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 심리적인 것인가, 영적인 것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이정선 옮김 / 생명의샘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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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하나의 논제로부터 난해한 시작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이 짧은 책자 안에서 복음전도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번역상 매끄럽게 읽기에 좀 어려운 문장들이라 좀 더 풀어서 해설식으로 접근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살짝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변증서와 같다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인 윌리엄 사강(감리교신자) 박사의 저서 ‘Battle for Mind'에 대한 로이드 존스 목사의 변증이다.

윌리엄 사강은 오늘날 잘 알려진 파블로프의 개, 조건반사에 대한 자료를 접한 뒤 이것이 자신의 관념유도법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건반사는 개에게 먹이를 줄 때, 종을 울리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 종만 울리자 개가 침을 흘린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사람이 어떤 훈련이나 방법으로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써 원하는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의 세뇌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후 윌리엄 사강은 개인적인 실험(관념유도법)에서 탱크부대 소속의 한 병사의 정신적외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붕괴 상태를 지나 회복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전쟁의 참상을 최면 상태에서 재생시킨 후 당시의 극단적인 흥분까지 다달을 때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 경험의 재현을 통해 드물게 치료 효과를 얻었다.

 

이런 사강 박사의 경험 이후 아버지의 서재에서 존 웨슬리의 일기를 발견했는데, 거기서 성령의 각성과 흥분에 관한 대목을 접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과 실험에 일치하는 현상으로 결론 내렸다. 이로써 그는 회심이 영적인 사건이 아니라 앞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관념유도법과 동일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어떤 충격적인 방법으로 멘탈이 붕괴되고 그 이후가 되면 어떤 목적하는 가르침을 쉽게 주입할 수 있다는 것이 관념유도법의 개념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사강 박사의 위험한 사상을 반박하고, 변증하는 동시에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라고 언급한다. 물론, 회심은 성령의 사역이고. 사강 박사와 같은 주장은 앞 뒤 상황을 전혀 배제한 하나의 장면만을 놓고 펼쳐지는 주장으로 바울이 극적인 회심에 이르기 전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제자들이 오순절 갑작스런 성령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도 설명할 길이 없다. 기타 여러 반박과 변증이 설명되어진다. 결론에서 로이드 존스는 단지 반박만 말하지 않고, 이러한 사건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유념해야 할 교훈을 말한다. 적어도 오늘날 어떤 현대적인 방법론에 의존해 복음을 전하고 회심을 이끄는 것들 중에 충분히 그런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 전도를 위한 어떤 인간적인 기교를 주의해야 된다는 것.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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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와 그의 독서 생활
프레데릭 캐서우드 외 / 양무리서원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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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얇은 책자는 로이드 존스 목사 사후 그의 사위와 딸이 복음주의 도서관’(로이드 존스 목사가 관장으로 봉사함.)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강연의 주제는 두 가지로 우선 첫 번째는 사위 프레데릭 경이 교사와 설교자와 목사로서의 로이드 존스를 언급하고, 딸 캐서우드 여사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독서생활을 주제로 강연했다. 한편, 이 책자에는 부록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저서들을 시대순으로 안내하고 있다. , 이 부록의 도서목록은 영문판 그대로이다.

 

일반적인 자서전이나 평전과 달리,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가족들에 의해 소개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생활상이기에 친근하고 서민적인 느낌이었다. 프레데릭 경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다양한 학식과 탐구력. 뛰어난 통찰력과 예견력을 얘기한다. 토론회를 직접 인도하면서 다양한 질문과 의견, 또는 반대의견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부터 탁월한 변증과 적용을 하였던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단신으로 복음주의 노선에 서서 자유 인본주의 앞에서 후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의 인간미도 빼놓지 않는다. 손자들에게는 그저 할아버지였다는 그는 모두가 조심스러워 했던 존스 목사의 서재에서 손자들만큼은 떠들고 웃으며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강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일상에서는 매우 온유했다고 한다.

 

한편, 다독가이자 박식한 로이드 존스 목사를 상상할 때 그의 독서생활이 참 궁금하다. 그러나 캐서우드에 따르면 그는 글을 빨리 읽지는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 조차도 책을 빨리 읽고 싶어 속독법에 대한 책을 찾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안타깝게 그에 맞는 좋은 책은 못 찾았기에 그냥 원래의 독서법으로 돌아왔지만. 대신 책을 곱씹어 읽으면서 진액을 얻어내면서 책의 모든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기억했다고 한다. 캐서우드는 아마 그것이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다음은 독서에 대한 교훈들 중 일부를 본서로 부터 인용하겠다.

 

독서가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서가 독자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독서를 지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독서를 해서는 안 된다... 독서는 남 앞에서 잘 읽고 잘 안다는 것을 뽐내려고 하는 자기 선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앵무새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을 크게 반대했습니다. 여러 강사들이 17~19세기 저술가들에게 도취되어 그들의 사상을 옛 표현 그대로 가져다 옮기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독서의 기능은 우리들의 생각을 자극시켜서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책은 철저히 소화시키며 읽어야 한다.’

 

책을 잘 씹고 소화하면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나는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내가 읽은 독서의 진액들이다. 하지만 이 진액이 나의 사고의 결정(結晶)이다. 그것은 오리지날 자체를 위한 독창성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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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 - 작은책 경건시리즈 3
도날드 디머레이 지음, 정영선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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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디머레이 편저라고 되어져 있듯, 웨슬리의 기도문이나 일기. 설교의 한 부분 등을 인용한 소책자이다. 특별히 이 부분을 밝혀두는 이유는 이 책이 혹시나 웨슬리의 자서전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알고 이 책을 구입했었기 때문이다. 두텁지 않고 자그마한 책자로 사실 그렇게 어떤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명백한 속죄와 구원의 확신을 다루는 웨슬리의 고백들이 최고 위로의 메시지라 하겠다. 웨슬리의 메시지에 대한 입문서 정도로 활용하기에는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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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
최영기 지음 / 나침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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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처음으로 구역의 일을 하게 되면서 어떤 지침이 될만한 도움을 얻고자 책을 찾던 중 구입하게 된 책이다. 모처럼 읽는 너무 쉬운 아니, 대중적인 글이어서 편안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접어놓고 매일 일정하게 읽진 못해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얻은 감흥을 꾸준히 갖고 가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총평을 하자면,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 가장 큰 영향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은 첫째 구역장이라기 보다 목회자이다. 그리고 구역장이다. 또는 교회의 어떤 리더들이라 할 것이다. 본서의 지침은 근본적으로는 'Where Do We Go from Here, Touch Outreach Ministries'란 가정교회사역 지침서로 부터 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Cell church로 지칭되는 가정교회사역을 통한 교회성장과 부흥이다. 이 책에서 영향을 받은 저자는 개인적으로도 평신도사역을 거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더불어 목회를 하면서 그러한 가정교회 형식을 접목시킴으로써 그의 목회사역에 성공적인 결과들을 얻어냈다.

 

사실, 본서에서도 언급하지만 평신도사역자의 가장 큰 어려움이자 위험이 담임목회자와의 방향이 다른 것. 이견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즉, 가정교회는 목회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평신도사역에 대한 비중을 실어줘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이 본서가 보통의 교회에서 구역장으로서 역할을 더 잘 하기 위한 지침으로만 활용할 목적에서 접근하면 대략 난감해진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이 책이 단지 가정교회에 대한 광고만 하는 책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리더들이 참고할 만한 어떤 덕목을 아우르고 있기에 유익을 얻게 된다.

 

우선 책의 저자인 목사님의 마인드가 참신했다.

'제가 평신도였을 때 목회자들이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바램이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바램도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목회자가 된 지금 과거 목회자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바랐던 것을 하고, 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존중, 자기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에피소드, 목회에 대한 특권의식배제, 평신도사역자의 연장선상이라는 마음가짐 등 곳곳에서 성도들의 마음에 편안하고 존경심이 생기는 목회자로서의 자세로 교회를 변화시켜나가는 모습들이 감흥을 주었다. (참고로, 저자가 시무하는 미국휴스턴의 서울침례교회는 부임당시 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팽배할 때였다.)

 

한편, 가정교회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과 그 후 마음의 이야기들이 나눠지고 반드시 그 내용은 그 모임 안에서만 비밀로 부쳐지고 사람들의 말거리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나눠지는 모임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돈돈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일개의 평신도 구역장으로서 내가 적용해볼 수 있는 것들은 여러 사정상 충분치는 않지만 아무쪼록 한 모임을 이끌어가는 장의 역할에 있어서 내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서는 많은 팁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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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와 그리스도인의 균형_2013.02.0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8.)

 

( 4:27, 개역)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날은 지식의 풍년시대다.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지식이 풍족함은 비단 세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지식이 풍성한 세대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한다면 희망한다면 지식의 풍족함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저술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후세대의 수많은 개혁주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둔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신앙사상을 글로 남겼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 세대의 글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 성경이 기록되어 오늘의 세대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신앙인의 수많은 저작들이 글로써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이 더욱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을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많은 만큼 가르치는 것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스스로 가르치려는 이들도 많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적 지식을 많다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는 있지만 불리한 것도 많다. 무엇이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면성은 있다. 적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가르치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은 늘 많이 적용하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3:1-2, 개역)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많은 청년들이 지식의 산을 열심히 오른다.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가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일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고,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이 완전해져 가는 지식일까? 성경이 만약 교과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학습지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의해 운동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에 깊숙이 개입하신다. 그것은 경험과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이며,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아우르는 대백과사전 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동시에 영혼과 내세,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동시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 성경이 그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일까?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는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을 필요로 한다. 지식의 영이라 하면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개념 그대로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오셨던 시기가 로마시대 였다라든지. 두 렙돈이나 데나리온이 얼마의 가치인지. 유대와 사마리아가 어디에 위치했으며,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 지형과 기후는 어땠는지. 그러한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을 몰라도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이해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삼위일체와 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 구원론, 인간론, 신론, 죄 등등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이 한 부분이다. 신학을 쉽게 분해하면 교리이다. 교리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론적 토대이며, 뼈대이다. 이렇게 신학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한편, 성경은 많은 예언적 기록이 있다. 예언에 대한 풀이와 해석에 대한 지식. , 예언적 지식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를 이러한 지식의 앎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것도 고작 지식의 한 모퉁이를 곡괭이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식의 영 못지 않게 묵상의 영도 필요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곱씹음과 사색, 관찰, 검토의 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의 샘을 캐낼 수 있다. 그것 역시 성경을 많이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묵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지식은 성구사전이나 주석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묵상은 개인적인 성령님의 조명하심 안에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다른 의미에서 영성을 필요로 한다. 깨어있는 기도와 깨어있는 삶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영혼 안에 밝게 비춰진다. 그 빛의 조명을 따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겨진 많은 보화 중 어느 일정한 깊이의 어느 한 부분을 자기 믿음의 분량에 맡게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의 뒷받침에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다. 바로 논리와 감성이다. 묵상은 그냥 영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 안에서 재정립되면서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감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분석하고 비평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감성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느껴보고, 살펴서 가슴에 와닿는 그것. 바로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묵상의 영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이다.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진리. 바로, 경험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결핍을 안고 있다. 경험이 없는 지식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 있고, 머릿속에만 정립 되어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투쟁적으로 나타나는 실상이다. 경험은 참된 지식의 분명한 스승이다. 신앙의 체험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준비자체가 충분치 못하다. 경험은 성경을 가슴과 눈물로 읽게 한다. 그것을 사실과 진리로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으로 생기를 불어주는 어떤 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그저 지식의 영을 좀 아는 정도로, 묵상의 영을 조금 맛보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 경험의 영을 두루 아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 성경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공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성경지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어느 하나만 위대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볼 줄 알고, 많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균형을 잃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떠내려가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적용하면서 유익한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서 취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하기의 잔느 귀용. 이러한 책들이 유익할 수 있지만 또한, 묵상과 기도에 심취한 그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사람은 책 속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사상에 휘둘리고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객관적이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건전한 평가를 받는 것일 거다.

 

단지, 에드워즈 뿐 아니다. 목회.설교.신학을 다 아울렀던 칼빈이나 청교도 여러 저자들이 건전한 비평을 얻는 이유도 다양한 경험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게 경험한 것이 많이 경험한 것을 이기기는 어렵다. 성경을 단지 주석과 난해구절 해석정도에 대한 지식으로 많이 안다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고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폭넓은 가르침이 요구되는지 알 때, 우리는 겸허해 진다. 모래사장의 한 켠에서 조개껍질 한 조각을 줍고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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