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카드가 이제 왔네요. 굳이 크리스마스 카드랄 것은 없겠네요. 어중간 하지만 그저 새해맞이 연하장이라고 해두죠.ㅎㅎ

얼마전 멀리 있는 후배에게 제가 뜬금없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답니다...

그냥 문구점에서 파는 흔한 카드를 사서 몇자 적어보낸 것 뿐인데, 그 후배도 그걸 받고는 부랴부랴 카드를 보내려 준비했나 봅니다. 그게 이제 왔네요.

아마도 때 늦은 김에 보다 정성드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나봐요..ㅎㅎ

오늘 그 후배에게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받았습니다. 우편으로 보냈더군요.

저는 뭐 잊고 있었서 이 후배가 이걸 왜 보냈을까 생각했습니다.

내용물은 책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그 후배가 난데없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책을 읽어보았냐고 물어보더군요. 그 생각이 나서 아마도 이 친구가 그 책을 보냈나보다 했는데, 뜯어보니 역시 그 책이더군요...ㅎㅎ



 

 

 

그런데, 중요한 건, 책 표지를 한 장 넘겨보니 그 안에 자그마한 카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보내야지 하면서 늦어진 데 대한 미안한 마음에 책을 덤으로 보냈다보다 하며, 그 후배의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다 했어요. 그런데 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카드 안에 있었답니다.

위의 그림이 잘 보이시나요? 제 핸드폰으로 찍은 거라, 잘 안나왔나봐요...ㅎㅎ
자그마한 카드를 열어보고 저는 뒤로 자빠질 뻔 했답니다. 그 그림이 카드안에 붙어 있더군요. 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
폭소폭발이었습니다. 그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누구야?! 라고 묻지 마세요. 저도 몰라요...ㅜㅜ"ㅋㅋ

어떻게 저랑 비슷하나요? 제 서재메인에 제 사진이 있는데요. 제가 볼 땐, 제 실물보다 훨씬 좋게 그린것 같아 고맙더라구요. 기뻤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후배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네요.

선물을 한다는 것은 참 즐겁고 기쁜 일인 거 같아요. 줄 때에 무엇을 바라고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배로 되어 돌아오더군요.ㅎㅎ 얼마전에 한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책 한 권을 보냈더니, 나중에 제 생일때는 책2권이 오더라구요...ㅎㅎ

선배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의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잊지않고, 이런 따뜻한 선물과 카드를 보내온 후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고, 이런 후배를 가지고 있는 저를 알라딘 여러분들께 자랑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기네요...ㅎㅎ

어제, 이 책 <국밥>을 읽었는데요,

 

 

 

 

여기에 기쁨과 즐거움의 차이점에 대한 얘기가 있더군요. 우리가 알게모르게 사용하던 낱말들인데, 그 둘의 가장 큰 차이가, 감정의 세기, 그러한 감정의 지속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의 원인이 어디서 오느냐 등이더군요. 사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닐듯합니다. 기쁨을 주는 것은 그것이 나중에는 즐거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네요.

오늘 전 후배에게서 큰 기쁨과 앞으로의 즐거움을, 그 둘 모두를 함께 받았습니다. 카드를 받는 기쁨, 환하게 웃음짓게한 그 그림으로 얻은 기쁨과, 보내준 책을 읽는 즐거움, 그리고 항상 그 그림을 바라보면서 얻게 될 즐거움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네요...ㅎㅎ

이런 행복을 준 후배에게 앞으로는 더욱 잘 해줘야 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선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작지는 소중한 행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게 아닐까요? 오늘 하루 저는 그것을 확신하게 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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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1-24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기쁜 마음이 글 속에서 절절이 묻어나요. 저도 같이 기뻐지는 걸요. 멜기세덱님 축하해요^^ 그리고 그림 많이 닮았는 걸요^^

조선인 2007-01-24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

마늘빵 2007-01-24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크리스마스

프레이야 2007-01-2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닮았어요. 잘 그렸네요. 정성스런 크리스마스카드, 늦어도 기쁘셨겠어요.^^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종석이란 이름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이전에 아는 바 없었고, 지금도 제대로 아는 바 없는, 내게는 그런 인물이다. 알라딘에 거하면서 그 이름을 은근히 자주 보게 되었던 것이 이 책과 나의 인연을 맺어주었을 것이다. 특정의 누구를 거론하진 않겠지만, 이 자릴 빌어 그 분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나름대로 괜찮은 책 한 권 읽게 해 주었고, 글 잘 쓰는 한 저자를 알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감염된 언어>를 읽고 난 후의 지금, 나는 고종석의 다른 책들에 기웃거리고 있다. 그만큼 <감염된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 고종석이란 이름에 적잖은 매혹을 경험했다고 해야겠다.

다소 빈약해 보이고(요즘 책들은 양장본이 아니더라도 책 표지가 반양장처럼 다소 딱딱해 어느정도 무게감이 있다.) 글자 크기도 좀 큼지막한 듯 하고(재보지는 않았다.), 쪽수도 몇쪽 안되는(271쪽에 달하긴 하다. 비슷한 쪽수를 가진 다른 책과 비교해보니 이 책의 두께는 2/3정도 밖에 안된다. 그만큼 안돼보였나 보다.) 이 책을 대면한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고 해야겠다. "감염된 언어-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라는 제목이 그만큼 가벼워지고, 별반의 흥미를 더해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요즘 책들의 화려한 외장에 내가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의 외장은 확실히 요즘의 책들보다 좀 떨어진다. 그러나!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그 외장 두로 숨겨둔 고종석의 유쾌한 필력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개마고원의 편집자는 그것을 이렇게 귀뜸해 주고 있었다. "편집자 주 - 본문에 나오는 외래어의 표기는 필자의 요구에 따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 저자와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대중에게 팔리려 할때에 그 책은 사적 소유에서 공적 소유로 그 성질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으례히 한글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출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 굳이 이런 편집자 주를 단 것은 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도 들린다. "이 책을 읽으려면 단단히 각오하고 읽으시기를." 과연 어떻길래?

무엇인가 의미있는 책에서는 무엇하나 남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독자들을 압도하는 책치고 나쁜 책이 없다고 본다. 누가 감사하고, 누가 고맙고, 누구의 덕이라느니 하는 인사치례만 늘어놓은 서문들을 나는 경멸한다. <감염된 언어>의 서문은 내가 경멸하는 그런 종류의 서문이 아니다. '서툰 사랑의 고백'이라지만, 강력한 '자유주의자'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언어)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그 '감염된 언어'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순수 국어를 주창하는 우리 국어학자들이 들으시면 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민족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만큼 누구 못지 않은 한국어 사랑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감염된 언어'를 사랑한다는 고백에서 우리는 저자의 붓이 어디로 흐를 것인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디로 흐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서문에 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볼 대목은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대목이다. 271쪽의 이 책에서 이 부분이 100쪽이 넘으니, 가히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만큼 필자가 이 대목에 할애한 사고의 분량이 많을 것이리라. 나는 '영어공요어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결사반대쯤이라고 해두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그 때 가서나 해라 정도라고 해두자. 그런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영어공용어화를 쌍수들고 찬성하는 쪽도 아닌듯하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촉발시킨 당사자 복거일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는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논쟁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관된 '개인주의', '자유주의자'의 자신의 견해를 투영해 간다. 그런 그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미움이 가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내가 느낀 것은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다 차분히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 영어로 하는 강의의 비율을 높여가고 있고, 나날이 영어의 중요성은 높아져만 가고 있는 현재, 영어공용어화는 논쟁이 아닌 대세로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사를 해서 반대해야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해서 되는 것도 아닐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종석처럼 차분히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어디까지 그의 논리에 동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와 내가 달리하는 견해는 또 있다. 국한혼용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공식적 국한혼용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역시 그의 입장과 달리한다. "내게는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표의적이다. 즉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그게 과장이라면, '대한민국'이 적어도 '大韓民國'만큼은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의 꼴이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보다 더, 또는 적어도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 못지않게, 눈에 익숙한 탓이다."라는 그의 견해와 나는 반기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일 때에 그 의미는 사라진다. 단순히 우리나라의 국호로만 기능할 뿐이다. 국호에 담긴 그 이름은 사라진다는 얘기다. '大韓民國'일 때의 큰 나라,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나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의 의견을 또한 존중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또한 느끼는 것은 그와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낀다. 아마 이것이 고종석의 필력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향가와 고려가요에 대한 저자의 글이다. 무엇보다 모든 글에서 저자의 자유로운 생각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움직임을 나는 꽁무니를 부여잡고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움직임의 춤사위를 감상하면 그만일 것이다. 거기에 고종석이란 인물의 밉지 않은 생각들을 접하고 웃음지어주는 그만인 것이다. 나를 긴장시키는 그의 글을 나는 계속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나를 동화시키더라도, 나는 고종석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기위해 그를 가까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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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22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상당히 매력있고 설득력있는 글이죠. 그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시면 반하실 겁니다. 고종석 팬들이 많군요.

글샘 2007-02-07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석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습니다. ^^ 그는 가진자의 논객을 따름이죠.
맘만 먹으면 프랑스에 가서 몇 년 살다 올 수 있는...
극우꼴통은 아니지만, 보수주의자 중에 좀 멋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아무리 읽어봐도 마음엔 안 듭니다.
 
감자 배따라기 어린 벗에게 용과 용의 대격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
이광수.김동인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지난 해 가을쯤, 창비가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50권 완간을 자축하면서 대대적으로 할인예약 판매를 한 적이 있다. 역시나 나는 혹해서(무려 40%를 깎아 준다기에) 다소간 무리를 각오하고 이 시리즈를 구입하였다. 창비의 이 시리즈 완간은 자못 그 의의를 높이 살만 하겠다. 무엇보다 지난 격동의 20세기 우리 문학을 정리하는 한 차원에서, 그 거대한 작업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아 내었다는 것이 크게 높이사야 할 업적이다. 차후로 소설 외에 문학 전반에 걸친 작업이 시도되어야 하겠고, 이것은 그 초석을 마련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이 시리즈를 구입하기까지 내게는 얼마간의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름의 국문학도라고 자처하는 나로서는 일반인의 교양 수준 이상의 (준)전문가적 역량이 요구되어진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간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읽어 내려는 그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아직도 크게 변함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를 구입하는 것은 내게 얼마간 불필요한 일은 아닐까 하는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여러 작가들의 각종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구해 읽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리즈가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바에도 이 시리즈를 구입하는 것은 이중의 지출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는 일반인의 교양 수준으로서, 중고등학생들의 필독서 수준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나에게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가지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 일반인의 교양 수준에도 못 미치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뒤로 밀어놓고는 이렇게 말만 떠벌렸던 것을 나는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이 시리즈를 구입했다. 더이상 뒤로 밀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반 교양 수준이라도 섭렵하고 가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더 나아간 생각은 어차피 이 소설들은 거반 원본 텍스트들을 구해 읽어야 하겠다는, 또한 다시 읽고 또 읽어도 부족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을 한 번 읽고는 내버릴 수 없는 것이 국문학도의 운명일 터이다.

그렇게 몇 달 책장을 차지하던 이 50권의 시리즈를 얼마전 그 첫 권부터 꺼내어 들었다. 역시나 시작은 이광수, 김동인으로부터였다. 이광수나 김동인, 나아가 신채호, 현상윤 등은 근대문학의 초창기 여명으로써 익히 배우고 들어 친근감 마저 느끼게 하는 인물들이다. 이광수의 <무정>, 김동인의 <배따라기> 등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 첫 권을 읽어내는 것에는 약간의 지루함 마저 동반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고백을 하자면, 문학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신채호의 단편이나, 양건식, 나혜석의 단편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반 새로움이랄 것은 느끼지 못했지만, 단편적인 문학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을 작품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부족함은 또한 말할 수 없이 많지만) 만나볼 수 있는 작은 기회였다.

이광수는 우리 근대문학, 근대소설의 논의에서 그 첫 장을 장식하는 인물이기에,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잘 알려져 있다. <무정>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읽었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리즈는 20세기의 한국 '단편' 소설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무정>을 싣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광수의 문학 세계를 그의 두 편의 단편을 통해서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에, 그리 탓할 바는 못되는 듯도 하다. 사실 우리 근대문학, 근대 소설에 있어서 무게있는 장편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기때문에 이 시리즈가 단편소설만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20세기의 소설을 정리한다는 것은 50권으로는 턱없이 모자람이 있다. 문학사적 평가를 높게 받는 작가(작품)으로만 구성하더라도 100권을 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가 그 작업을 완벽히 해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50권의 작업도 함부로 시도될 수 없는 일이기에 일말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지만, 현상윤, 양건식, 나혜석 등을 만나게 해준다는 것은, 그 부족함이 크더라도 칭찬 한마디 해주기에는 족하다.

1권을 읽고난 소감을 몇자 적는다면, 우선 기존의 문학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했다곤 치더라도, 대중적 취향과 필요성에 너무 치우친 얄팍한 상술이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광수, 김동인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새로이 근대문학연구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상윤의 소설이 달랑 <핍박> 한 편 밖에는 올려놓지 못한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건식이나 나혜순의 경우도 그런 아쉬움은 남는다. 뭐 이것저것 다 따져서는 1권의 분량이 넘치고 넘치겠지만, 김동인의 <붉은 산>은 어느정도 빠져도 될 성 싶다. 조절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편집부분에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뒤에 낱말풀이를 부록으로 남겨놓고 있지만, 후주보다는 각주로 처리해 놓는 것이 불편함을 덜어줄 듯 하다. 편집자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일일이 낱말풀이를 찾아보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걸리적 거리는 것을 뒤로 빼놓은 듯도 하지만, 찾아보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이 없지 않다.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이 시리즈는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유용하고, 필요한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창비를 더불어 역량있는 출판사의 20세기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정리 작업들이 이루어 지기를 더없이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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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生活 바로잡기] 한글專用論과 國漢混用論의 虛實(6)

우리가 學習하고 쓰는 單語

鄭琦鎬(仁荷大 名譽敎授)


  單語의 意味는 그 構成 成分이 가지는 意味를 單純히 合해서 얻(어지)는 것, 그 語源에 依支해서 學習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들은 <‘幼’ ‘稚’ ‘園’의 세 形態素에 關한 知識이 全혀 없이> ‘幼稚園’…‘自動車’ ‘(세발)自轉車’…같은 말들을 音聲言語를 媒介로 해서 배워 쓴다.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어른이라 해도 ‘掌匣’ ‘惹端법석’…같이 形態素에 關한 知識(漢字 知識) 없이 배워서 쓰고 있는 말은 있습니다. 우리가 論議의 對象으로 하는 말들이 그런 日常語 幼兒語는 아닙니다. 專門用語도 包含해서 좀더 高級(表現이 適切한지 모르겠으나)의 知識語(漢字語)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말 모두를 ‘語源에 依支해서’ 學習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質 ․ 量에서 日常語 幼兒語의 比가 아닌 그 ‘말’들의 槪念을 漢字 없이 學習(把握)하고 쓰는 것이 더 ‘쉽고 正確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에 적는 말씀 가운데의 몇 事例만으로도 그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單語는 나름의 歷史가 있고 個性이 있다. 道路는 山길, 논길, 들길에는 쓸 수 없으며 移動은 集團이나 덩치가 큰 對象을 指稱하는 單語를 主로 하여 쓴다.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道路가 山길, 논길, 들길밖에 없었던 때의 ‘길’은 아닙니다. 比較的 큰 길의 새 槪念의 造語이니 山길, 들길에 쓰지 않는 것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첫째 槪念은 ‘길’입니다. ‘道’가 그렇고 ‘路’가 그렇습니다. 辭典에도 그렇습니다. 山길, 들길에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다음의 問題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固有語 ‘길’이라고 그것도 어디 山길, 들길, 또는 道路의 뜻만 입니까? 그런 性格이라고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道路 地圖…와 같이 글字의 뜻대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이 ‘透明語’, 春秋 矛盾…과 같이 글字의 뜻 外에 다른 뜻을 따로 學習해야 하는 말이 ‘不透明語’다. 國立國語院의 調査에 따르면, 初等學校 敎科書에 쓰인 漢字語의 透明語와 不透明語의 比率은 60:40인데 그 透明語 調査가 쉬운 일은 아니다. 國漢混用論의 根據는 透明語에 限定될 것인데 透明語 調査가 先行條件이다. 그 調査를 한 일이 있는가.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歷史上 그런 調査가 있었다는 말 들어본 일 없고 그런 調査를 하고 漢字를 쓴다는 나라의 얘기도 들어본 일 없습니다. 우리말의 그런 調査를 한 일은 있는지 寡聞의 탓으로 그것도 들어본 일 없습니다.

  不透明語는 漢字로 적을 必要 없다. 그것에 對해 反論하라. 初等學校 敎科書에 2,687個의 漢字로 된 12,787個의 漢字語가 漢字로 表記되지 않고 쓰이고 있다는 것은 이들 語彙가 굳이 漢字를 通해서 習得하지 않아도 될 것들로 判斷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錯覺하신 듯. 한글專用 ‘令’ 으로, ‘施策’으로, 漢字 廢棄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래서 2,687字(語)면 될 12,787語, 字數(音節)로는 그 倍數 25,000余字로 되는 말의 뜻을 따로따로 習得하는 苦生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警笛’의 뜻은 ‘빵빵’이 되는 것입니다. 不透明語는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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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漢混用 아름다운 글쓰기]

漢字敎育 活性化와 바람직한 語文政策에 對한 小考

朴鍾福(韓國語文 1級 漢字會 會長)


  無人島에 漂着한 로빈슨 크루소가 그곳에 오래 혼자 살게 되었다면 그에게 있어 그동안 사용해 온 말의 意味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漸次 體得하게 되는 言語라는 것은 自然과의 疏通 手段 或은 神과의 交流 手段으로서의 意味였지 않았을까 推測해 본다. 一般的으로 言語는 人間의 社會的 關係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變遷 ․ 進化해 간다고 할 수 있다. 卽 言語는 人間과 人間을 이어주는 끈과 같으며 人間 사이를 흐르는 血液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筆者는 公職을 整理한 후 靑雲의 뜻을 품고 公職에 入門하려는 後學들을 指導한 적이 있다. 公務員 試驗 中에서 5級 事務官 試驗(所謂 高等考試)에 合格하기 爲해서는 2次 論文型 科目을 通過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節次를 通하여 受驗生이 作成한 答案의 內容도 內容이거니와 文章力과 言語 驅使力 等도 아울러 살피게 된다. 筆者가 擔當 講師로서 이들이 써낸 模擬考査 答案紙를 採點하고 指導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요즘은 젊은 世代들이 英語 等 外國語와 컴퓨터에는 남다른 關心과 意慾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말을 驅使하고 漢字를 使用하는 데 있어서는 意外로 疏忽히 하는 傾向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境遇에 社會科學의 專門用語는 擧皆가 뜻글자인 漢字(語)로 飜譯 ․ 定着되어 있지만, 이들이 써낸 答案紙에서 漢字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뜻이 曖昧模糊하고 混同을 일으키는 境遇도 생기게 되며 明確한 意思疏通에 障碍를 일으키기도 한다. 講師는 答案紙의 目次 題目과 專門用語 程度는 漢字로 表記해 주기를 注文해 보지만, ‘쓴다’기보다는 숫제 ‘그리는’ 水準의 漢字 活用能力을 보면서 難堪해진 적이 있었다. 甚至於는 自己 이름 漢字조차 잘 모르는 大學生이 있다는 事實은 失笑를 禁치 못하게 한다. 더욱이 外國에서 오래 工夫하여 博士學位를 받아 왔다는 社會科學 分野의 젊은 敎授님들의 論文 ․ 著書에서도 이와 비슷한 現象을 發見하고는 우리나라 語文敎育의 바른 方向에 對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筆者는 50年代 베이비 붐 時代에 태어나 制度圈 敎育을 받아 왔는데 유난히도 자주 바뀌는 敎育政策으로 因해 被害를 본 世代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漢字敎育의 施行과 廢止, 復活과 再廢止를 反復하는 종잡을 수 없는 政策으로 무척 混亂스러웠던 記憶을 가지고 있지만, 多幸히도 筆者는 우리말에 關心이 많았고 漢字에도 남다른 興味를 느껴 中學校 時節에는 獨學으로 漢字 3,000字를 익혔고, 그 後 持續的으로 使用해 온 德分에 韓國語文회 1級 漢字能力檢定試驗에 別다른 準備 없이도 無難히 通過할 수 있는 榮譽를 안았다. 向後에는 國家 百年大計를 내다보는 長期的이고 發展的인 語文政策의 樹立으로 더 以上 ‘갈 之字’式 國語敎育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言語는 그 民族의 삶과 文化를 담는 그릇으로 아름다움과 함께 便利함과 有用性, 그리고 適切性을 아울러 具備하여야 한다. 이러한 次元에서 우리의 語文政策은 民族의 삶의 밑바닥에서 자라온 固有語와 함께 數千 年의 뿌리를 가지고 自然스럽게 우리말의 一部가 되어 있는 漢字語의 올바른 使用과 必要漢字의 適切한 活用을 通하여, 우리의 言語生活을 高揚시키고 文化發展과 國家 競爭力 提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본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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