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웠다.
“당시 김종삼에게 있어서 시란 릴케가 말한, 언어의 도끼가 들어가본 적이 없는 깊은 숲속에 숨쉬고 있는 순수한 어떤 것이다.”(故 최하림, <김종삼이 있는 풍경 2>)
이 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승우 <귓속말을 하는 황제와 사신-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을 읽으며>에 나오는 대목이자 Axt의 정신을 상징하는 다음 말과 괘를 이룬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ㅡ 프란츠 카프카
같은 말인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김종삼은 불가능한
접근에, 카프카는 가능한 접근에 더 방점을 찍는 걸로 나는 해석한다. 김종삼과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들의 작품은 언어의 도끼로 내려친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도끼로 내려쳤는데 그 중심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다음 리뷰와도 연결해 볼 수 있겠다.
노태복 필자가 주기율표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봄, 화학 수업에서 “원자
보셨어요?”라는 질문으로 교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리뷰까지 쓰게 된 딜레마를
말이다. 필자는 프리모 레비에 빙의해 이야기한다.
정신은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일 수 없는 불순물을 제거하려는 시기에 물질의 세계와 인간의 삶이 만나는 접촉 지점을
프리모 레비는 원자를 통해 이야기한 거라고.
“다른 원소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어떤 하나의 절대적으로 순수한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순물인 그런 물질들이 다양성의 터전에서 평등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파시즘에 짓이겨졌던 내 영혼은 원소들의 목록, 주기율표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노태복
<어떤 질문과 대화와
배웅>(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리뷰)
잠깐,
원자는 또 나뉜다. 원자 중심부에는
원자핵이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분류는 쿼크
6개, 렙톤
6개로 구분된다. 여기에 중력을 제외한 세 종류의
힘을 매개하는 매개입자들(게이지 보손)도 같이
따라다닌다. 게이지 보손은
QED(양자전기역학)의
광자, 약력의 W+, W−,
Z0(중성 흐름), 쿼크와 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 강력의 글루온을
칭한다. 쿼크는 세 가지 색도 있고 모든 입자는 각각에 대응하는 반입자 파트너도 갖고
있다(리언 레더먼,
딕 테레시 《신의 입자》
참고). 결국 도끼는 여전히 무언가를 깨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각자 방법을 찾는 중이고 어떤 결과란 각자가 보는 단편일 수
있다. 더 깊이 깨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인성 작가는
말한다.
감각의 한 모퉁이가 무너짐을 느낀다, 나는. 일어선 바람이 풍경을 흐린다. 급격한 침몰, 내 저항은 쉽사리 무너진다. 무슨 까닭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며 여울지는 그 느낌의 뒤 끝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찰나적인 풍경,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임에 틀림없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을 감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을 수 없는 저 너머를 드러냈던 풍경은 단순한 하나의 물리적인 대상으로 환원되어 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ㅡ 『낯선 시간 속으로』(문학과지성사, 1983, p182)
이인성 작가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당신 아버지의 생각대로 진화되어가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인성 : “뭔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그게 발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단순 반복도 아닌 것 같다. 이건 베케트 희곡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떠오른 건데, 그게 반복이라도 평면적인 원형의 반복은 아닌 듯하다. 가령 나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내려다보면 빙글빙글 원처럼 돌아가는데, 옆에서 보면 깊이가 있잖은가. 나사를 돌면서 아래로 파고들어간다. 어딘가 더 깊은 곳을 향해서. 그 깊은 곳이 어딘지는, 역시 잘 모르겠다. 이상향일까? 종말일까? 지독한 허무주의자였던 베케트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본 게 분명하다(중략).” (cover story 이인성+백가흠 <진정으로 있지 않은 있음과 없음>)
내가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지점에 있는 글들을 모은 하나의 앵글이다. 첫 번째 사진과 마지막 사진이 결정적으로 다른 연속 촬영한 사진들이랄까. 하지만 그 이미지들을 포개면 한 몸을 이룬다.
이번 호는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끝나는 구성이다.
손정수 필자는 이민자들의 나라에서도 더 이민자들의 공간인 뉴욕 브루클린을
소설의 주 무대로 하는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2017)을
‘미국 콤플렉스로부터 우아하게 벗어나고 있는
‘옥시덴탈리즘(오리엔탈리즘의 반대
개념)’을 활용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라고
말한다.
조용호 필자는 소설의
배경지에서 생업에 종사한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양헌석 『아메리카
홀리』(2016)가 미국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부조리를
말함과 동시에 ‘아메리카를 넘어 거대한 정신병동 같은 작금의 세상을 굽어보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권우 필자는 천승세
『황구의
비명』-「황구의
비명」(2007)이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기지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이 분단의 원인임에도 전쟁에서 체제를 지켜주었기에
오랫동안 스톡홀름증후군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한국 상황을 개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도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한다.
한설 필자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욕망의 비만 상태에 빠져 있는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2017)에서 우리 사고방식에 스며든 미국을 읽었다. 필자는 과학 저술가 게리 토브스 연구를 인용하며 비만율이 가장 높았던 미국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이나 비디오게임 같은 생활양식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산술적으로 취급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서도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김성중 필자는 ‘미국 유학’이라는 허풍선을 남발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손창섭 『잉여인간』-「잉여인간」(2005)이 60년 전 소설이라고 해도 “냉담한 관찰을 통해 얻은 인식을 아무 데도 꿰지 못하는 무기력함”, “통속으로도 허위로도 가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젊은이” 모습에서 지금을 읽었다. 손창섭, 김승옥, 장용학 등 당대 빼어났던 작가들이 일본어의 번역투로 쓰였다는 점,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담았던 것들에서 “역사와 욕망과 세대와 삶이 침윤되고 범벅이 되는 한국소설 또한 ‘미해결의 장’이 아닌가” 말한다.
함성호 필자는 남정현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2004)에서 북한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돼 용공 탄압 제1호였던 「분지(糞池)」에 집중한다.
“반일민족주의는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지만, 북에 우호적이거나 반미민족주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민족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에서 나오는 애착심이 대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이런 세상’은 뭔가 이상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당시 남정현 씨와 변호인단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승복이 아니라 체념으로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변호인이었던 한승헌은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필화는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필화가 있다는 것은 규제자의 억압과 작가의 수난을 생각할 때 불행한 일이고, 필화가 없다는 것은 작가의 무력이나 문학 부재의 반사적 평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불행하다.”
미국과 연루된 우리 모두의 노스탤지어에 대해 잘 보여준 글이라고 생각된 것은 이번 호의 마지막 기고 글이기도 했던 김보경 필자가 쓴 콜럼 토빈 『브루클린』(2016) 리뷰였다.
“홀로 타지로 이주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멀쩡하게 돌아다녀도 유령이 된 듯한 기분. 방에 들어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영 깨지 않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이곳이 딱히 나에게만 배타적인 것도 아닌데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기분. 성인이 되어 집으로부터 독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립감을 매우 고통스럽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삶이 주는 즐거움이 생겨난다.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라는 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그곳을 떠나온 데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 다양한 아메리칸들이 함께 만들어낸 관용의 정신이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꿈의 땅으로 만들었다. 김진웅이 쓴 『미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는 “신생 공화국 미국의 비공식적인 표어는 ‘결코 뒤돌아 보지 마라’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미래만 바라보고 모인 이들이었기에 기존의 관습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만 했다면,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 미국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메리카는 관대한 타향이 아니다. 그곳을 지탱하던 관용의 정신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낡은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회, 계층 이동의 기회가 없는 사회, 하층 계금과 빈곤층이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된 지금, 미국은 그들의 선조들이 떠나왔던 과거 신분제 사회의 유럽과 같은 곳이 되었다. 2016년 미국을 휩쓸었던 논픽션 『힐빌리의 노래』가 보여주었듯이 이주 노동자들의 후세대들이 백인 하층 계급으로 몰락하고 재생산되고 고착화되고 있고, 그런 사회에서 관용의 정신은 뿌리내릴 토양은 없다.
오늘날 태어난 곳에서 자라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본인이 미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음에도 그곳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아메리카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던 전세계의 이민자들, 그들의 청춘을 지켰던 그 관대한 타향은 또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다시 처음의 주제를 돌아오면 미국은 우리 내외부에 속속들이 관련된 세계의 요소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소도 복잡하고 상반되는 것들이 뭉쳐 만들어지는 물질인 걸 생각하면 이 세계의 지난한 상충들도 자연의 이치겠다. 불 났는데 도 닦는 소리일까.
이 글을 쓰느라 식은 된장찌개를 다시 데우기 위해 일어선다. 어쨌든 오늘을 성실히 살아 봐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ps)
보통 200페이지가 훨씬 넘던 것에 비해 이번 호가 좀 얇아서 더 빨리 읽을 수 있었나 싶은데 글의 질과 편집이 좋아 술술 읽은 거다에 더 손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1월에 하는 일도 술술 풀리라고 이렇게 하신 건가ㅋ Axt 처음으로 완독해서 엄청 기뻐요 T^T)!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기획 글도 좋았는데 리뷰가 너무 길어져서 그 부분은 책을 산 저 혼자 즐기는 걸로ㅎ)~
제가 산 《Axt》는 대체로 품절되는 경향이 있는 듯? 천명관 편, 듀나 편, 파스칼 키냐르 편. 그러니 저처럼 띄엄띄엄 사시는 분들은 이번 호 사시는 걸 권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