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초.호조키
요시다 겐코.가모노 조메이 지음, 정장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로 시작되는 이 글은 30살에 출가하여 40대에 쓴 인생을 돌아본 유교, 도교, 불교적 깨달음이 어우러진 요시다 겐코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30년 동안이나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일본 고전 수필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첫 서단의 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심하여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사의 잡다한 글들을 그냥 써내려간 것 치고는 너무나 훌륭한 글들이 많으니 말이다. 마치 하루의 인생을 살아 본 하루살이가 다음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서 새로 맞이하는 하루를 적어놓은 글 같다. 그의 글 속에는 그래서 몇 생을 살아온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삶의 어떤 희노애락의 곡선 위에서도 그것을 미끄럼틀 삼아 재밌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아이의 동작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말이다. 때로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훌쩍 들어올려져 자연의 세계로 갔다가 거기서도 훌쩍 날아 올라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의 고향 속에 영원성 속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가 어느덧 평범한 인간의 인생사로 돌아와 작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미세한 감정 표현을 그대로 드러내어 인간 생활의 해학과 웃음 속에서도 뭔가 놓쳐버릴 수 없는 진한 향기를 떨어뜨리고 간다.

  카메라를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이대기도 하고 자연의 흐름을 재빨리 감아서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들의 시선은 때로는 창조주만큼 커지기도 하고 또 미립자와 소립자의 단계를 너머 그 없는 텅빈 공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능구렁이같은 할아버지는 여자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놀아보기도 하고 삶의 의미 없이 권세와 명예에 휘둘려 허깨비같이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그가 내려치는 손바닥이 바로 내 머리 뒤에 있는 것 같아 슬며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호조키를 이 글의 뒤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그림은 우선 밑그림부터가 다르다. 도연초는 그림에 달관한 마스터가 아무렇게나 밑그림을 스윽 스윽 그려내어 한 편의 자연스러운 경물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면 후자는 억지춘향꼴로 변사또의 수청을 뜨는 불편한 표정이 연상되니 말이다. 호조키는 인생의 수많은 굴곡과 배반을 통해 속세를 버린 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씻어내고 편안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인생 후편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앞 이야기와 뒷 이야기가 마치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어색하게 어깨를 걸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어색한 자세가 어쩌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호조키를 닮지는 않았는가? 연어는 죽을 때 자신의 새끼를 놓기 위해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했지. 아마 내 마음의 지향점도 호조키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 도연초라는 마음의 고향으로 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도연초의 서문에 눈길이 자꾸 간다.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 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 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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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서두가 정말 마음을 끄네요.^^

달팽이 2007-06-08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입니다. 혜경님.

혜덕화 2007-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 구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새롭네요.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예전에 느꼈던 감동을 느낍니다. 가끔 책 정리해서 아름다운 가게에 가져다주면서, 내게 꼭 100권만 남긴다면 무얼이 남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백권만 남기기엔 책이 많아서 차츰 차츰 줄어들면 추려볼까도 생각중입니다. 자꾸 사들여서 줄어들긴 커녕 좁은 책꽂이에 늘 빈자리가 없어, 책욕심도 줄여야하는데, 싶기도 하네요.

달팽이 2007-06-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 혜덕화님.
그 말 듣고 보니 저도 반성할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을 때 소용닿는 곳에 기증하고 싶군요...ㅎㅎ
이 책도 좋은 책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