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특히 좋았던 장면을 묻는다면 나는 이걸 말하겠다. 로빈슨이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방드르디(프라이데이) 때문에 모두 잃고 웃는 장면과 때때로 물시계 작동을 멈춰 시간을 무화(無化) 시키는 장면이다. 예속을 벗고 자유를 얻는 멋진 장면이었다.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그걸 보여줬다. 하지만 태평양의 끝이었기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로빈슨의 천애 고독(天涯 孤獨)이 이곳에서는 무연사회(無緣社會) 현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태평양의 끝에서도 이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는 ‘유대’를 갈망한다. 관계 속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우리는 버리지 못한다. 이는 ‘자유와 예속 혹은 자립과 의존’ 문제이기도 하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노동-관계에 얽매여 있다. 선사 시대 사냥이나 로빈슨의 경작이나 김씨표류기에서 김 씨가 짜장면을 먹기 위해 옥수수를 키우는 행위는 순수한 노동이었겠지만, 이 소비 사회에서 노동은 착취 관계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분이라는 자원을 동원한다. 규율사회의 매체인 합리성은 생산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한계에 봉착한다. 이제 합리성은 강제와 장애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합리성은 하루아침에 융통성 없는 경직된 매체가 된다.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분의 자본주의, 감성 자본주의는 자유를 이용한다. 기분은 자유로운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환영받는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주체성을 착취한다.
ㅡ 한병철 《심리정치》
육체가 얽매여 있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우리의 심리다.
‘세뇌’는 정보 차단으로 생각을 주입하거나 정보 과잉으로 판단력을 잃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빅데이터를 가진 권력 집단은 정보 차단과 정보 과잉을 동시에 쥐고 있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보며, 볼 수 있는 것만 볼 뿐이다. 외적 통제뿐만 아니라 심리 조작까지 같이 이뤄지고 있다. 일례로 ‘예스 세트’, ‘더블 바인드 기법’, ‘서브리미널 효과’를 살펴보자.
‘예스 세트’는 상대가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신뢰성을 높여 최종적인 질문에도 yes라고 대답하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더블 바인드 기법’은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랄 때, 그 일을 할 생각이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지를 준비해 질문하는 방법이다. 복수의 선택지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결과로 유도된다. 이 기법은 영업이나 판매 등에서 응용되고 있다. 자동차를 살까 말까 갈등하는 고객에게 “이 장치를 달아놓을까요?” 등등을 말하며 구매를 기정사실로 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법이다.
‘서브리미널 효과’는 판매하고 싶은 상품은 긍정적인 이미지와 연결해 반복해서 내보내면서 경쟁 후보는 불쾌한 영상이나 음악을 이용해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한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위험한 심리 조작이라 광고계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쓰고 있다.
ㅡ 오카다 다카시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 참조 (* 2016 개정판 《심리 조작의 비밀》)
‘예스 세트’, ‘더블 바인드 기법’은 밀턴 에릭슨이 심리 치료를 위해 개발한 기법이지만 심리 조작으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FBI가 비밀리에 심리 조작 연구를 지원했다면, 우리나라는 국정원이 비밀리에 댓글을 다는 뭐 그런 상황.
즉흥적인 기분, 척하는 삶, 셀프 노출증 속에 우리 이성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군주는 신의나 성실을 정말로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갖추고 있는 척을 해서 그렇게 여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ㅡ 마키아벨리 《군주론》
심리 이용은 오래전부터 정치술에 중요한 요건이었다. ‘심리 정치’는 신자유주의만의 특색이 아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로버트 제이 리프턴이 쓴 《사상 개조와 전체주의의 심리학》(1961)을 보면 전체주의, 테러집단, 다단계 집단, 사이비 종교가 심리를 조작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첫 번째, 외부의 정보나 사람의 접촉을 차단해 내면적인 생각까지 규제한다.
두 번째, 신비감을 조성해 목적을 위해 사명을 다하도록 신념을 만든다.
세 번째, 순수성을 요구해 다른 것은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
네 번째, 자기 폭로와 자아비판을 하도록 해 동료 사이 연대감을 높인다.
다섯 번째, 그들만의 교리를 과학적인 이념으로 만들어 의심하는 것을 죄로 만든다.
여섯 번째, 교조주의적인 정해진 표현을 사용한다.
일곱 번째, 이념을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놓는다.
여덟 번째, ‘생존 불허’라는 사고방식으로 복종을 강요한다.
ㅡ 오카다 다카시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 참조 (* 2016 개정판 《심리 조작의 비밀》)
밀턴 에릭슨 경우처럼 리프턴의 책도 심리 조작 용도로 많이 악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자본의 간계만이 아니라 종교, 이념, 사람으로 인한 심리 조작으로 사람은 갖가지 형태로 착취당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거다. 이득을 얻고자 하는 심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사회 속에서 애착과 신뢰 관계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고 문제가 발생하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피하기 어렵다. 의존성 인격 장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속으면서 또 믿을 수밖에 없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우린 안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ㅡ 칼 마르크스
ㅡ 한병철 《심리정치》 중
로빈슨으로 인해 방드르디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방드르디를 통해 로빈슨은 새로운 자유를 깨달았다. 방드르디가 다시 로빈슨의 하인이 되긴 하지만 이후 친구이자 동료 관계로 변화하는 과정은 자유와 종속의 상관성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떻게 되었나. 좋은 작품이 늘 그렇듯 미셸 투르니에《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이 속했던 문명을 거부하고 섬으로 돌아오지만, 경이롭게 자유롭던 방드르디는 새로운 문명에 심취해 섬을 떠난다. 그리고 죄디(목요일 - 어린아이들의 일요일)가 나타난다.
관계는 또다른 환경과 관계를 만나며 끝없이 변증법처럼 이어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자유와 예속처럼 사유와 심리도 한 몸에 있는데, 과연 사유하는 백치를 신뢰할 수 있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했지만 어쩐지 의심만 가득한 내 노력이자 한계로 이 글도 남는다. 끝이 아닌 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