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세기 사어 수집가
황인찬 외 지음 / 유어마인드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기억은 소멸을 전제로 하기에 슬픔과 기쁨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완전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멸 때문에 다시 불완전해진다. “나를 기억해줘”란 말은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멸을 원해서가 아니라 소멸의 안타까움이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가 남긴 모든 말과 사물에 그 마음이 담겨 있을 거다.
나는 위 문장을 한참 바라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단어, 고민, 방식 그런 것들이 한눈에 보인다. 《22세기 사어 수집가》는 그런 걸 보여 준다. 그들도 자신의 글을 바라보며 나와 같은 심정을 느꼈을 테고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결단으로 글로 묶어 내놓았으리라.
황인찬 시인이 고른 사어에는 그의 아날로그 취향과 문학인으로서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뽕, 산악회, 진정성, 파이팅, 핍진성, 교복, 경이, 정수, 오빠, 세계문학전집, 느낌, 퀴어, 귀농, 시간제 강사, 새내기, 학제(學製), 엠티(MT), 독설, 제본, 종언’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한 성소수자들은 한국의 전통을 따라 부모를 모시고 살며 제사를 치르고 고부갈등과 시댁살이, 여타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들로 고충을 겪는, 매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ㅡ 황인찬 ‘퀴어’ 中
한유주는 최근 우주까지 관심이 확장된 걸로 보이는데 대체로 이국성(異國性)으로 이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소설가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불시에 ! 하게 만든다. 작가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같이 발견하는 쾌감이다.
‘칫솔, 라이터, 비닐봉지, 안개, 다리미, 기적, 번지, 나일론, 페덱스, 조화, 우산, 심장병, 담배, 12월, 응사(매로 꿩을 사냥하는 사람), 실바람, 낙조, 검정색, 명왕성, 간척지’ 등 한국적인 소재가 많은데 외국인을 등장인물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끈다.
국제영화제에서 어느 영화의 상영이 끝난 뒤 한 관객이 묻는다. 왜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항상 비닐봉지를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감독이 되묻는다. 당신은 모든 한국영화를 보셨습니까. 그리고 질문했던 관객이 대답한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제가 본 모든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가방 대신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고, 제가 본 한국영화들의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제가 어떤 총체적인 상을 그리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연’을 발생시키는 한국적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략) 비닐봉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될 때,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무엇을 들고 다닐지가 저도 궁금하군요.
ㅡ 한유주 ‘비닐봉지’ 中
백 년 뒤에도, 이백 년 뒤에도 모든 사람들은 언제고 고아가 되겠지만, 그들은 그녀와는 다른 다리미를 사용할 것이다. 혹은 다림질이 필요하지 않은 나일론을 능가하는 섬유가 개발될지도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의해
ㅡ 한유주 ‘다리미’ 中
제법 멀리까지 나온 그들이 다과회장으로 돌아가려 할 때, 잔디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인다. 일본인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는다. 이게 뭘까요? 일본인이 묻는다. 한국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닐 조각이다. 잊힌 이름이다.
ㅡ 한유주 ‘간척지’ 中
현시원의 글에선 큐레이터 다운 소재와 현장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 특성들을 볼 수 있다.
‘파도타기, 관객, 샤프심, 두부, 연설, 삼박자, 백설탕, 스포일러(우리말 순화어:영화 헤살꾼), 기념비, 젊은작가, 우표, 자별하다, 경비실, !느낌표, 일기예보, 맴돌다, 창조, 얼음, 걷기 대회, 호신술’
2014년 6월 어떤 자는 일본의 한 작가에게서 소포를 받았다. 청록색 배경에 닭이 그려진 우표가 무려 26장이나 봉투 네 면을 둘러붙어 있었는데, 근 몇 년 만에 그는 우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살아있는 한 마지막으로, 우표를 오래 들여다본 일이라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ㅡ 현시원 ‘우표’ 中
날씨가 세계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날씨교까지 등장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할지도 모르는 종교입니다.
ㅡ 현시원 ‘일기예보’ 中
맴도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 집 앞에 가는 사람도 없다.
ㅡ 현시원 ‘맴돌다’ 中
김지현(aka 아밀) 역시 번역가이자 소설가 다운 문체의 재미를 준다.
‘그녀, 타다, 인형, 망하다, 폐지(廢紙), 자기관리, 영재, 비둘기, 눈, 짓다, 당신, 불구하다, 돛대, 천연, 사이렌, 감성, 반려, 사이코패스, 자아, 넋’ 등 별로 흥미롭지 않은 단어들을 ‘화석’으로 설정해 그 결정(結晶)을 살펴본다.
이렇게 부서진 ‘망하다’의 파편들은 모두 또 다른 조그마한 ‘망하다’가 된다.
ㅡ 김지현(aka 아밀) ‘망하다’ 中
사람들은 종이가 버려질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잘하지 못하기에 이 화석을 보면 무슨 화석인지 알아보기 어려워한다. 대개 나룻배나 비행기와 같은 모양이다. 아마도 그것이 ‘폐지’가 추구한 진화의 마지막 단계 같은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ㅡ 김지현(aka 아밀) ‘ 폐지(廢紙)’
이 화석은 색색의 셀로판지 십수 장을 연속적으로 붙여놓은 것과 같은 형태다. 이 화석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여러 개로 비쳐 보인다.
ㅡ 김지현(aka 아밀) ‘자아’ 中
사진가는 사진이 말이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905/pimg_7598491531485852.jpg)
ㅡ 이윤호 '안마 맛사지'
논객 노정태가 가지고 온 사어(‘운전수, 스마트폰, 페이퍼백, 인디, 중산층, 비정규직, 전세, 개천의 용, 귀성길/귀경길, 세는 나이, 대안학교, ADHD, 삼한사온, 장마, 꽃샘추위, 참치회, 동물원, 안락사, 통일, 논객’ )는 딱 봐도 시사성을 담고 있다. 논객 다운 회의주의가 문장마다 가득하다. 자신이 논객이면서 '논객'의 사멸을 말하고 있으니.
엘론 머스크와 레리 페이지처럼, 선택받은 환경에서 자신의 운을 십분 활용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늘 그래 왔듯이 미래를 손수 개척하고 열어나갈 것이다. 반면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 평범한 우리에게, 미래는 어찌 보면 주어지는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22세기에 사라질 말들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언어들에도 조금은 슬픔의 손길이 닿는 듯하다.
ㅡ 노정태 ‘통일, 논객’ 中
음악가들의 위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과 흥을 가사와 리듬으로 싣기 위해 작가만큼 노력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김목인이 가져온 사어(‘가수, 김치냉장고, 노파, 눈싸움, 당일 배송, 리얼리티 프로그램, 마가린, 백열등, 빌 게이츠, 사이버, 속물, 속셈학원, 스승, 썰렁하다, 야자, 연립주택, 일상적, 전공, 책받침, 프리메이슨’)와 생각에서 가장 많이 웃었다.
마가린은 버터와 비슷한 종류의 20세기 풍 음식 재료로 여러 건강상의 논란 때문에 사라진 추억의 제품 중 하나다. 가끔 최초의 우주 비행사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가가린’이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아 냉장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스크림으로 잘못 알고 구매해 먹은 사람들도 많았다.
ㅡ 김목인 ‘마가린’
숲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버섯같이 글에서 향기가 나는 이제니 시인의 사어(‘버섯, 숲, 바람, 음악, 침묵, 꿈, 사람, 희망, 감정, 기억, 동물원, 시, 책, 거짓말, 겨울, 밤, 그림자, 예언, 죽음’)와 생각은 읽는 이를 사유의 숲으로 이끈다. 그 사유의 숲은 詩로 이뤄져 있다.
유예시키고 유예시켜도, 지연시키고 지연시켜도, 좀처럼 맘처럼 다가오지 않는 깊이와 높이.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이제 곧 다가온다고 믿으려는 어리석고도 간절한 마음. 오래전부터 누이는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아마포 손수건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누이의 부모는 작별 인사로 그것을 누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누이가 받은 얇고 흰 아마포 손수건은 그의 품을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매 순간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에게 감시당하는 일이 전부였던 수용소의 삶에서 소중한 사물들은 그저 머릿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무엇이었다. 빼앗긴 채 사라진 물건들만큼이나 그들은 자신의 말 또한 잊으려고 애썼다. 단어를 많이 간직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므로 때때로 말이란 위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제 고통을 더욱더 세분화시키고 심화하는 무엇이었으므로 희망, 그것은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이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려보는,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입속말로 가만히 중얼거리고 중얼거려보는, 보이지 않는 저 하늘의 날개처럼 흔들리고 흔들리는, 엷고 고운 천 조각이었다.
ㅡ 이제니 '희망'
*작가가 붙인 ‘희망’에 대한 주석: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는 바람./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또는 전망.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기억하기 때문이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책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된 단어는 "동물원"이다. 작가들은 왜 '동물원"에 그토록 열중하는가도 연구 거리이다. 내가 아는 소설만도 몇 개나 된다. 동물원의 동물들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일까.
사어를 말하며 그들도 박제된《22세기 사어 수집가》는 책 제목을 따라가는 운명 탓인지 사어 수집가들의 뜻에 따라 그런지 현재 품절 상태다. 도서관에도 잘 없다. 품절된 책만 찾아 읽는 품절 독서가는 아닌데 내가 읽는 책은 어째 품절이 많다. 위로와 함께 기억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우표 26장 대신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