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제님과의교제_2009.12.01

 
식사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나는 K형제님의 신앙관을 듣게되었다. 그것은 최근에 있었던 그 분의 신앙적인 사색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요지는 근 3년 정도 우찌무라 간조의 전집을 다 읽었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어떤 큰 변화가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중점내용은 우찌무라 간조는 교회를 떠나 독립주의 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과 그가 17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실제 회심한 것은 23살 미국 유학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을 회고할 때 이미 17세 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K형제님은 두 가지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첫째는 우리 침례회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는 전도인들의 교권주의가 강화되고 있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정확하다는 이유에서 뭉쳐지면서 지나친 배타적 성향 등등 교회관이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과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시기를 고려할 때 구원이란 것이 우리 침례회가 가르치는 ‘깨달음’과 ‘거듭남의 확신’과 같은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그 자체의 중요성을 배척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위 정통파 장로회, 칼빈주의적 사고에서 단순히 믿는다는 고백과 믿는다는 진심만으로 구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그런 류의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K형제님은 구원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나는 그 분이 조심스레 꺼내는 자신의 논지들을 차분히 들었다. 물론, K형제님은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은 소위 기존의 우리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논지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K형제님은 당황했고, 놀라기 시작했으며, ‘병훈 형제 말 잘하네. 전도인 해도 되겠네’, ‘와, 놀라운데~ 대한예수교침례회에서 이런 형제 만나기 힘든데’, 떠날 땐 ‘형제, 오늘 내가 진짜 큰 교훈을 얻었다.’ 등등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의 논지는 이와 같다. 신학과 사상이란 것이 기독교가 중세 로마시대부터 공인되어 국가적 종교의 형태이자 생활의 윤리가 된 서양에서는 신학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믿든 그러하지 않든 기독교의 윤리와 사상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정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시급했다. 더불어 많은 어설프게 믿는 자들이 오류를 범했기에 성경적 사상가들은 그것을 변론해야 했고,(가장 큰 것은 카톨릭 교리때문이다.) 신학과 사상은 매우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유교적 문화권에 기독교란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독창적이고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학이란 것은 색깔 자체가 다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신학과 공통점을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런 환경적인 차이는 신학을 얼마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달라지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우리교회에서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 신학을 접목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그 시도부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럼으로 해서 신학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접목점을 찾아가려는 시도 자체가 기독교가 성장해온 배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질적일 수 밖에 없고 위험한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교회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교회가 하나의 네트워크 된 형태로 발전한 상황에서 보자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처럼 목회자가 독립된 자기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면 각자 자기의 사상과 생각이 틀려도 속된 말로 따로 놀면 그만일지 모르겠지만, 우리교회는 연합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기준과 선에서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중심으로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교회가 공개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권장한다는 것 자체가 유익하지 못한 것이 된다. 분명 그렇게 되면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어 수도 없이 조각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방대한 기독교 역사 속에 만들어져 온 신학을 폐기할 것인가? 그렇지 만도 않다. 다만, 접목을 잘 시키는 방편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다. 교리나 신학적 견해는 사실 모든 사람이 다 틀리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도 성경에 대한 이해와 접근법은 다 다른 것이다.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중심 진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과 사상이 조금 다른 것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나무가 한 기둥에 하나의 뿌리를 박고 서 있지만 가지는 동서남북 사방을 뻗어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가 칼빈이든 루터이든, 조나단 에드워즈 이든 누가 되었든 그들의 신학과 사상이 무결점의 사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분명 누구나 틀린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책을 통해 그들의 사상이 마치 진리인양 그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신학에 접근하고 이해할 때는 무엇보다 ‘객관성’과 ‘균형’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어떤 사상가의 말과 논지를 듣고 ‘아~ 이렇구나! 이거구나!’라며 감탄하며 그것에 흥분해서 심취해서는 위험한 것이다. 그가 A는 B이다라는 논지를 전개했다면 우리는 그냥 ‘아, 이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생각했구나. 이렇게 받아들였구나.’란 정도로만 인식하고 넘어가면 된다. 보다 3인칭의 관점에서 관찰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이 다르고 루터가 다르고 에드워즈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들로 오류를 소지하고 있다. 진리는 오직 성경일 뿐이다. 이로써, 사상이란 안경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시도부터도 건전하지 못하다. 성경으로부터 사상을 이해하고 판단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교회가 완전하지는 않다.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오늘 현재는 가장 완벽한 교회인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는가!.(이건 마치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리라^^)

분명 칼빈이 교회와 루터의 교회가 지금에 와서 보면 부족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곳이 복음의 전당이었고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교회인 것이다. 난 우리 교회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신학과 사상이 좀 틀린 것은 가지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신학적인 사상을 많이 알고, 그것으로 논쟁과 토론을 일삼는 것은 재밌고 즐거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중세시대 논쟁이 중요했던 이유는 성경적인 교리와는 너무나도 엉터리이고, 마귀적인 카톨릭 교리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큼 불가피하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도 개신교 안에서 그런 무지한 논쟁에 핏대를 올린다는 것음 복음이란 핵심적 진리를 핵심으로 소유하지 않은 자들의 자기기만인 것이다. 비유하지면, 어떤 무지한 자들이 미개인에게 자동차는 나무바퀴를 달고도 100KM 이상 달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자동차 전문가들이 와서 터무늬 없는 가르침에 기겁을 하고 자동차는 타이어를 달아야 달릴 수 있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거짓은 구별되었고, 미개인들은 분별력을 가졌다. 근데 그 다음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타이어의 사이즈, 고무의 재질, 브랜드 이런 것들을 놓고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변치 않는 진리는 어떤 타이어든 장착이 되면 차는 달리는 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최상의 것에 차이는 좀 있겠지만. 신학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칼빈주의도 소용없고, 알마니안주의도 소용없다. 복음을 어떻게 전했느냐 그것만이 남는 것이다. 신학적 논쟁은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변론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고 소모전이다.

정통적 신학으로부터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도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다고 신학적인 정통 맥락을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이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정체성도 카톨릭적 입장에서 벗어난 진로였기 때문에 카톨릭에서 정체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언제나 불변하는 진리는 복음은 성경의 핵심이며 이것을 나눴다면 우리는 다 형제이며, 자매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보다 포용적인 자세에서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현재 내가 속해 있는 복음의 자리에서 충실히 복음전도의 사역에 임하는 것이 참된 정체성인 것이다.

저녁에 K형제님께 문자가 왔다. ‘오늘 형제 만나 좋은 하루였고 감동있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해 구원에 대한 관점을 충분히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K형제님은 강하게 나로 하여금 함께 일하자고 권해왔다. 그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나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의 결정은 이와 같은 것이데, 가끔 교제를 할 수는 있어도 K형제님과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피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종종,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하려는 형제님과 끝없는 소모전을 벌일 수 있으며, 그것 자체가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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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_2007. 11. 24



올해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또한, 개인이 가지는 열망과 노력, 의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오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곤 한다.

나는 사람의 의지가 어느 정도만큼 하나님의 의지에 영향력을 끼칠까 궁금했다. 이로써 내 의지에 국한된 단순한 인간적인 의로 파생된 열정으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길 바랐다.

오늘은 다시금 이 기도제목을 아래는 가운데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람이 가지는 강력한 의지는 결과의 향상을 가져다주며, 소망의 문을 여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허락된 것이란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전혀 마음도 없었던 것을 사람의 강력한 의지와 간구가 이룰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 같다. 성경에서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기타 등등... 선지자들이 긍휼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이미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간구를 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어넣으셨고, 그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베풀고자 하신 긍휼을 그들의 기도로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신 것 같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주권과 섭리 아래에서 사람은 일련의 강력한 갈망과 의지를 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께 작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의 섭리에서 시작된 것인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였다. 사람 역시 만물의 하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없이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사실상 사람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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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학적 색깔인가_2005. 7. 9

소위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가 혼용되어있다.(오히려 칼빈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알마니안주의로 불려질 것이다.) 복음과 윤리의식은 청교도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에 있어 개인의 영향력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소위 알마니안적 사고다. 특이점은 전 세대의 역사는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의 양극단으로 나뉘어져 대립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는데 청교도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은 큰 부흥을 경험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라 생각했기에 비신자들의 구원문제를 하나님의 행할 일로 남겨두는 다소의 경향 때문인 것 같다. 반면, 피니나 웨슬리는 큰 부흥을 체험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피니의 인간적인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크게 반박하고 그의 부흥을 인위적인 것이라 비난한다. 한편, 조지 휘트필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고 하는데 그는 위대한 부흥을 체험했다. 무엇이 그를 부흥케 했을까? 과연, 그는 일반적인 칼빈주의자였을까? 나는 휘트필드를 연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부흥은 칼빈주의에도 알마니안주의에도 있지 않다. 부흥은 주의를 뛰어넘어있다. 이는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해야할 점이다. 다소의 신학적 흠이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쓰셨다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고 칼빈주의가 아닐까.

#교리적 이해차이로 인한 교회의 분리는 언뜻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분리,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는 마치 사단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교회의 분열은 뜻하심이 아닐지라도 분열되지 않음이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 교회의 분리가 오히려 더 유익한 무엇인가가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분리마저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성공적인 사역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분열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피니는 보통 그의 저서에서 설교는 이해하기 쉽고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책들이 어려운 것은 출판사나 번역자들이 지나치게 신학적인 성격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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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속에서 여호와께 영광_2008. 3

 

근래 나의 잘못한 몇 가지에 대한 고민과 회개 가운데서 나의 남은 생애 속에서 소망의 빛이 끊어지지 않길 기도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지만 그것을 놓쳤고 마지막 손을 내밀어 잡으려했지만 그것은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소망의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웠다. 슬펐다.

그리고 생애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소중함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영원에서 시작되어 영원으로 가는 이 짧은 세상. 그 안에서 더욱 짧고 없는 것 같은 내 생애. 이 없는 것처럼 작은 생애를 통한 섬김으로 영원의 상급을 얻고 산다는 것은 실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영원과 영원 그 안에 있는 너무나도 짧은 생애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이고 환상적인 놀라움이 아닌가! 이 작은 생애를 통한 섬김으로 영원을 보장받다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지 마음이 떨려왔다. 아! 나의 생애 속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만 있다면! 나의 생애 속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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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2_2008.1.28

 

상처, 시련 그리고 눈물... 때로는 그토록 피할 수 있길 바랐던 아픔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물리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를 저주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신할 수밖에 없다. 고통스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망각하고 우리의 상실한 영광으로 원망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보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더욱 큰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해드려야만 한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광이 패해지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종종 큰 고통과 상처를 수반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패함이란 것도 알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영광이나 기쁨은 무조건 짓밟아버리시는 분도 결코 아니시다. 우리에게 주실 영광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다만 그것이 이 땅에서 받는 영광보다 저 하늘에서 받을 영광에 더 큰 비중을 두시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머물 때는 종종 바울처럼 수모와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심전력하고 소멸되는 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생활에서 때로는 거부했던 상처들을 받으며, 원치 않은 고통과 시련의 잔을 들이켜야 할 때가 온다. 그 잔을 받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가장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그것을 위해 그저 우리를 때를 따라 단련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로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일을 변경하거나 우리 초점에 맞춰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에 그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주 우리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로부터 돌이켜서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정말 생각하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영광과 기쁨을 부러뜨리는 것을 부디 배우자. 나 자신을 포기하고 꺾는 것을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배우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저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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