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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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戱曲)이 하나의 문학 장르이고, 그것은 ‘읽히는 것’이지만, 연극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상연(上演)’되어질 때 의미가 있다. 간혹 중 ․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소설, 시, 수필, 희곡의 장르 구분과 그것들의 특징에 대해 배우면서, 희곡은 상연을 목적으로 한다고 들었다. 하긴 상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그러니까 연극(演劇)으로 나아가지 않고, 희곡으로서만 끝나는 그런 희곡도 존재하긴 한다. 그런 특이한 희곡을 제외하고, 자로고 희곡은 상연되어져야 제 맛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못내 떠나질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하면,『고도를 기다리며』가 따라오고, 거기에 또한 ‘부조리극(不條理劇)’이란 어려운 말이 따라온다. 오늘날 세계의 고전이요, 정전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의 이름과 그의 작품은 유명하다. 그런데 내 부끄러운 치부하나 드러내야겠다. 우선,『고도를 기다리며』는 알고 있으면서도 ‘고도’가 뭘까? 고민해야 했다. ‘설마 고도(高度)나 고도(古都)는 아니겠지’ 그래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늘 이 작품에 따라오는 ‘부조리극’이니 ‘부조리’니 하는 말의 의미 또한 사실 크게 관심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비만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에 그 중대한 이름 ‘고도’는 누구(무엇)인가? 왜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는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의 그 ‘님’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한용운의 ‘님’이 사랑하는 연인이기도하고, 부처님이기도 하고, 어떤 초월적 절대자이기도 한 것처럼, 이 ‘고도’ 또한 무엇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님’과의 어떤 암묵적 약속과도 같다. 이 또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고도’와의 약속과 어떤 면에서 동일하다. ‘님’이나 ‘고도’나 언제 올지는 몰라도, 그들이 올 거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한용운이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나 모두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용운은 과연 ‘님’을 만났을까? 나는 잘 모른다. 살아서는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또한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 내가 볼 때 그들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한용운은 저 극락에 가서 그 ‘님’일 것으로 추정되는 부처님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 황량한 들판에 앙상히 서 있는 나무에 목을 매달았을 때에 진정 ‘고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은 정말이지 무작정이다. 왜 그를 기다리는지, 그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무엇이 해결될 것인지는 전혀 불명확하다. 그는 과연 무엇이기에 그들은 그토록 ‘고도’를 기다리는가? ‘고도’를 만나면 그들은 구원받는가? 이 작품에서 구원은 어쩌면 죽음과 동일어가 아닐까?

  중요한 것은 ‘고도’가 누구이고, 그를 만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살아있게,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와 거기에서 오는 삶의 의미부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뿐 아니라, 인간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다림, 그것이 삶의 희망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 인간은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2막으로 된 짧은 이 희곡을 읽으면서, ‘부조리극’이 가지는 특징들에 공허해 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뭔 소리들인지, 왜 이를 쓸데없는 상황과 장면과 대사들이 오고가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이름 모를 ‘고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그런 우리의 삶이 이렇게 ‘부조리(不條理)’하고 이해될 수 없는 행위와 상황의 연속이지 않은가를 반문할 때, 나는 이 희곡『고도를 기다리며』가 왜 오늘날 세계문학의 고전이 되었는지를 수긍할 수 있었다.

  짧은 이 희곡을 후다닥 읽으면서 남는 아쉬움이라면, 이 작품을 연극으로 만났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희극적 모습들을 희곡으로만 ‘읽혀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희곡은 그래서 연극으로 상연되어야 그 가치와 의미가 최대한 살게 되는 것이리라. 기회가 되어 이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된다면 관람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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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33~36은 비문학 제재, 철학관련 지문이다. 인식론에서의 지식의 유형에 대한 설명으로 독해상 크게 어렵지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대체적으로 제시된 지문을 어느정도 이해했다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들로 출제되었다.

[33~36]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지식의 본성을 다루는 학문인 인식론은 흔히 지식의 유형을 나누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식의 유형은 ‘안다’는 말의 다양한 용례들이 보여 주는 의미 차이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와 ‘그는 이 사과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에서 ‘안다’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전자의 ‘안다’는 능력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절차적 지식’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안다’는 정보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표상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자전거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며, 자전거를 탈 줄 알기 위해서 반드시 자전거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 정보 없이 그저 넘어지거나 다치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될 수도 있다.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라’와 같은 정보를 이용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사람이라도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게 된 후에는 그러한 정보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도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다. 자전거 타기 같은 절차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나 특정한 정보를 마음에 떠올릴 필요는 없다.

반면, ‘이 사과는 둥글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둥근 사과의 이미지가 되었건 ‘이 사과는 둥글다’는 명제가 되었건 어떤 정보를 마음속에 떠올려야 한다. ‘마음속에 떠올린 정보’를 표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지식을 표상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떤 표상적 지식을 새로 얻게 됨으로써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하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표상적 지식은 절차적 지식과 달리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능력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표상적 지식은 다시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경험적 지식’과 ‘선험적 지식’으로 나누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경험적 지식이란 감각 경험에서 얻은 증거에 의존하는 지식으로, ‘그는 이 사과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가 그 예이다. 물리적 사물들의 특정한 상태, 즉 사과의 둥근 상태가 감각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입력되고, 인지 과정을 거쳐 의 표상적 지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직접 만나는 개별적인 대상들로부터 귀납추리를 통해 일반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따라서 자연 세계의 일반 법칙에 대한 지식도 경험적 지식이다.

한편, 같은 표상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2+3=5’를 아는 것은 ‘이 사과가 둥글다’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2+3=5’라는 명제는 감각 경험의 사례들에 의해서 반박될 수 없는 진리이다. 예컨대 물 2리터에 알코올 3리터를 합한 용액이 5리터가 안 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 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감각 경험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지식이 선험적 지식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경험 이외에 지식을 산출하는 ⓔ다른 인식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수학적 지식이 그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믿는다.

33.  위 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1점]

①‘앎[知]’이란 어떤 능력이나 정보의 소유를 의미한다.

②절차적 지식은 다른 지식 유형의 기반이 된다.

표상적 지식은 특정한 수행 능력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④경험적 지식은 표상적 지식의 일종이다.

⑤감각 경험의 사례를 근거로 선험적 지식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33번은 내용 일치 문제이다. 절차적 지식이란 '능력의 소유를 의미'한다. 자전거 타기가 그러한 지식에 해당된다. 이런 절차적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마음에 떠올릴 필요는 없다." 특정 정보를 알고 있어도, 또는 모르고 있어도 '자전거 타기'에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차적 지식이 다른 지식 유형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정답은 ②이다.

34.  밑줄 친 말이 의미하는 바가 표상적 지식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①나는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을 알아.

②나는 세종대왕을 알아. 그분은 한글을 창제한 분이시지.

우리 아저씨만큼 개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아직 못 봤어.

내 동생은 2를 네 번 더하면 8인 줄은 아는데, ‘2×4=8’은 모른단다.

⑤퀴즈의 답이 ‘피아노’인 줄 알고 있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어.

 

문항 34에서는 제시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식의 유형, 즉 절차적 지식과 표상적 지식을 구분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절차적 지식은 '능력의 소유를 의미'하고 표상적 지식은 '정보의 소유를 의미'한다. ③ "개를 잘 다룰 줄 아는"에서는 '개를 잘 다루는' 능력의 소유를 의미하므로 절차적 지식에 해당한다.

35. ㉠으로부터 ㉡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생략된 전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귀납추리는 일반 법칙에 기초해 있다.

② 귀납추리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확장해 준다.

③ 귀납추리는 지식의 경험적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④ 귀납추리는 지식이 경험 세계를 넘어서도록 한다.

귀납추리의 결론은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35번 지문에 진술된 문장에서 생력된 전제를 찾을 수 있는 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직접 만나는 개별적인 대상들로부터 귀납추리를 통해 일반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와 "따라서 자연 세계의 일반 법칙에 대한 지식도 경험적 지식이다."라는 논리적 과정에서 어떤 전제가 생략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전제라고 하는 것은 어떤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 미리 갖추어져 있어야 할 명제이다. 우선 위의 문장을 살펴보면 '귀납추리를 통해 일반 법칙에 도달'하고 그렇게 도달한 '일반 법칙에 대한 지식도 경험적 지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여기에 '귀납추리'와 '경험적 지식'에 대한 어떤 관계 설정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생략된 전제로는 ③ 귀납추리는 지식의 경험적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가 가장 적절하다.

36.  ⓐ~ⓔ를 바꿔 쓴 말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점]

① ⓐ: 천명(闡明)되기도       ② ⓑ: 습득(習得)한

③ ⓒ: 의거(依據)하여         ④ ⓓ: 형성(形成)된

⑤ ⓔ: 별개(別個)의

 

36번 문항을 어휘력을 측정하고 있다. 한자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 정답은 ①이다. ⓐ드러나기도 에서 '드러나다'는 "가려 있거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널리 밝혀지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천명(闡明)'은 '진리나 사실, 입장 따위를 드러내어 밝힘.'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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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 서재의 달인
 
 
지난 일주일간의 서재 지수 순위입니다(매일 업데이트).
매주 수요일, 주간 서재의달인 순위를 바탕으로 30여분께 축하 적립금 5,000원을 지급합니다.

 94. 멜기세덱님

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여름에 80위권까지 올라간 기억이 있습니다만은,,참으로 오랜만에 100위권내에 진입했습니다..ㅎㅎ

'에브라임'이란 말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는 순위를 높여, 적립금 5,000원을 타 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5,000원 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입니다.

고백합니다만,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참 많이 배우고, 좋은 분들, 멋진 분들을 뵙습니다.(바람구두님께서 그러하고, 마태우스님께서 그러하매, 이매지님께서 그러하고, 마노아님께서 또한 그러하시며, 아프락사스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이 이름들 외에도 많은 알라디너분들께서 그러하십니다.)

이런 분들 속에서 저의 기쁨은 커져만 갑니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그 감사한 만큼이나 저도 이 서재를 알차게 꾸려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도 위의 분들처럼 또한 멋진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겠다는 기대와 바람입니다. ㅎㅎ

그렇게 된다면, 저의 서재지수는 자연스럽게 높아만 가고, 순위도 상승할 것입니다. 순위에 아랑곳해서는 아니되지만, 순위가 올라간다는 것은 나름의 기쁨입니다. 적립금은 그 기쁨에 비할 바 못되지만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알라디너 여러분! 당신들은 제게 "책 읽는 기쁨" 그 이상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주간 페이퍼의 달인
 
 
지난 일주일간의 페이퍼 지수 순위입니다(매일 업데이트).

54. 멜기세덱님

주간 페이퍼의 달인은 사상 최고 순위를 경신했네요. 54위 입니다.

그런데, 그리 썩 달갑지 많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리뷰를 많이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 한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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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저도 아주 오랫만에 진입했습니다.

마노아 2006-11-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님의 기쁜 마음이 전해져서 따뜻해요^^
 

제 마음은 항상 크리스천인데, 몸이 안 따라와 줄 뿐이랍니다. ㅎㅎ

평소 ccm이나 복음성가, 찬송가를 즐겨듣는 편이에요. 왠지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나라 ccm 가수들(흔히 '찬양사역자'라고 부르기도 하죠.)의 가창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이 왠만한 인기있는 대중가수들보다 훨씬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해요.

그 중에서도 이 ccm 가수의 실력이 단연 돗보입니다. 들을 때 마다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에요. 크리스천들에게는 "노래를 잘 하건 못 하건 간에, 온 마음과 정성으로 찬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또한 귀한 일일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상관없이, 오히려 잘 모르시는 분들께 들려드리고 싶네요.

 

소향이라는 가수입니다. '반석위에'라는 노래입니다. 노래의 후반부에 클라이막스가 가히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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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22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향, 목소리가 참 시원하죠. 이렇게 트인 목소리 참 좋아요^^
헌데, 왜 재생이 안 될까요..ㅠ.ㅠ

멜기세덱 2006-11-2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게요, 재생이 안되네요...ㅜ.ㅜ;; 제가 이거 컴맹수준이라..대강 복사해다 올렸더니...허 참!!

멜기세덱 2006-11-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제는 됩니닷!! 즐감하세요.

마노아 2006-11-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안 보여서 네이버에서 검색해서 들어봤어요. 그때 들어가본 블로그에서 "파송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어보니 참 좋더라구요. 왠지 찡...했어요^^
 

문항 28~32는 시 지문에서 출제되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육사의「교목(喬木)」을 비롯해 신석정의「들길에 서서」와 김종길의「고고(孤高)」등 세 편이 출제되었다. 신석정의 시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김종길의 시는 다소 난해한 면이 있어 학생들이 시를 독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반적으로 출제된 문항이 난이도가 높아, 이번 언어영역 시험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까다로웠다고 할 수 있겠다.

[28~32]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이육사, 「교목(喬木)」 -


(나)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들길에 서서」 -


(다)

북한산(北漢山)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白雲臺)나 인수봉(仁壽峰)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라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 김종길, 「고고(孤高)」 -

 

28.  (가)~(다)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가)와 (나)에는 현재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가)와 (다)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해소된 조화로운 상태가 구현되어 있다.

③(나)와 (다)에는 일상생활의 소중함에 대한 자각이 나타나 있다.

④(가), (나), (다)에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⑤(가), (나), (다)에는 화자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삶의 자세가 담겨 있다.

 

문항 28은 각각의 시에 대한 알맞은 설명을 고르는 것이다. (가) 시에서 나타난 화자의 현실 인식태도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나) 시에서는 현실 인식의 긍적적 태도를 엿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따라서 ①의 설명은 (가) 시에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적절하지 못하다. 시 (가)와 (나)에서는 모두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해소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 상황에 대해 화자의 고뇌와 '기다림'의 정서를 찾을 수 있으므로 ②의 설명또한 잘못이다. ③의 설명은 시 (나)에만 해당된다고 하겠다. ④의 설명은 시 (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답은 ⑤이다.

29.  (가)와 (나)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상의 특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점]

① 비유와 상징을 통해 시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② 어조의 변화를 통해 시적 긴장을 높이고 있다.

③ 동일한 색채어를 반복하여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다.

④ 공감각적 표현으로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⑤ 화자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29번은 (가)와 (나)의 표현상의 고통점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출제된 문항 중에 가장 용이하게 풀 수 있었을 듯 하다. 정답은 ①이다. 시 (가)에서는 어조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②의 설명은 적절하지 못하다. ②의 색체어 반복은 (나) 시에만 해당된다. (가)에 '푸른'이라는 색체어가 나오지만 반복되고 있지는 않다. 공감각적 표현은 양 시 모두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므로 ④의 설명은 해당되지 않는다. ⑤의 설명 또한 해당사항 없다.

30.  <보기>는 (가)에 대한 심화 학습을 위하여 수집한 자료이다. 이를 참고하여 토의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 기>

 

 

 

 

【백과사전】

이육사: 시인. 1904년 경상북도 안동 출생. 항일 독립 투쟁로 20여 차례의 투옥 끝에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함.

 ․작품 경향: 저항 의식, 실향 의식과 비애, 초인 의지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 등을 주제로 삼고 있음. 정제된 형식미와 안정된 운율감을 보임.

 ․「교목」: 1940년 ꡔ인문평론ꡕ 7월호에 발표.

【국어사전】

교목: 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게 자라는 큰 나무.

【인터넷 자료】

 ․ꡔ맹자ꡕ에 따르면, ‘교목’은 오랜 세월 덕을 닦아 임금을 도(道)로써 보필하여 나라를 떠받치는 신하를 의미한다.

 ․시인은 빈궁과 투옥과 유랑의 사십 평생에 거의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문학청년은 아니었으나 삼십 고개를 넘어 시를 쓰기 시작했고, 혁명적 열정과 의욕을 시에 의탁해 꿈도 그려 보고 불평도 터뜨렸던 것이다.(ꡔ육사 시집ꡕ 발문)

①이 시의 제목은 나라를 위한 시인의 절개와 기상을 표상한 것이다.

이 시의 행 배열과 연 구성에서도 이육사 시의 형식적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낡은 거미집’은 시인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끝없는 꿈길’은 시인의 혁명적 열정과 의욕을 함축하고 있다.

‘바람’은 이국을 떠돌던 시인의 실향 의식과 저항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문항 30번은 함정이 숨어 있는 문제였다. 주어진 <보기>의 자료가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것을 고르는 문제로서 정답은 ⑤이다. '바람'의 의미를 시 안에서 갖게되는 것이므로 시의 내용을 근거로 해야한다. 따라서 '바람'은 시적 화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이나 고통 등으로 파악되므로, ⑤의 설명은 적절하지 못하다.

31.  <보기>는 (나)와 (다)를 자료로 한 수업의 일부이다. 학생들의 의견 가운데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 기>

 

 

 

 

선생님: (나)와 (다)의 기본적인 짜임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어요.

 

 (나)                        (다)

  

1~2연

 

3~4연

 

5~6연

 

 

   

1연

 

2~3연

 

4~6연

 

 

  A        B       C       A       B       C

 

  이제 두 시를 자세히 읽고, 시상의 전개에 대해 의견을 말해 볼까요?

①(나)에서 A의 두 연은 ‘하늘’, B의 두 연은 ‘지구’, C의 두 연은 ‘푸른 별’이라는 시어를 통해 각각 결합되고 있어요.

(나)는 A에서 ‘하늘로 팔을 드러내는’ 숭고함을, B에서 ‘땅을 디디고 선’ 기쁨을 그리는데, 이것들이 C의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보는’ 거룩함으로 연결되고 있어요.

③(나)는 (다)와 달리 A의 내용이 B에서 응축되고, B의 내용이 C에서 더 응축되고 있어요. A에서 C로 갈수록 묘사의 범위가 좁아지면서 의미가 심화되는 것이 특징이에요.

(다)의 A, B, C는 모두 ‘기다려야만 한다’는 말로 끝나고, ‘겨울’이라는 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지요. 반복이 이 시의 특징이에요.

⑤(다)는 (나)와 달리 A는 한 연, B는 두 연, C는 세 연으로 늘어나요. 그러면서 B와 C는 A의 시상을 상세화하고 있어요.

 

31번은 (나)와 (다)의 시상 전개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고 있다. 시 (나)는 1~2연의 '숭고', 2~3연의 '기쁜 일', 3~4연의 '거룩한 나의 일과' 등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각각이 대등하게 나열되고 있다. 따라서 시의 내용이 뒤로 갈 수록 응축되고, 묘사의 범우가 좁어지면서 의미가 심화된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못하다.

32.  (다)에 대한 감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점]

‘옅은 화장’은 산봉우리에 눈이 살짝 쌓인 모습을 나타낸 것이야. 산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어.

‘차가운 수묵’은 겨울 산의 모습을 그림에 비유한 거야. 대상의 속성이 드러날 수 있는 정황을 묘사하고 있어.

③‘신록’, ‘단풍’, ‘안개’는 겨울이 아닐 때의 산의 모습을 나타내. 이들과의 대비를 통해 겨울 산의 의미를 부각하고 있어.

‘왼 산을 뒤덮는 적설’은 가볍게 눈에 덮여 있는 상태와 호응하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산봉우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어.

‘장밋빛 햇살’은 가볍게 눈 덮인 산봉우리의 속성을 ‘변질’시키지. 그럼으로써 화자가 형상화한 산봉우리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해.

 

32번에서는 각 선지에 사용된 설명 어휘 하나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자칫 틀리기 쉬운 문제였다. (다)에 대한 감상으로 적절하지 못한 것은 ④으로, '왼 산을 뒤덮는 적설'은 가볍게 눈에 덮여 있는 상태와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응'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못하다.

이상의 문제를 통해 볼 때, 이번 언어영역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었다고 판단된다. 다소 난해하게 생각될 수 있는 김종길의 시와 더불어, 각 문항에 숨겨져 있는 교묘한 함정들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이번 언어영역의 승패는 이 시 지문에서 출제된 문항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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