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시봉이야기 1
원택 지음 / 김영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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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다른 잡념이 티끌조차 생기지 않고 책에 몰입이 되는 그런 이상한 책이라는 점이다. 성철스님을 시봉하던 원택스님의 마음으로 들여다 본 부처의 세계가 바로 이 책에 담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불교지식이나 교리가 아닌 참선을 통해 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성철스님의 말은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의 사상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동정일여(動靜一如)에서 몽중일여(夢中一如)를 거쳐 숙면일여(熟眠一如), 즉 寤寐一如의 경지에 이르러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과 일치한다.

데이비스 호킨스의 의식혁명이라는 책에 보면 세계의식 또는 의식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고 인간은 누구나가 의식을 집중하면 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성철스님이 1300만 불자 앞에서 종정스님으로 한 첫 말이 '나를 믿지 말어, 나의 말에 속지 말어'라고 한 뜻이 바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부처를 만나라고 한 의미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속에 있는 부처에 다다르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세속을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스님들의 말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으로 바뀐다. 인간의식은 위대하며 그것은 절대의식과 닿아 있는데 그것이 속세의 온갖 일들로 인간의식에 닿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절대의식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시간은 그러한 속세의 일들과 잠시 떨어진 숙면의 시간이며 따라서 성철스님은 화두를 안고 숙면까지 간 이후에야 깨달음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위대한 의식, 절대의식과 닿아 있는 숙면에까지 화두를 안고 가야 비로소 그 답이 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동정일여와 몽중일여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인데, 동정일여라도 제대로 하자면 바로 인간의 온갖 욕망과 집착과 감각과 감정들이 사라진 무념의 평화로운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고 따라서 속세의 연을 끊는 것은 그것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속세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속세에서는 동정일여와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거쳐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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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이종수 옮김 / 한문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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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항상 나라는 주체와 대상인 객체와의 사이에서 주체의 앎의 영역을 넓혀 보고자 발버둥치고 있던 나의 존재에 대해 '너란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하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사실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높은 경지의 의식을 내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내가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던 어떤 지식의 고정관념이라는 조그마한 호수에 던져진 하나의 조약돌과도 같았다.

인간의식의 단계가 존재하고 그것은 200이라는 숫자를 기점으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뉜다는 사실과 200이상의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교훈들은 마치 내가 앎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열망과도 닿아 있으며, 또한 내가 열망하는 그 이상의 끝보다 더욱 큰 깨달음의 차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어느 역사적인 개인에 대한 의식의 평가가 나에게 어떤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에게 인간의식은, 나의 의식은 세계의식(절대의식)과 닿아 있다는 큰 깨우침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200이하의 여러 의식들, 수치심과 죄의식과 무기력과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존심 등의 감정과 관련한 것들에 나는 얼마나 많이 지배당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생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내가 억제하고 다스릴 수 없는 나쁜 충동들과 감정의 물결을 어떻게 다스리고 자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동안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물음이었던 것이다. 대상과 그 대상에서 느끼는 나의 감각을 통한 느낌은 나에게 어떠한 좋고 싫음의 감정이나 선과 악의 구분도 주지 않으며 그것을 구분짓는 것은 단지 나의 마음이요 의식이라는 깨달음이, 마치 힘겨운 노동 속에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가슴을 뚫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나의 의식을 꿰뚫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 나의 의식의 고양 그 자체가 세계로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 메시지에 의해 전세계의 의식의 고양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가야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깊은 깨달음을 통한 의식의 확산'이야말로 우리가 이 혼탁하고 욕망과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에 보내는 정화의 메시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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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 2009-01-2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갑자기 당신과 내가 통한다는 느낌이 쫙 듭니다.
 
레 미제라블 - 230 삽화와 해설
가시마 시게루 지음, 박노인 옮김 / 신한미디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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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마 시게루의 '레 미제라블'은 원작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해설서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레 미제라블은 한국어판으로는 주로 '장발장'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장발장이란 한 도형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만난 미리엘 주교를 통한 사랑의 깨달음과 그 깨달음의 실천으로 인한 인간애의 실현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은 가시마 시게루를 통해 본 빅토르 위고의 생애와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19세기 프랑스의 급격한 사회 변동과 그 속에서의 민중들의 가난과 비참한 생활, 그리고 그들의 무지와 계몽을 다룬 사회 비판소설의 성격이 짙게 베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본 이야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프랑스 사회 당시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장과 삽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사회 현실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관점을 접할 수 있다.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며 민중의 관점을 취하고자 한 그의 사상은 톨스토이와 도스또예프스키에 의해 찬사를 받았으며 오늘날의 프랑스 사회가 미국의 패권과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똘레랑스란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보다 우선하는 미덕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한 작품성을 보는 나의 눈이 별로 없지만 그가 설정한 구체적인 장면들이 그의 사후 프랑스 및 유럽의 대문인들의 작품 속에 인용했던 그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것은 위고가 설정한 레 미제라블의 구체적인 상황과 장면설정이 독특하고 창조적인 그의 두뇌에서 탄생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장발장이란 이야기에서 찾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주옥같은 위고의 창조성과 독특함과 사회 비판적 성격 등의 보물들을 갖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더불어서 이 책은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기 쉽고 재미있는 230매의 삽화가 들어가 있으며 이 삽화만으로도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그림이 가진 내용친화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한 번 해보시도록...그림만으로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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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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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사회와의 비교를 통한 우리 사회에 대한 냉철하고도 엄중한 비판과 반성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화두를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과 함께 고민해보려고 한다. 젊은이들의 철저한 반성과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 사회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을 통해 본 프랑스 사회는 분명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 줄 그 무언가를 갖고 있다. '똘레랑스(관용)'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 다른 사상과 주의와 색깔과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똘레랑스가 지배하는 프랑스 사회는 아주 다양한 모습의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옷차림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개성과 특징을 가진 모습으로, 정치적으로는 극우에서 극좌의 좌표축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무수한 점들에 놓인 사람들로 나타난다. 이는 정부를 구성하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수상과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우파와 좌파의 합작으로 구성되어 국사를 진행하면서도 견제와 갈등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또한 당대에 사회주의 권의 몰락으로 시장의 논리와 이윤논리가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물결로 소용돌이치는 현실속에서도 프랑스 사회는 '사회정의'가 이것에 우선한다는 논리를 간직할 수 있는 사회임을 지적한다. 미국과 영국의 비이성적이고 힘의 논리에 근거한 패권주의와 세계화의 압박 속에서도 이 사회의 양심들은 그것이 틀렸음을 외칠 수 있는 그런 사회임을 보여 준다. 1995년에 있었던 철도 노동자 파업의 사례는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자 희망있는 대안인가?

물론 이런 프랑스 사회도 제국주의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반성해야 할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도 실재하고 있으며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모습들도 역시 내재하고 있음을 그는 말한다. 하지만 강국의 패권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논리만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외쳐대는 거대한 소음속에서 그래도 사회정의와 관용을 나직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회에서 배워야 하지 않는가?

그는 프랑스 사회의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비추어보고 우리 사회가 반성하고 고쳐야 할 것을 제시함으로써 두 사회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기업인들의 비리와 정부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언론인들의 기회주의성과 언론 정신의 부재, 국민의식의 저급성을 꼬집어 드러내며 객관적인 시각으로 프랑스 사회와의 비교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똘레랑스 보다 우월한 우리의 미덕인 '중용'과 '외유내강'의 덕목으로 극복할 것을 주장한다.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서구의 것만 좋다고 무조건 받아들여 자신의 더욱 소중한 미덕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의 것으로 우리답게 현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정의와 관용이 살아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 나라가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만 하는 미래이며 망명의 땅에서 그가 애타고 사무치도록 그리던 그런 사회가 아닌가? 그 사회로 열차를 타고 유럽을 건너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를 지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그리고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는 그런 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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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 - 미국의 세계 지배와 힘의 논리
노암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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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차세대 전투기 선정에 대한 미국의 구매압력이 거세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된다. 미국의 횡포와 압력에 우리 나라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자세를 취해 왔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에 비이성적이고 광폭한 횡포를 부리는 깡패국가 미국의 인권 유린의 역사를 고발한 촘스키의 이 책은 분노와 흥분을 넘어 절망과 체념이라는 단어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게 한다.

그는 앞의 많은 지면들을 근대사에서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국가에서의 살상과 인권유린 사례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서술에 할당하고 있다. 그는 인권을 보호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국제 질서에 구속되지 않고 자국의 이익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무관심을 표명하는 국가들의 전형인 미국을 불량국가라고 지목하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 코소보 지역에서의 인종 말살, 동티모르 지역에서의 인종 청소, 콜롬비아에서의 살상, 쿠바의 경제 제재와 그로 인한 살인과 폭력,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지른 직접적인 수많은 인명 살상과 군부 독재 정권의 비호와 그 아래서의 간접적 학살, 폭력 등의 사건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국의 이해관계'라는 논리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미국이라는 나라를 움직이는 핵심 계층이 어쩌면 위험한 광신도들의 집단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후반부에서 그는 이러한 미국의 이해관계의 해부를 위해 시선을 미국 사회의 내부로 돌린다. 미국이라는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사회의 내부는 그야말로 빈부의 격차가 전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곳이며 노동조합이 가장 처참하게 파괴된 곳이며 또한 하층민중들의 삶이 가장 급속도로 악화된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미국이 제 3세계에서 자행한 거대한 살상과 폭력의 내부 정당화인 '미국의 이익'이란 다름 아닌 미국 특권층(기업가와 권력가)의 이해관계임을 드러내고 있다. 존 듀이가 '정치는 기업들이 사회에 드리우는 그림자'라고 했듯이 그 추악하고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신음과 절규가 현실의 미국 사회에 실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국가의 주요 임무라는 것은 위험과 비용을 사회화하는 것이고 권력과 이윤을 사유화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결국 제 3세계의 국민의 인권에는 무관심한 사유화되는 권력과 이윤만을 고집하는 그런 불량국가의 횡포가 더욱 거세어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소련 사회주의 붕괴 이후 더욱 기세등등한 미국의 깡패행위는 안하무인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 과연 이 광신도들에 의해 지배되는 불량국가의 죄악적 행위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그가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없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자본 쪽에 완전히 기울어진 '자본과 노동간의 갈등'에서 이미 노동의 힘은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진단으로 다시 문제를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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