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음유시인 에밀 시오랑의 책이 모조리 절판이던 시절 도서관을 이리저리 찾아 빌려 읽으며 그의 문장에 대한 내 열광은 정말 대단했다. 메모가 거의 필사가 됐던 터라 개정판이 나왔을 땐 그다지 필요 없었지만 실물 책으로 갖고 싶긴 해서 중고책으로 모았다.

중고책을 사다 보면 누군가 확신을 담아 책장을 접어둔 표시를 종종 본다.

밑줄만큼이나 눈길을 끌어 그 페이지를 유심히 본다.

누군가 도착했다 떠난 흔적, 
내 책이라 하기 아직 어색한 순간.

그 접힘은 밑줄보다 풍부하며 모호하다.

그러나 어떤 문장 때문이었는지 기어이 짐작하게 되고 ‘당신은 그때 그랬군요‘ , ‘나도 어쩌면‘ , ‘그렇지만...‘ 마음으로 얘기를 건넨다.

절망을 노래하는 작가의 혼잣말, 우리의 혼잣말.

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접힘을 조심히 편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 글도 당신이 목격하게 된 하나의 접힘이다.

책은 매 순간 모든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르쳐준다.
하나의 옷, 하나의 페이지.

책의 모든 여백은 우릴 위해 마련된 것 같지.
각각의 공간, 각각의 세계.

서로가 서로에게 전달자가 되는 시간, 이 긴 릴레이.

우리는 함께 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영원히 그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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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2 14:22   좋아요 0 | URL
시오랑은 언제 읽어도 울컥 하게 만드는 게 있어요^^ 하루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시오랑도 한 번 빠져든 사람은 잊기 힘들고 다시 찾게 되죠.
↓밑에 계신 pek0501님처럼^^

페크pek0501 2018-01-02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53쪽.
....................

에밀 시오랑의 광팬이 남기고 갑니다.

AgalmA 2018-01-02 14:24   좋아요 0 | URL
잘 알죠^^ 제가 pek0501님께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에밀 시오랑 때문인 걸요. 좋아하는 작가가 같다는 건 얼마나 친근한 일입니까(>_<)!

2018-01-02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1-02 23:23   좋아요 1 | URL
제가 언젠가 불면에 대한 책을 읽고 정리를 해드리겠다 말씀드린 적 있는데 다른 책이랑 꼬여서 다 못 읽고 말아서 흐지부지 됐죠. 다시 읽어야 하는데 이것참...
마이클 브레우스 <WHEN 시간의 심리학> 한번 읽어 보시죠. 그 방면 책을 많이 읽으셨을 거 같아서^^; 사지는 마시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불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진화적 체질적 이유, 환경적 생활적 개선 방안을 알려 주는데 참고할 부분이 있어요.그 책에 대한 리뷰 함 읽어 보세요. 알라디너들이 쓴 게 몇 개 있더군요^^

2018-01-02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8-01-03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을 다시 담으며. 아갈마 님 새해에도 멋진 페이퍼 자주 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좀 뜸했지요. 서재의달인도 그래서 2015 이후 못 들고 ㅎㅎ 무술년 복 많이 받으세요

AgalmA 2018-01-03 18:10   좋아요 1 | URL
책 준비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 뜸하셨다고 섭섭하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제 페이퍼가 멋진 건 잘 모르겠지만 좀 웃기긴 하죠ㅎ?
안부 인사 주셔서 감사드리고 프레이야님도 올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