾸밀 사람이 아니다, 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트리를 사서 꾸밀 돈이 있는데 트리를 사서 꾸미지 않기 때문이다. 타고나길 뒤메질러로 태어난 사람은 트리 같은 거.. 안하는 게 좋다. 한 번 꾸며놓으면 아마 먼지 쌓인 채로 내년 크리스마스가 되고, 어차피 다음 크리스마스가 또 되고.. 세상 지저분한 사람이 될 것이며 설사 누군가 치워놓은다 한들 그렇다면 왜 꾸미나... 세상 귀찮다...하게될 것이 뻔하므로.. 나는 우리 엄마 딸이다.
각설하고,
이번주말에는,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인 토요일에는 책장을 하나 조립하기로 크게 계획해 두었다. 오후에는 아가 조카를 보러 가기로 되어있었으므로 오전에 책장을 조립하고 거기에 책을 꽂아두고 샤워한 뒤에 룰루랄라 발걸음도 가벼웁게 아가 조카네로 출발!! 이것이 나의 계획이었는데,
아아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일단 열흘정도 걸려 배송된 책장을 조립하기 위해 방바닥에 펼쳐 두었다. 이미 오래전에 한 번 조립했던 터라 쉽겠지, 했지만 설명서와 이 부품들을 보면서 응?? 하게 되어버려써.. 여튼, 차근차근 설명서를 따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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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긴 기둥과 짧은 기둥을 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잇는 과정에서 아아, 긴 기둥의 한쪽이 부서지고 만다. 내가 비뚤게 넣었을까, 아니면 세워서 연결하지 말랬는데 굳이 세워서 해서 그런걸까. 여하튼 바스라지고 말았고, 바스라진 기둥을 보니 속은 나무가 아니었다. 이런 재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코르크.. 재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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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를 어쩐담. 나는 크게 당황했다. 저기 부러진 부분에 연결못으로 이어져서 작은 기둥과 맞물려야 하는데 이렇게 부서져버리니 뭐가 어떻게 수습이 안되는거다. 나는 시계를 봤다. 그리고 이케아 매장을 검색했다. 광명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한시간 반, 거기에서 남동생 집으로 가면 한시간 반. 바삐 움직이면 오늘 책장 조립은 못해도 이 기둥 하나 사가지고 아가조카를 보러 가는 일정은 가능해진다. 그러나 일단 매장에 전화해서 이 기둥을 오늘 가면 바로 구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매장에 전화를 걸려고 하니 열시부터 오픈이란다. 하는수없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장칼국수를 끓여가지고 먹는다. 그리고 열시를 조금 넘겨 매장에 전화를 했다.
이 모델명과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하고 혹시 지금 가면 이 기둥을 내가 구매할 수 있냐 물었더니 불가하다고 했다. 일단 지금 만들어지는 제품이 아닌지라 재고가 없다는 것. 어딘가에서 이 기둥의 재고가 들어온다면 그 때는 내게 무상으로 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게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이 기둥을 받아갈 수 있는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려다오, 했더니 재고가 없기 때문에 대기자 명단을 만들 수 없다 했다. 그렇다면 내가 온라인으로 재고를 확인할 수 있는지 묻자, 그건 직원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단다. 그러면 재고가 들어오면 전화해주니?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러면 내가 이 재고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니? 물었더니, 그건 니가 우리에게 전화를 해봐야만 해.... 왓...더....샤라라랑.
그러면 혹시 이 제품 전체 환불은 되니? 파손된 걸 우리가 환불해줄 순 없어.
그러면 나는 조립도 하지 못하는 채로 이걸 이렇게 그냥 갖고 있어야 하니, 언제 들어올지 모를 기둥을 기다리며?
도움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인생..
그래서 나는 이렇게 펼쳐두고 생각을 하자, 생각을... 했다. 부서진 부분에 못을 박으면 어떨까, 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렇게 힘을 받지 못한다. 스카치 테이프로 한 번 둘러보았다. 흐음.. 택도 없어 안돼.. 그렇다면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이케아에 전화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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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 버리고 아예 새로운 제품을 새로 살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이걸 산 돈이 아깝기도 하지만 이 모든게 쓰레기로 처리될걸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쓰린거다. 안돼, 이걸 모두 무용하게 만들 순 없다. 어쩐담..
그런참에 입원중이셨던 엄마가 퇴원하셨다. 엄마와 녹차케익에 커피를 마시면서 이 일에 대해 얘기했다. 일단 이렇게 방 한쪽에 밀어두어야 하는가.. 하자 내 얘기를 다 들으신 엄마는 어디에 무슨 문제가 생긴건지 한 번 확인하시고는 ㅋㅋㅋ 테이프를 가져오셔가지고 ㅋㅋㅋㅋㅋ 칭칭 감아 응급처치 해주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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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기 싫지만 아니 그래도 이걸 감아서 힘을 받는다면, 쓸 수 있다면 책장에서 쓰레기 될뻔한 것이 다시 책장이 된다. 만세! 나는 다시 조립을 다 하고 갈까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일단 보류하고 씻고 아가조카를 보러 갔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 오자마자 조립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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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문득 내가 이 과정을 유튜브로 찍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도 생각해보았다. 일전에 쟝님이 뚝딱뚝딱 깔끔하고 아름답게 잘도 조립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만약 내가 이 과정을 유튜브로 만들었다면 동영상을 찍다가 갑자기 부서져버린 기둥을 보고.... 이것이 만약 라이브였다면......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걸 동영상으로 찍는다면 거기에서 영상이 멈추거나 아니면 엄마가 와서 테이프로 칭칭 감아주는 것을 포함해 완성까지 가야했을까?
아무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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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똑같은 책장은 페미니즘 책만 잔뜩 쌓아두었는데, 그래서 보기좋게 옆에 붙이려고 했더니 뒤에 전기.. 를 써야해서 하는수없이 벽에다 붙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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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너... 그래도 너는 내게 책장이야. ♡
여기에 어떤 책들을 꽂을까 생각하다가 문동과 민음사를 갖다 꽂자, 고 생각했는데.. 문동만 꽂아도 세 칸이 차 버려서 남은 두 칸에 민음사를 다 꽂을 수가 없겠더라. 해서, 양이 적은 문학들로 갖다 꽂았다. 창비와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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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새로 사기 전에도 한 번 체크했었지만, 문 열리는 데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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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방바닥의 책들은 모두 없앨 수 있었는데, 아직 다른 책장들은 이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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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크리스마스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ㅋㅋㅋㅋㅋ
역시 나는 유튭은 아닌 걸로...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