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초.호조키
요시다 겐코.가모노 조메이 지음, 정장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로 시작되는 이 글은 30살에 출가하여 40대에 쓴 인생을 돌아본 유교, 도교, 불교적 깨달음이 어우러진 요시다 겐코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30년 동안이나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일본 고전 수필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첫 서단의 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심하여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사의 잡다한 글들을 그냥 써내려간 것 치고는 너무나 훌륭한 글들이 많으니 말이다. 마치 하루의 인생을 살아 본 하루살이가 다음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서 새로 맞이하는 하루를 적어놓은 글 같다. 그의 글 속에는 그래서 몇 생을 살아온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삶의 어떤 희노애락의 곡선 위에서도 그것을 미끄럼틀 삼아 재밌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아이의 동작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말이다. 때로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훌쩍 들어올려져 자연의 세계로 갔다가 거기서도 훌쩍 날아 올라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의 고향 속에 영원성 속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가 어느덧 평범한 인간의 인생사로 돌아와 작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미세한 감정 표현을 그대로 드러내어 인간 생활의 해학과 웃음 속에서도 뭔가 놓쳐버릴 수 없는 진한 향기를 떨어뜨리고 간다.

  카메라를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이대기도 하고 자연의 흐름을 재빨리 감아서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들의 시선은 때로는 창조주만큼 커지기도 하고 또 미립자와 소립자의 단계를 너머 그 없는 텅빈 공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능구렁이같은 할아버지는 여자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놀아보기도 하고 삶의 의미 없이 권세와 명예에 휘둘려 허깨비같이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그가 내려치는 손바닥이 바로 내 머리 뒤에 있는 것 같아 슬며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호조키를 이 글의 뒤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그림은 우선 밑그림부터가 다르다. 도연초는 그림에 달관한 마스터가 아무렇게나 밑그림을 스윽 스윽 그려내어 한 편의 자연스러운 경물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면 후자는 억지춘향꼴로 변사또의 수청을 뜨는 불편한 표정이 연상되니 말이다. 호조키는 인생의 수많은 굴곡과 배반을 통해 속세를 버린 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씻어내고 편안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인생 후편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앞 이야기와 뒷 이야기가 마치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어색하게 어깨를 걸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어색한 자세가 어쩌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호조키를 닮지는 않았는가? 연어는 죽을 때 자신의 새끼를 놓기 위해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했지. 아마 내 마음의 지향점도 호조키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 도연초라는 마음의 고향으로 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도연초의 서문에 눈길이 자꾸 간다.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6-0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서두가 정말 마음을 끄네요.^^

달팽이 2007-06-08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입니다. 혜경님.

혜덕화 2007-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 구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새롭네요.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예전에 느꼈던 감동을 느낍니다. 가끔 책 정리해서 아름다운 가게에 가져다주면서, 내게 꼭 100권만 남긴다면 무얼이 남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백권만 남기기엔 책이 많아서 차츰 차츰 줄어들면 추려볼까도 생각중입니다. 자꾸 사들여서 줄어들긴 커녕 좁은 책꽂이에 늘 빈자리가 없어, 책욕심도 줄여야하는데, 싶기도 하네요.

달팽이 2007-06-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 혜덕화님.
그 말 듣고 보니 저도 반성할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을 때 소용닿는 곳에 기증하고 싶군요...ㅎㅎ
이 책도 좋은 책이더군요..
 
행복한 공부 - 밝고 편안한 인생을 사는 공부의 핵심
김정섭 지음 / 김영사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성욱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따로이 자신에 대한 어떤 설명이 없다. 백성욱 선생님의 아래서 공부했다는 말이 다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글을 읽어보면 백성욱 선생님의 향기가 자연스레 베어나온다. 백성욱 선생님을 인연으로 공부한 사람들의 글은 모두가 일체의 화려한 수식과 기교를 생략한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말로써 우리들의 마음살림을 그대로 보게 한다. 신심명의 앞부분을 보면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했듯이" 백성욱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분들은 하나같이 일체의 수식을 생략하고 오직 하나의 말을 꺼내어보인다.

  삶에서 수행을 하며 살면서 우리들이 부딪히는 어려운 고비고비를 어떻게 넘길 것인지에 대해 '견법'과 '바치는 법'으로써 간명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길어먹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물같은 말씀이다. 다른 공부들 참 많이 있지만 마음공부로 백성욱 선생님은 오로지 금강경 공부를 강조하신다. 내 마음의 공부도 어느덧 조금씩 금강경으로 모아지는 느낌이다. 때가 되면 제대로 금강경 공부를 하겠다. 지금은 좀 더 저변을 탐색하고 싶다. 부처님 가장 수승한 기운으로 진리를 설한 정오의 에너지를 받고 그곳에 머물매 마음이 밝혀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소의경전으로서의 금강경에 대한 해석과 설명은 많지만 백성욱 선생님의 바치는 설명은 공부해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도 아주 단촐하면서도 갖은 격식과 지식을 버리라 한다. 깊은 진리는 형식과 격식없이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것에 있다 했는데 선생님과 인연되어 공부하신 분들의 글이 그런 느낌이 든다. 세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지만 그 마음의 길을 쫓았던 몇 안되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에 이렇듯 그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역시 백성욱 선생님답다. 그만큼 깊은 진리로 제자들의 마음을 끌여들였던 것이리라.

  알라딘서 선생님과 관련된 새로운 책을 찾아본다. 애석하게도 한 권 말고는 찾을 길이 없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한 권이라도 건졌으니..  이렇게 책으로라도 만날 수 있는 인연에 감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덕화 2007-06-0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통 책이 손에 잡히지 않네요. 김재웅 법사님의 책을 간간히 다시 읽고, 지허 스님의 선방 일기를 읽는 정도입니다. 지허 스님의 글 또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서 소박한 무명 저고리를 마주 대하는 느낌, 혹은 보리밥에 간장 종지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도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 제대로 쓰인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장식이 본질을 전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네 삶도 이렇게 정갈하고 소박하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마음의 방향을 가늠하느라, 잡다한 책엔 손이 가지 않네요. 저도 이 책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달리 구한 한 권도 소개해 주시면 함께 주문하고 싶네요.

프레이야 2007-06-04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새로 단장하신 서재 지붕의 레이스단이 아기자기 예뻐요.
스킨도 연분홍에, 완전 새로운 느낌이에요.
백성욱 선생은 전 처음 들어보는 훌륭하신 분 같으네요. 좀 찾아보고 배우렵니다.^^

달팽이 2007-06-0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미래를 여는 금강경 독송"이란 책이 있군요. 정천구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분의 백 선생님의 제자인 듯 하군요.
혜경님/제가 손꼽을 정도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혜경님도 한번 보세요.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닦는 마음 밝은 마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그 마음을 바쳐라> 모두가 저의 어려운 시절 힘이 되었던 책입니다.
그리고 혜경님 새 서재는 제가 단장한 바 없는데 그리 되었군요..ㅎㅎ

파란여우 2007-06-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지 못하고 있기로는 혜덕화님뿐만 아니랍니다.
저도 이런저런 밀린 숙제같은 일상이 자꾸만 더 뒤로 쳐지는군요.
그래서 그런가 어제는 금강경을 펼쳤습니다. 한 두어달만에요.
거기 그렇게 써 있더이다. "한 마음이 한 마음이다"
앞의 한 마음은 뭔지, 뒤에 한 마음은 뭔지..@@
그냥 제 궤변대로 해석해서 마음을 잡고 놓는 일은 불가능하다.
원래 마음이란 형체가 없는 듯 있는 듯한대..흐르는대로 살자 이겁니다.
잡고 놓는 일 대신에 보는 일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면..그게 用神인가요?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군부대 이전 반대시위 도중 퍼포먼스로 어린 돼지를 능지처참하는 기사가 실렸다. 알라딘에서 지인의 페이퍼에서 그 사진을 보다가 돼지의 눈빛이 너무 안타까워서 사진을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안타까운 마음 뿐이었다. 그런 어리석은 행위를 계획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군부대 이전으로 인한 자신들의 경제적 피해와 그로 인한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표출하는 행위까지 그들은 성숙하지 못했다. 군부대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고 그것이 빠져나가서 생기는 경제적 손실이 지위와 계층에 따라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로 인한 불안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그들은 여리고 가엾은 한 생명을 재미삼아 거두어들였다. 비록 가축의 운명으로 인간의 굶주림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운명의 돼지였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거두어야 하며 생명을 거둘 때 최소한의 예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식용으로 생명을 앗는 자의 도리일진대 이렇듯 무식하면서도 맹목적으로 표출된 어리석은 행위의 이면에 그들의 불안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 뿌리가 같은 불안을 갖고 산다. 때로는 그 불안이 자신의 생명을 앗을 정도로 크기도 하고 때로는 작고 미세하여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소멸해 버리는 불안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자칫 그 기사를 읽고 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불타서 그들을 마음으로 이미 죽여버렸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우리들도 크게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뭇생명을 해치며 삶을 연장한다. 그리고 우리도 삶의 극한 상황에서는 죽음과 생명의 안전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다만 그것의 정도를 가늠하는 사회적인 상황의 악화 정도와 우리들이 마음으로 수용하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각함이 달라질 뿐이다. 보통은 말한다. 불안을 극복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은 그것이 기독교적인 신념이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아니면 부르주아적 삶에 대한 대안적인 모델로서의 보헤미안적인 삶이든, 그것은 지위의 위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으로 그 위계를 다시 쓰려고 했을 뿐이라고. 그러니 그것이 가치가 되고 선악이 되고 시비가 되면 그것은 그 가치와 선악과 시비에 의해 새로이 위계가 생기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사회적인 일에 사회적인 기준과 선악과 시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악과 시비와 가치가 생기는 마음의 그 자리에 분노와 화가 자리잡느냐 아니면 자비와 사랑과 깨어있음이 자리잡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선악을 너머 우리 삶의 성숙이 요구하는 태도이다. 세상은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인과가 존재한다.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 모든 참여자들의 마음이 순결하고 진정성에 가득찬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 집회가 사회적으로는 필요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나의 삶으로 그 마음으로 돌아오면 비록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마음 내는 그 자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답을 보통이 내렸다. 인간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적절한 사건과 문학 작품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인간성에 내재한 불안의 사회적 심리적 원인과 해답에 대해 너무나도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서술로서, 늘 보통이 그러하듯,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나는 왜 보통이 진정한 불안의 정체와 그 뿌리를 파헤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은 불안은 한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그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사회적인 상상력이며 이론에 불과한 헛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그래서 더 불안하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7-05-2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말씀이 다 옳다해도 분노할 상황에는 분노하고 욕도 해줘야 합니다.
그 부분만큼은 동의 하기 어려운게 분노 대신에 대체할 대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
성철스님은 성철스님이고, 다혈질 파란여우는 여우니까요^^
근데, 보통씨 책은 예전에 좀 읽었는데 우째 이 책은 안 읽고 있는지 몰라요.
달팽이님이 읽고 불안하다고 하시니 읽지 말아야 하나...ㅋ

달팽이 2007-05-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혹 이 책 안가지고 계시면 제가 한 권 보내드리면 안될까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의 선량한 마음과 삶의 진정성을 달팽이는
믿어요.
근데 벌써 갖고 계신 건가요?

사마천 2007-05-2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이 책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권해드릴께요.
달팽이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도 한번 써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

달팽이 2007-05-28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마천님.
그대의 생각도 듣고 싶군요.

비로그인 2007-05-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돼지.. 가련한 돼지의 죽음.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내가 속한 한국인에 의해 저질러진 참혹한 만행.
저는 소름이 끼쳤답니다.
언제부터 한국 사람들의 심성이 저토록 끔찍한 일을 '무감각'하게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잔인하고 누추해졌는지.. 저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많이 배운 자들의 책임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달팽이님. 저는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달팽이 2007-05-2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한사님.
세상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의 사람이건..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선악의 정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과 한계에 뻗어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한사님처럼 인생의 폭과 깊이가 넓은 분이 그래도 받은 그 충격과 소름은
우리가 발딛고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엔 왜 그리도 슬픈 일이 많은 것인지..
세상엔 왜 그리도 자괴감이 드는 일이 많은 것인지..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집니다.

혜덕화 2007-05-2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피터 싱어 교수와 도올의 대담 기사가 생각나는군요. 인간의 목숨이나 동물의 목숨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린 아기 돼지가 군부대 이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저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인 것이 부끄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네요.

짱꿀라 2007-05-2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오랫만에 들어와 리뷰 읽습니다. 알랭 드 보통씨의 작품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의 문체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달팽이 2007-05-30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산타님/동감입니다. 새로운 생활에 또 적응하시느라 생활의 불편이 많겠습니다.
 
토란
이현수 지음 / 문이당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어느 나른한 봄날, 난 겁도 없이 녹이 슨 철로를 통째 삼켜버렸다. 쇠에 난 녹이 그 쇠를 먹어치운다는 건 알았지만 몸주인 나까지 갉아먹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때때로 뱃속이 거북했으며, 잊을 만하면 녹슨 철로 위를 덜컹거리며 불규칙하게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목울대를 뚫고 쓴 물처럼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녹을 먹고 녹이 나를 먹는구나.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던 밤사이, 철로 가에는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 따위의 잊힌 꽃들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났다. 왜 지금 하필이면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인가? 입춘 무렵, 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어쨌든 가거라,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

  이 현수 작가의 책머릿 글이다. 자신의 녹을 통째 삼켜버렸다는 말, 그것은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일런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는 왠지 토속적이고 오래된 것의 맛이 풍긴다. 신기생젼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글의 맛깔스러움과 예스러움도 그랬지만 이야기 전체가 전해주는 마음의 울림을 생각할 때, 그녀는 확실이 우리 마음 속의 깊고도 예민한 곳을 건드릴 줄 안다. 세월이 오래도록 겉으로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재어두고 쌓아두어 더욱 뼈 속에 사무친 삶의 의미들을 한 순간에 토해낸다. 그녀의 소설들이 가진 매력이 자꾸만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들게 한다.

  그녀가 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소외된 자이며 약자이다. 빛 속에서 보면 그늘이 더욱 어두컴컴해 보이고 그늘에서 보면 그 빛이 더욱 눈부시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은 그 그늘에 서있는 자들을 불결하고 더럽게 생각하고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부의 그늘에 서 있는 민중들에겐 부의 빛 속에 서 있는 자들의 탐욕과 이기심에 역겨워한다.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부와 버려진 잉여는 그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애환이 되고 한이 된다. 그 깊은 마음의 응어리를 포착해내어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 재미가 그녀에겐 있다. 

  '토란'에서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오래묵은 갈등, '비하리에서 나는'에서의 "자신의 온 생애를 무너뜨린 검은 얼굴의 사내는 비하리에 전염병처럼 떠도는 우울과 권태, 단조로움이라고 나경은 생각했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자신의 지역 전체에 감도는 기운으로 파악하는 눈이 대단했다. '거미집'에서는 평생 아들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헌신해온 어머니와 나와 딸의 3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그 바보같은 어머니의 삶이 싫고 나에게 기대는 것이 미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삶을 닮아가버리는 자신을 보면서 삶의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파꽃'은 너무 감동적이다. 평생 마음에 품고도 한번도 표현할 수도 없고 표현하지 않은 한 여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녀의 오래된 말 한마디에서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그 마음에 나는 너무 애절하면서도 슬펐다. "파꽃도 분명 꽃은 꽃이지요? 꽃...........맞지요?"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삶 전체를 그녀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사실 그 마음마저 버리면 인생이란 또 얼마나 밋밋하고 허무하랴..문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녀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삶 속에 꾹꾹 묻어두었다가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그것을 한 번, 단 한 번 터트리는 불꽃처럼 그려낸다. 그 불꽃같은 삶의 모습은 그래서 예술이 되는 것일까?

  '불두화'와 '미노'를 거쳐 '그 재난의 조짐은 손가락에서부터 비롯되었다'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를 대상화시키는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작품으로 마무리를 한 데에 나는 왠지 이 소설의 단편들이 하나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맞추어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 속에 흐르는 그 한 마음이 불현듯 만져질 듯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가 오지 않은 그 황량한 공간을 뒤로 남겨 두고 묵묵하게 걸어온 날들, 나도 이젠 녹슨 철로를 삼켜버려야겠다. 이미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앞 길을 걸어가야겠다. 가슴아팠던 내 청춘의 자국들을 밀려오는 파도에 쓸리는 모래 위의 자국처럼 그렇게 바다너머로 쓸려보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7-05-1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감칠맛 나는 책은 언제 또 구하셨대요?^^(따라서 보관함으로~~)
파꽃이건 장미건 열매 맺는건 다 꽃을 피워냅니다. 꽃없는 열매와 이파리는 없잖아요.
-알라딘의 파꽃처럼 매운 여우-켁~*.*

달팽이 2007-05-1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궁 위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파꽃이 마치 별처럼 흔들립니다.
우리 여우님의 말대로 모든 열매맺는 것들은 다 꽃이 있어요.
그대의 꽃향기를 둘러싸고 모인 많은 사람들과
그대의 열매를 탐하여 모인 많은 사람들 뒤에서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토비 페이버 지음, 강대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언제이던가? 서울 지하철 강남역 6번 창구에서 심 모 교수가 스트라디 바이올린으로 45분간 허름한 옷을 입고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던 적이 있다. 이 연주로 그는 16900원의 돈을 벌었다. 이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서울대 출신의 교수인지도 그가 연주했던 바이올린이 70억이나 비싼 것이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그 바이올린에 쓴 활이 1억 짜리였다니...그 오전의 급박하고 분주한 출근시간에 몇 몇 사람들은 그 선율을 듣고서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이 시간에 여기서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다니...하고 놀랐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미국의 한 도시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의 연주가 열렸다고 한다.

  집시 음악 중 유난히도 슬프면서 가슴에 착 달라붙는 음악이 있다.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Gypsy Passion"이라고 하는 바이올린 연주곡의 모음집이다. 지금은 우리 나라 모 광고에도 사용하고 있는 이 선율은 가슴 속의 꼼짝하지 못할 감정의 아킬레스 건에다 대고 활을 긁어대는 듯하다. 이 지독히도 슬픈 곡을 들으면서도 그 슬픔이 왠지 삶의 비장한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문득 내 마음으로 투명하게 모아지는 뭔가가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느낌을 찾아서 모짜르트도 듣고 베토벤도 들었다. 바흐의 바이올린 음악도 들었다. 바이올린이 가진 느낌인지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선율에 담긴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결론은 둘 다였다.

  18세기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인 스트라디 바리우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다섯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첼로의 여정을 쫓아간 이야기가 이 책이다. 메시아, 비오티, 케벤휠러, 파가니니, 리핀스키와 다비도프가 그것이다. 많은 소유권의 이전과정과 세상에 드러난 과정, 그리고 그 바이올린이 연주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바이올린 제작자의 깊은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열 세살의 천재 소년 바이올린 연주자인 매뉴인은 열 세번째 그의 생일날 케벤휠러를 선물로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위대한 바이올린은 살아 있다. 바이올린의 모양은 제작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나무는 소유자들의 역사나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연주할 때마다 내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 또는 속박당하는 영혼임을 느끼게 된다."

  천상의 선율을 담기 위해 바이올린 제작에 자신의 온 인생을 걸었던 스트라디 바리우스. 그 제작의 비밀을 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쳤지만 결국 풀어내지 못한 제작과정의 비밀들.. 그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하나의 생명체이다. 나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의 마음에 반응하여 제각각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그는 긴 배를 타고 가는 여정에서는 지치고 멀미도 하고 인간과 같이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배려되어야만 하는 의식체이다. 수많은 찬사와 수많은 음악가의 삶의 열망이기도 했던 스트라디 바리우스는 그 명성이 또 다른 생명체로 되어 탄생과 굴곡의 시간을 거친다.

  이제 그 과학의 비밀을 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그것의 가치가 얼마이고 그것의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스트라디는 제작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만들어내며 바쳤던 자신의 온 열정과 인생의 깊이로서 의미를 다했고, 연주자에게는 바이올린과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내는 선율이 허공을 가득 메울 때 그 의미를 다하지 않았는가? 청중으로서 우리는 그 선율위에 마음을 올려 선율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타고 넘으며 영혼의 우아함을 꿈꿀 때 이미 그 의미를 다가지지 않았는가? 그것을 제외하고 남은 명성과 가치는 겨울바람에 떨어져 썩고 있는 나뭇잎처럼 허무한 것이다.

  스트라디 바리우스의 흔적을 쫓는 이야기가 그의 영혼의 성장과정과 깊어짐의 과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연주자의 영혼이 바이올린과의 교감 속에 더욱 깊어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바이올린이 내는 선율의 깊은 감동에 빠지지 못한다면...우리는 인생에서 긴장해야 할 것이 많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7-05-1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바이올린 제작자.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 올인하는 장신정신을 정말 제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달팽이 2007-05-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정신이 몰입했을 때 그 생각과 생각의 틈 사이로 분출하는 아이디어와 우주의 메세지를 들어야만 비로소 인생을 담아낼 수 있겠지요.
산타님께서 사용하신 올인하는 장인정신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