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대학1학년때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군대엘 가서 다시 나갔다. 군대를 제대한 후 지금까지 난 교회란 곳엘 가지 않고 있다.

그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느냐'하는 의문을 품는다. 마치,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하는 탕자처럼, 타락하고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서 멀리 떠나버린 것처럼 우려한다.

흔히들, 교회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 나가세요?"라는 물음을 "예수 믿으세요?"란 물음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한다. 어느새 '교회'가 '예수'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교회는 어디까지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혹은 '예수를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는 그 안에 '예수'가 존재할 때 성립한다. 따라서 '내 안에 예수를 모시면' 내가 곧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나라는 교회를 나가야 예수를 믿는 거고, 교회를 나가야 구원을 받을 듯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교회를 나가지 않고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 나가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없질 않은가?

오늘 다음의 한 기독교 카페에 간 적이 있다. 가입한지는 몇 해째인데, 여기서는 자주 전체 메일을 보내온다. 요샌, 아프간에서 피랍된 분들에 대한 걱정과 기도의 글들을 보내온다. 오늘 온 메일은 안티기독교 네티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는데, 좀 아니다 싶은 감이 있어 카페엘 들어가보게 됐다. 그러던중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다짜고짜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보더라. 어디 사느냐, 몇 살이냐, 뭐하는 사람이냐, 마지막으로 교회 나가느냐. 난 다 말해주고, 교회는 현재 안 나가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상처를 받았냐는 둥, 가족들도 크리스천 아니냐는 둥, 교회는 예수의 머리라는 둥, 만날 하는 소리들을 해댄다. 나는 항상 내 의견을 내면, 논쟁으로 치닫기때문에, 더이상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안의 교회란 우상을 정리 중이다. 이는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랬다니 알겠다면서 휙~ 나가버렸다.

그렇다. 지금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가 없는 교회에 맹목적인 것은 우상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저 산상에 있었고,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엠마오 마을로 가던 그 길 위에 있었다. 내가 내 방에서 찬양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곳이 교회일 수는 없는 것일까?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읽으면서, 어쩌면 한국 교회 안에 구원은 없어보인다는 심증을 더욱 굳혀가게 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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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3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3 23:06   좋아요 0 | URL
어맛!! 그러시다면, 제가 생일때쯤 되서 막 떠들고 다닐게요....ㅋㅋ
11월 어느날에~~~

2007-08-04 0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8-0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래서 멜기세덱님이 좋은 게 아닐까?
저도 아주 삐딱한... 크리스천인데요.
교회시스템을 넘어서 근본적인 것에도 회의가 생기는 요즘이라
좀 어렵긴 하네요 -.-...

멜기세덱 2007-08-03 23:08   좋아요 0 | URL
정말 제가 좋으신거죠? 전 정아무개님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뎅...ㅋㅋ
회의라는 것은 나름 생산적이지 않나 싶어요,
한용운이 그랬던가요? "번뇌는 불빛"이라고....
우리의 회의와 번뇌가 그런 불빛이 되길 바라야겠죠.ㅎㅎ
그나저나 내일 뵙겠네요...막 긴장....ㅋㅋ

Mephistopheles 2007-08-0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저 높은 곳에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존재 더 자세히 말하면 기독교적인 하느님과 예수님이 밤하늘에 무수하게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보면서 한숨꽤나 쉴 껍니다..
"저것들 왜 저래..대체 내 말을 뭘로 들은거야 엉.?" 하면서요..

멜기세덱 2007-08-03 23:14   좋아요 0 | URL
ㅎㅎ, 십자가들 때문에 예수님이 내려오시다가도 찔리시겠어요, 그죠?
그러나 문제는 그 많은 십자가가 아니라, 그 많은 십자가들이 이땅의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줄 것인가겠죠.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시 찔리시는 일이 없을 거에요...ㅎㅎ

2007-08-05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5 23:14   좋아요 0 | URL
저도 굉장히 반가웠더랬습니다.ㅎㅎ 글세요, 그리 심각한 대화를 나눈 것 같지는 않은뎅...ㅎㅎ
눈이 참 맑고 크셔서 너누 어려보여요.ㅎㅎ 뵙게 되서 무척 영광이고,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2007-08-06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8-06 13:39   좋아요 0 | URL
히힛!! 기분 좋은 하루네요...ㅎㅎ
 

1. 현재까지 2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다.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남은 21명이 제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 이랜드 사태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박성수 회장이 정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3.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심는 든든한 기둥이 되길 바란다.

4. 그리고 이 땅의 고통받는 모든 것들에게 단 하나 희망은 남아 있기를 바란다.

8월 이 찜통같은 더위 속에서의 나의 독서가 이 모든 간절함보다 위에 서지 않길 바란다.

그래도, 독서는 계속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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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01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책도 지금 딱 봐야할 책인데 지금은 자제 중입니다. -_-

멜기세덱 2007-08-03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럴 때가 아닌데요 지금.ㅋㅋ 저는 워낙에 '자제'가 안되서리ㅠㅠ;;
 

사랑이라는 건

남 몰래 울지 않아도 되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대고 한 없이 울고 싶은 지금이다.

 

(자고 일어나니 또 한 분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심성민 씨. 29살이면, 만으로 따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저와는 동갑이네요. 이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세상의 불의일테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들의 죽음, 형제의 죽음에 오열하실 유가족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한 없이 울 때, 우리 지금이라도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끝없는 아픔에 대성통곡하는 것이고, 또한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지금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겠고, 또한 우리 지금 누구든지 사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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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3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해요.

2007-07-31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7-3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의 심정으로 불합리하고 정당치 못한 사회구조에 의해 희생당한 아들은 가슴속 깊숙이 묻을 수 밖에 없을 꺼에요..부모님들 가슴이 미어지시겠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젠 제발 남아 있는 분들의 무사귀환만을 바랄 뿐입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시사(時事)에 민감하지 않은 나로서는 일간지 하나 제대로 챙겨보지 않는다. 정 따분하고 심심할 때, 혹은 화장실에 정이 들고갈 만한 것이 없을 때, 그때나 펼쳐보는 것이 신문이다. 그것도 대강대강 제목정도만 훑어볼 뿐이고, 신간안내나 바둑기사 등을 세심히 볼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사에 둔감한 편이다. 세상사에 둔감한 것은 어느 한 군데 흥미롭게 말붙이지 못하는 소외의 삶을 주기도 하지만, 세월아 내월아를 읊기에는 여간 편한 것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요즘은 워낙에 인터넷이 발달해서인지, 워낙에 할 짓이 없어서 죽치고 인터넷이나 들여다봐서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참 시시한 시사들을 어느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게 인터넷의 장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행여 요즘 어데 몇 사람 모인 곳에서, 특히나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시사 얘기는 워낙에 찬밥대우이니, 시사에 대해 자발타발적으로 둔감할 때나, 타발적으로나마 민감한 지금이나 시시하기는 마찮가지다. 그러나 간혹 알고 싶지 않은 가운데 알게된 세간의 소식들이 나를 종종 분노케 한다. 이번의 이랜드 사태가 그렇고, 또한 시사저널 사태가 그러하다.

그런데, 시사에 한 없이 둔감하다는 것이 어느 은둔자적 행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알고 싶지 않은 것과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상존한다. 어찌 어찌 하여 알게 된, 그리하여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건 사고들이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 그것이 소리소문 없이 지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갈 때, 우리 한 때 분노하지 않아 좋일지언지, 더 큰 분노와, 어쩌면 분노할 새도 주지 않을 파멸이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천박한 세상은 만인이 분노하여도 그 분노케 한 자들은 여전히 지렁이론 모자로 구렁이가 되고, 담 넘어가는 것에 성이 안 차, 담을 뚫고 부셔서 지나가버리는, 개탄할 따름이다. 그것은 한 때의 우리 풀뿌리 분노가 결집되고, 연대하여 하나의 거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한 이랜드 사태에서는 우리 분노하는 사람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뭉쳐주길 바라는 바이다.

여기 또다른 분노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곧 시사저널의 전 · 현직 기자들이며(어쩌면 前 시사저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의 이름이 이미 자본의 노예들에 의해 더렵혀졌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란 이름은 시사저널 기자들과 독자들의 것이지만, 이 더렵혀진 이름을 떨치고 다시 새로이 시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시사저널을 사랑했던 독자들이며, 또한 이번 사태를 보며 다분히 분노한 이땅의 민중들이다. 그들은 왜 분노하는가? 그야말로 저 더러운 자본세력에 의해 우리 민중들이 끝끝내 지켜내야할 언론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 의혹을 다룬 경제면 기자를 금창태 사장이 인쇄 직전 단계에서 삭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에 항의하는 편집장과 기자들을 징계하고, 또한 그에 반발하는 이들에 대해 고소 고발하는 등의 무지목매한 짓거리를 신나게 벌였던 것이다. 이에 시사저널 기자들은 파업이라는 극단적 태세에 돌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인 시사저널 경영진과 결별하고 만 것이다. 결국 시사저널 기자들을 거리로 내몬 자본권력과 그 하수인들에 분노하는 기자들과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발족되기에 이른다. 이 분노하는 사람들을 누가 말리겠는가? 여기서 나는 이런 분노가 강한 저항이 되고,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고, 또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새삼 확인했다.

금창태 사장이 기사의 질이 떨어져 직접 삭제했다는 변명을 한다지만, 수차례의 편집과 교정을 거친 기사가 편집인들의 눈에 이상 없이 통과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장의 눈에만 수준낮은 기사였는지 난 모르다가도 또 모르겠다. 편집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작태에 더욱 말도 안되는 변명을 짓거리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 우세스러운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데, 저 사람은 비범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이 시사저널 사태의 핵심에는 바로 '남 우세스러운 짓'도 개의치 않는 저 한 없이 비범한 인간 이상이거나 이하의 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이들이 있"는 곳에 말이다. 아 이 비범한 것들을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더욱 가관은 아직까지도 정기구독하는 이들에게 괜한 보상 안해주려는 가련한 심사에서인지, '짝퉁'이래나 '결호 방지용'이래나 하는 것들을 뿌려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코미디언 언저리 어느 쯤에 있는 분자들일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코미디언들께서 충분히 화내실만 하지만 참아 주시라.)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시사저널 기자들은 울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웃기지도 않은 자들이 웃기고 있으니 울어야 할 밖에. 그러나 그들의 울음은 분노의 울음이다. 그 분노의 울음의 분노의 울림으로 일파만파 커져갔고, 마침내 그 울림이 하나되어 이 웃기는 작태에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쳐 서게 만들었다. 시사기자단은 이전의 명품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를, 그리고 이땅의 민중들이 반드시 누려야할 언론의 자유를 저 더러운 자본으로부터 지켜내기로 한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힌다,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힌다.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한다."라는 정신아래 그것을 온전히 구현해온 시사저널들의 기자들. 그들은 거리로 내몰리었을 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울분과 분노를 품었다. 그리하여 강인하게 저항하고 참 언론을 온몸으로 지켜내기 위해 세상에 호소했고, 그 호소에 우리 많은 민중들은 오롯이 화답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간의 울분과 분노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희망과 이상을 심어 놓을 것이다. 아니 이미 심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어쩌면 금창태 사장에게 고마움의 애정을 건내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사저널을 이제 온 국민의 저널로 날개달아 주었으니 말이다.(맛간 아이디어, "온국민저널"이란 제호 괜찮지 않나요? ㅎㅎ 아 저 못난 '국민'이란 말이 조금 거슬리는구만.)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란 긴 명칭에는 홍길동의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서글픔보다도 더 큰 아픔을 담고 있다. 제 이름을 제가 부르지 못하는 것을 어찌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아픔에 비하겠는가 마이다. 성룡의 'Who am I?"란 영화에서처럼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도 아닌 다음에야 부르고 싶어도 저 더러운 자본이 손에 쥐고 한낱 법이란 칼로 부르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저 긴 이름만큼이나 긴 서글픔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긴 이름을 우리 힘주어 말함에 있어, 우리는 끝끝내 '참언론'을 수호하는 자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참언론'을 분명히 '실천'하고도 남을 '시사기자단'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여기 이 책, 바로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이 엮은 『기자로 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전의 시사저널의 정신과 가치와, 참언론 실천의 노력과, 사실과 진실을 밝히고자한 구구절절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에 이 시사저널의 기자들은 오늘 이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인가를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란 길고 긴 이 이름이 왜 그들에게 값하는 이름인지를 알고 싶다는 이 책을 읽어보길 강력히 권한다. 여기서 더 이상 떠벌이는 것은 자칫 아둔한 잡설에 지나지 않을까를 염려할 따름이다.(다만 한 가지 잡설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www.sisaj.com에 당장에 달려가서 정기구독을 단박에 약정하는 단호함과 신뢰를 이 책은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승주 모 나무 님과 아프(면) 락사스님의 영향으로 가입한 이 사이트에서 계속 로그인이 안 돼 이래저래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 고생을 감수하고도 충분한 남음이 있었기도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을 나는 간혹 꿈꿔보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고 서는 아예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시사저널 전 · 현직 기자들처럼 살아야 진정한 '기자'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꿈에라도 기자가 될까 두려울 따름이다. 그만큼 기자 한 번 제대로 해보자면 이 사람들만큼 해야되겠고, 그러자면 나는, 한숨만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앞으로 보여줄 진정한 저널, 그 저널의 독자만큼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의 독자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성우제 식으로 말하면 "기적이자 축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자로 살고 있는 한, 자 이제 우리 이런 사람들의 독자로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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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3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저도 찬조출연하는군요. :)
이 땅의 정의과 기본이 지켜지는 그날까지.

멜기세덱 2007-07-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면)약사써 님은 찬조출연이시라기보단, 특별출연이라고 해두죠...ㅎㅎ
 

탈레반의 23명의 한국인 피랍 사건도 벌써 열 하루째를 맞고 있다. 그 사이에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故 배형규 목사. 그의 피살 소식에 안타까워할 새도 없을 만큼 아직까지도 22명의 남은 피랍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신 故 배형규 목사의 순교에 삼가 명복을 빈다.

42살의 옆집 아저씨같은 푸근한 인상, 아이처럼 헤맑게 웃으며,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을 거 같은 마음씨 좋은 삼촌같은 모습의 저 사진을 보며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워할 뿐이다.

9살의 어여쁜 딸아이,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그들은 아빠, 남편의 죽음에 한 없이 슬퍼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피랍자들의 희생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할 것을 애원했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맘 놓고 슬퍼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연할 수도 없고, 냉철히 비판할 수도 없다. 아직 위험에 처한 우리의 형제들이 있지 않은가?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고 배형규 목사의 죽음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 너무 의연한 것이 아닌가? 한 생명이 그 귀한 목숨을 잃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슬프지 아니한가?

그들이 비판받는 이유가 죽어야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통받는 아프간의 민중들을 위해 희생을 자처했다고. 그런 그들의 희생을 우린 존경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사회 전체가 침울하고, 아직은 촉각을 곤두세워 남아 있는 피랍자들을 구명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고 배형규 목사의 죽음에 대해서 우린 너무 의연하고도 냉정한 것은 아닌가? 그들이 뭘 그리 잘못했을까?

고 김선일 씨의 피살에 온 국민이 추모의 물결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해보면, 고 배형규 목사의 죽음이 한 없이 초라해진다. 온 국민이 고 배형규 목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22명의 남은 피랍자들이 속히 구명될 수 있도록하는 촛불시위 같은 것은 고사하고라도, 우리 사회가 작게나마 저마다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적어도 알라디너들은, 그 죽음 하나에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함께 울어줄 줄 알았었는데...

* 고 배형규 목사의 죽음은 거룩한 순교였음을 한국의 기독교계는 인정하고 그 순교에 값하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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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7-3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돌아가신 날, 꿈에서 테러를 당했어요. 꿈에서도 지독히 무서웠는데, 현지에서 겪고 계신 분들의 고통은 오죽할까요. 부디 한시라도 빨리 이분들이 모두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멜기세덱 2007-07-30 13:39   좋아요 0 | URL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요, 그들이 조금 더 힘을 내서 절망하지 않아야 될텐데요. 빨리 돌아올 수 있기를 저 또한 기도합니다.

비로그인 2007-07-3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배목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의견도 나누고 추모도 했는데
왠지 알라딘에서는 이야기 꺼내기 쉽지 않더군요.
제 자신이 참 비겁한거죠.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멜기세덱 2007-07-30 13:41   좋아요 0 | URL
비겁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조용할 줄을 예상 밖이네요. 그러나 많은 분들이 고인을 애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승주나무 2007-07-3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배형규 목사님과 관련해서 여론이 너무 이상하게 쏠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부터는 봉사를 하더라도 눈치를 보고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영업활동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라면 가장 소외되고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원칙이 배목사님의 죽음과 동시에 훼손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합니다. 예수님이 이 상황을 보시면 개탄하실 일입니다. "박애가 아니라, 헌신이 아니라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도 담지 마라."라고 하셨겠죠..

멜기세덱 2007-07-31 11:34   좋아요 0 | URL
또 한 분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아침에 들으면서,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부디!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우리 지금부터라도 간절히 바라야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