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 - 작은책 경건시리즈 3
도날드 디머레이 지음, 정영선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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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디머레이 편저라고 되어져 있듯, 웨슬리의 기도문이나 일기. 설교의 한 부분 등을 인용한 소책자이다. 특별히 이 부분을 밝혀두는 이유는 이 책이 혹시나 웨슬리의 자서전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알고 이 책을 구입했었기 때문이다. 두텁지 않고 자그마한 책자로 사실 그렇게 어떤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명백한 속죄와 구원의 확신을 다루는 웨슬리의 고백들이 최고 위로의 메시지라 하겠다. 웨슬리의 메시지에 대한 입문서 정도로 활용하기에는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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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
최영기 지음 / 나침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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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처음으로 구역의 일을 하게 되면서 어떤 지침이 될만한 도움을 얻고자 책을 찾던 중 구입하게 된 책이다. 모처럼 읽는 너무 쉬운 아니, 대중적인 글이어서 편안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접어놓고 매일 일정하게 읽진 못해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얻은 감흥을 꾸준히 갖고 가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총평을 하자면,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 가장 큰 영향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은 첫째 구역장이라기 보다 목회자이다. 그리고 구역장이다. 또는 교회의 어떤 리더들이라 할 것이다. 본서의 지침은 근본적으로는 'Where Do We Go from Here, Touch Outreach Ministries'란 가정교회사역 지침서로 부터 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Cell church로 지칭되는 가정교회사역을 통한 교회성장과 부흥이다. 이 책에서 영향을 받은 저자는 개인적으로도 평신도사역을 거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더불어 목회를 하면서 그러한 가정교회 형식을 접목시킴으로써 그의 목회사역에 성공적인 결과들을 얻어냈다.

 

사실, 본서에서도 언급하지만 평신도사역자의 가장 큰 어려움이자 위험이 담임목회자와의 방향이 다른 것. 이견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즉, 가정교회는 목회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평신도사역에 대한 비중을 실어줘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이 본서가 보통의 교회에서 구역장으로서 역할을 더 잘 하기 위한 지침으로만 활용할 목적에서 접근하면 대략 난감해진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이 책이 단지 가정교회에 대한 광고만 하는 책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리더들이 참고할 만한 어떤 덕목을 아우르고 있기에 유익을 얻게 된다.

 

우선 책의 저자인 목사님의 마인드가 참신했다.

'제가 평신도였을 때 목회자들이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바램이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바램도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목회자가 된 지금 과거 목회자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바랐던 것을 하고, 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존중, 자기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에피소드, 목회에 대한 특권의식배제, 평신도사역자의 연장선상이라는 마음가짐 등 곳곳에서 성도들의 마음에 편안하고 존경심이 생기는 목회자로서의 자세로 교회를 변화시켜나가는 모습들이 감흥을 주었다. (참고로, 저자가 시무하는 미국휴스턴의 서울침례교회는 부임당시 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팽배할 때였다.)

 

한편, 가정교회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과 그 후 마음의 이야기들이 나눠지고 반드시 그 내용은 그 모임 안에서만 비밀로 부쳐지고 사람들의 말거리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나눠지는 모임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돈돈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일개의 평신도 구역장으로서 내가 적용해볼 수 있는 것들은 여러 사정상 충분치는 않지만 아무쪼록 한 모임을 이끌어가는 장의 역할에 있어서 내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서는 많은 팁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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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와 그리스도인의 균형_2013.02.0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8.)

 

( 4:27, 개역)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날은 지식의 풍년시대다.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지식이 풍족함은 비단 세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지식이 풍성한 세대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한다면 희망한다면 지식의 풍족함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저술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후세대의 수많은 개혁주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둔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신앙사상을 글로 남겼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 세대의 글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 성경이 기록되어 오늘의 세대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신앙인의 수많은 저작들이 글로써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이 더욱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을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많은 만큼 가르치는 것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스스로 가르치려는 이들도 많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적 지식을 많다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는 있지만 불리한 것도 많다. 무엇이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면성은 있다. 적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가르치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은 늘 많이 적용하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3:1-2, 개역)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많은 청년들이 지식의 산을 열심히 오른다.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가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일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고,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이 완전해져 가는 지식일까? 성경이 만약 교과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학습지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의해 운동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에 깊숙이 개입하신다. 그것은 경험과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이며,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아우르는 대백과사전 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동시에 영혼과 내세,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동시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 성경이 그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일까?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는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을 필요로 한다. 지식의 영이라 하면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개념 그대로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오셨던 시기가 로마시대 였다라든지. 두 렙돈이나 데나리온이 얼마의 가치인지. 유대와 사마리아가 어디에 위치했으며,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 지형과 기후는 어땠는지. 그러한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을 몰라도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이해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삼위일체와 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 구원론, 인간론, 신론, 죄 등등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이 한 부분이다. 신학을 쉽게 분해하면 교리이다. 교리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론적 토대이며, 뼈대이다. 이렇게 신학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한편, 성경은 많은 예언적 기록이 있다. 예언에 대한 풀이와 해석에 대한 지식. , 예언적 지식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를 이러한 지식의 앎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것도 고작 지식의 한 모퉁이를 곡괭이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식의 영 못지 않게 묵상의 영도 필요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곱씹음과 사색, 관찰, 검토의 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의 샘을 캐낼 수 있다. 그것 역시 성경을 많이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묵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지식은 성구사전이나 주석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묵상은 개인적인 성령님의 조명하심 안에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다른 의미에서 영성을 필요로 한다. 깨어있는 기도와 깨어있는 삶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영혼 안에 밝게 비춰진다. 그 빛의 조명을 따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겨진 많은 보화 중 어느 일정한 깊이의 어느 한 부분을 자기 믿음의 분량에 맡게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의 뒷받침에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다. 바로 논리와 감성이다. 묵상은 그냥 영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 안에서 재정립되면서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감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분석하고 비평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감성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느껴보고, 살펴서 가슴에 와닿는 그것. 바로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묵상의 영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이다.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진리. 바로, 경험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결핍을 안고 있다. 경험이 없는 지식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 있고, 머릿속에만 정립 되어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투쟁적으로 나타나는 실상이다. 경험은 참된 지식의 분명한 스승이다. 신앙의 체험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준비자체가 충분치 못하다. 경험은 성경을 가슴과 눈물로 읽게 한다. 그것을 사실과 진리로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으로 생기를 불어주는 어떤 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그저 지식의 영을 좀 아는 정도로, 묵상의 영을 조금 맛보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 경험의 영을 두루 아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 성경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공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성경지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어느 하나만 위대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볼 줄 알고, 많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균형을 잃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떠내려가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적용하면서 유익한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서 취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하기의 잔느 귀용. 이러한 책들이 유익할 수 있지만 또한, 묵상과 기도에 심취한 그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사람은 책 속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사상에 휘둘리고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객관적이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건전한 평가를 받는 것일 거다.

 

단지, 에드워즈 뿐 아니다. 목회.설교.신학을 다 아울렀던 칼빈이나 청교도 여러 저자들이 건전한 비평을 얻는 이유도 다양한 경험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게 경험한 것이 많이 경험한 것을 이기기는 어렵다. 성경을 단지 주석과 난해구절 해석정도에 대한 지식으로 많이 안다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고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폭넓은 가르침이 요구되는지 알 때, 우리는 겸허해 진다. 모래사장의 한 켠에서 조개껍질 한 조각을 줍고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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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이웃 돕기는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 7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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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란 테마로 발행된 소책자이다. 구입한 건 아닌데 괜찮은 독자였는지 증정품으로 삽입되어 왔다. 얇은 책자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원제는 'Much in Deed of Charity' 뭐, 풍성한 자선행위. 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굳이 '불우이웃돕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다.'라고 설교가 전달하는 중심메시지로 제목을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부제 정도로 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에드워즈가 맘에 들어할까? 본문으로 채택된 말씀은 고넬료이다.

 

(행10:4-6)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본문으로 부터 고넬료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된 동기, 성령을 입은 계기가 바로 그의 기도와 구제의 풍성함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불어 잠언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잠11:25). 세례요한의 가르침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등 자선과 관계되는 여러 말씀들을 병행인용하며 자선이 신자에게도 매우 필요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분명, 이 설교의 메시지로 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 대한 자선과 성도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설교 그대로를 인용하자면 자선은 신자의 의무이다.)

 

한편, 내용 중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다. 의구심이라고 해야겠다.

 

(마 7:13-14, 개역)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자선을 의무사항으로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이다.(p.37)

 -(본문중)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원칙이 아주 좁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문과 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언뜻보면 평범해보인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흐름에서 이 구절이 자선이 의무임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에 정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5장, 6장에서 자선을 언급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산상수훈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팔복. 율법.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사랑. 구제. 주기도문. 재물. 걱정마라. 비판하지 마라.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좁은문 등등.

그러므로 이 좁은 문에 대한 구절이 자선과 연관된다는 해석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가 볼 때는 이 구절은 여러 산상수훈 중 하나인 좁은 문에 대한 교훈. 천국에 가는 길이 그만큼 좁고 협착해 천국에 가는 사람이 적다는 그 교훈일 뿐이다.

 

두 번째,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로 인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한다.(p.44)

 -(본문중) 고넬료처럼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이 성공하는지, 성령이 충만해지는지,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는지를 보십시오.

 첫째, 자선 행위는 성령이 특정 개인의 영혼에 신령하고 달콤한 영향력으로 다가오게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둘째, 만일 부모나 가장들이 자기 집의 소유를 자선하는 데 많이 사용한다면 자선 행위는 성령이 가족 위에 부어지는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한 집단이 사람들이 자선 행위를 풍성히 하면 성령이 사람들 위에 충만히 부어집니다.

 

그리고 휫필드나 어떤 부흥사들의 자선행위를 통한 부흥과 성공적인 사역도 말한다.

다만, 다소 모호한 것은 있다. 우선,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그 들으심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베드로를 초빙하게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이 임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의 개인적인 임재나 가족단위의 임재가 된 근거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애매하다. 그것이 성령을 받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충만을 받는 직접적인 동기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느낌이다. 오히려 직접적인 동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넬료의 구제가 성령충만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초의 동기제공은 됐지만,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베드로를 초빙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것이다.

 

성전의 미문의 앉은뱅이는 자선행위는 커녕 자선을 받아서 살아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을 때 그는 성령충만하여 뛰고 걸으며 찬양했다. 성령은 자유롭게 일하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 물론, 에드워즈는 자선행위가 성령충만을 받는 하나의 유력한 방편이 된다는 얘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성령충만' 과 같이 자선행위 자체가 직접적인 성령충만의 동기라고 단정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단순히 에드워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접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편견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판단은 또다른 독자들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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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하나님의 격려 한마디 365 매일 아침 365 시리즈 4
찰스 H. 스펄전 지음, 장남혁.심광수 옮김 / 두란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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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하는 우스개소리지만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똑똑했던 걸까?'

물론, 지금이 더 많은 학문과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더 새롭고 세련된 고급지식을 배우기 좋을 것이다. 전반적인 지식수준은 오늘날이 훨씬 높은 것은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과거 사람들의 지식수준은 근대적이지는 못했고, 평균적으로 높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인물들에게는 유독 두드러지는 학문적인 우수함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신앙의 많은 위인들을 보면 그들이 비교적 당대의 보편적인 지식수준보다 굉장히 우수한 인재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글쎄, 그것인 단지 머리가 비상하다는 의미로 제한할 수는 없지만 학문적인 열의와 탐구심이 투철했다고 할 수 있겠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선구자였던 칼빈, 루터, 츠빙글리 등 그들이 그러했고 수많은 청교도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 사람 스펄전도 마찬가지.

 

과거 많은 설교자들이 신학교라든지 정규학업이라든지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사례와 같이 스펄전도 17세 때 부터 설교를 했다. 20세 담임목사로 청빙되었다. 상당히 놀라운 일 아닌가? 휫필드도 소위 소년목사로 데뷔했다. 오늘날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정규학업을 국가 보장하고 있고, 정규대학이 일반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부족함' 내지 '불량'으로 오인되기 쉽상이다. 비록 어린 나이에 목회의 일선에서 설교를 감행했지만 그렇게 능력있는 설교와 목회로 후세대에 귀감을 주는 많은 신앙위인들에게 은혜를 입는다.

 

본서는 스펄전의 3000편의 설교 중 2000편을 집중분석해 1일 1주제별로 메시지를 담고 있다. 365일 하루 한 편 씩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총 365편의 메시지가 실렸다. 성경구절 한 절과 설교의 메시지. 읽기에 부담도 없고, 대중적인 설교인데다가 위로와 묵상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에 아주 훌륭한 편집이라 생각된다. 좀 쉽게 풀어보면, 설교를 듣는 중 은혜가 되는 말씀을 적어두듯이 이 책은 조각설교모음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내가 얻는 묵상과 위로의 메시지 뿐 아니라, 형제자매님에게 위로의 문자 하나를 보내고 싶을 때도 유용하게 활용되어질 수 있는 이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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