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스님께서 공부가 익으신 뒤 천하를 한 바퀴 돌면서 많은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내리셨다. 그분의 제자들이 전국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 중국 산동성의 어느 암자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친구의 12살 난 사미승이 밀떡 두 개 반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조주 스님이 손님이시니 밀떡을 먼저 올릴 줄 알았는데 자기 스님에게 먼저 한 개를 올린다. 조주 스님께서 다시 생각하시길, 이제 남은 한 개 반 중에 한 개는 당신께 올리고 반 개는 사미승이 먹을 줄 알았는데 조주 스님께서는 드리지 않고 한 개 반을 자기 앞에 당겨 놓고 먹는다.
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조주 스님인지라 친구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보게 자네 저 아이 잘 가르치게."
친구가 대답했다.
"남의 아이 버릇 고치다 잘못하여 아이 버리기 싫네."
그때 조주 스님은 크게 깨치셨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두고 잘못 가르친 일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뒤돌아보게 되셨다.
그 어린 사미는 도인을 깨치게 한 공덕을 지었다.
남을 가르쳐야 할 입장이 되었을 때 부처님 마음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심부름하는 마음으로 그네들을 만지면 밝은 일이나, 내가 만지고 내가 가르친다면 내 아상이 작용하여 배우는 이들은 거부감을 느끼고 또 가르치는 이의 그림자를 받게 된다. 그때 서로 어두운 업보들이 충돌하면 밝은 일은 못된다.
흔히들 가르친다는 미명 아래 얼마나 남을 구속하고 자신의 닦지 못한 독심으로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가! 완벽하신 부처님의 경우라면 삼세를 혜안으로 보시고 그 사람이 지어 온 바를 참작하여 밝게 이끌어 가시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아이는 영영 비뚠 길로 갈 수 있고 반항심으로 일관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이 와서 물을 때 성실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는데 억지로 가르치지 않는다. 꼭 가르치고 싶을 때 가르치겠다는 그 마음을 닦고 가르치면 상대가 부담을 안 느끼나,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가르칠 때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마음에 짜증이 일어난다. 짜증이 일어나면 이미 불사는 아니다. 그때는 내 정도가 이 정도인 줄 알고 부지런히 그 짜증을 바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