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츄럴 요한

(막 1:6, 개역)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세례 요한의 별을 지어보자면 아마 ‘내츄럴 요한’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요한의 외모를 알기 쉽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여기서 요한의 인상착의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일으켜 우리를 붙잡아두는 매우 이상 야릇하면서도 무서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놓고 전에 서도석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성경 구절은 단순히 세례 요한이 심플한 삶을 살았다. 내츄럴하게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옮겼는지 모르겠지만…ㅎ) 그래서 저도 이 구절을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덧붙여보고 싶었습니다.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일러준 말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묘사하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와전된 것인지,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엘리야의 재림을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 9:11, 개역)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이 엘리야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왕하 1:8, 개역)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당시 사람들이 허리에 가죽 띠를 많이 착용했을 것 같긴 한데, 털이 많다는 점은 엘리야가 지닌 특징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더불어 왠지 모르게 세례 요한의 이미지와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고 메시야의 앞에 온 세례 요한은 그 내츄럴한 모습마저도 어쩌면 엘리야와 친숙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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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제

(고후 8:12, 개역)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장 자체가 마케도니아 교회의 후한 연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연보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할 마음이 있다면 그 있는 만큼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있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할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인정하시나요?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보고 싶은 어떤 사람의 변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할 마음이 없었다는 책망에 대한 이 사람의 변명은 이런 것입니다. ‘아뇨, 전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정말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상 내자니 금액이 적어 모양새가 나지 않아 못했을 뿐이예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의 이 말씀은 이러한 사람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 전혀 물질의 참여가 없었다면 그는 사실상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라구요.

이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얕은 의지로 우리의 부족한 행위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하게 되는지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아냐, 나도 정말 하고 싶었어.’, ‘나도 진심이었다구 다만…’ 그러나 이런 표현은 모두 정말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내지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빠지는 모순이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기만의 실체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일종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들도 발견됩니다.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문제를 적나라하게 꼬집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완악했습니다. 그 마음의 결과 그들은 모든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에 마비가 초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침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순종해야 함을 깨닫는 것에 있어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닫아버렸습니다. 완악한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십일조에 있어서 고침 받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고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 십일조를 하기 시작하면 당장 이번 달부터 내 씀씀이는 타격을 받게 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적금을 깨버려야 돼. 그건 최소한 연간 200만원의 적금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 거지. 안 그래도 얼마 모으지도 못하는데. 또한, 십일조 하는 만큼의 금액을 보완하려면 난 택시를 타거나, 파리바게트를 이용하거나, 카페에 가는 건 아예 포기해야 될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각박해지는 생활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야. 난 그 정도로 믿음이 견고하진 않다구. 정말 주님을 섬기긴 힘든 일이군. 나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나도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그것을 하기엔 너무 힘든 희생이 요구되고 있어. 난 도무지 자신이 없군. 안돼. 십일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괴롭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그는 분명 괴로움을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렵구나. 난 고난이 싫어. 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학 1:4, 개역)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재쳐 두고 각자 자기들의 집만 멋지게 지어서 사는 것을 보고 학개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한 마디입니다. 판벽한 집이란 벽을 쳐서 두른 집이란 의미로 곧, 잘 지어진 좋은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담이 무너지고, 돌이 깨지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이 들어가 잠을 자고 똥을 누고 있는데,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 시랑과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담을 쳐놓고 좋은 집을 지어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학개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당신들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저 하나님의 전 안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과 늑대가 자기 처소인양 짓밟고 들락거리며 울부짖습니다. 벌레들이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황량한 모래먼지와 낙엽과 쓰레기들이 저 거룩한 지성소까지 수북하게 싸였습니다. 저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저 모양이거들 하나님의 백성이란 당신들이 높이 쌓고 튼튼히 채워 견고한 망대처럼 집을 두르고 아름답고 멋진 집을 지어 기쁘다고 안식하고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의 양심이었단 말입니까! 이를 위해 당신들이 페르시아에서 이곳까지 되돌아온 것이었단 말입니까! 차라리 당신들조차 황무한 집에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저 비바람에 휩쓸려 가거늘’

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의 재물인 십일조함은 황무하기 그지 없는데 우리의 적금통장은 판벽된 집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의 실상입니까?

이제 마지막 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행 5:3-4, 개역)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음의 문제는 ‘사단의 마음’입니다. 아나니야는 고의적으로 땅값 얼마를 감췄습니다. 이런 고의적인 속임과 거짓말. 위선적인 아나니야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는 이 문제의 동인이 무엇인지 이와 같이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마음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을 속이려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별명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경고하시면서 네 아버지는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천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아나니야에게 말하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가 네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마저 속이려 했고,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해버렸습니다. 불가능한 속임수에 도전했습니다.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십일조에 대해서 그 얼마를 감추려 할 때, 그 마음은 사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호소하시는 성령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령님은 결코 그런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정직한 십일조를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속였습니다. 사단의 마음 거짓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얼마를 또는 그 전부를 감춰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실상 그는 성령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지배 아래에 속고 속이는 위선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상태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이 그저 도를 들으면 되고, 찬양 부르면 되고, 봉사하면 되고, 십일조 말씀 할 때 잠시 괴로워해주면 되고, 하나님의 집은 황량하면 되고, 나는 판벽한 집이 있으면 되고…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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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스타디움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전을 치르기까지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그 영향은 교회 안에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청년 형제들 일부는 함께 모여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저는 응원에 참여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그것이 ‘병훈 형제의 부족함. 아쉬운 점. 자기중심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를 따라 이에 대한 저의 의도를 변호하고 싶어졌습니다.

먼저, 제가 그 응원에 참여하지 않았던 중요한 두 가지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3S정책을 모두 알고 있고, 스포츠는 세상의 한 문화조류로써 지나친 관심을 절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둘째, 특히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새벽 3시에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나는 과연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우리가 함께 모여 새벽 3시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 시간에 일개 축구경기를 위해 열광하는 것은 제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형제가 함께 모여 그것을 응원할 만큼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응원하신 분들을 정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각자 자기 신념에 합당한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은 이러한 성도개인신념의 중요성을 매우 적합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두 부류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에 중요성을 부여할 것인가(롬14:5)와 무엇을 먹는 점(롬14:6)에 있어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에 바울은 어느 한 가지 의견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롬 14: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의 놀라운 대답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였습니다. 왜요? 그 목적이 주를 위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위배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전도란 목적을 위해 밥을 사든, 선물을 주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주를 위한 것’이 아닐 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는 자든 먹지 않는 자든 판단하지 말라’(롬14:3)고 중재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롬 14:22-23)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자기 마음에 확정하고 나면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축구응원이 옳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응원을 하러 나섰다면 저는 제 신념을 거스르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형제들이 양심의 거리낌없이 응원했다면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문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이겠지만.)

또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선포합니다. 놀라운 말씀 아닌가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이런 겁니다.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믿음’. 즉, 자기 스스로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이 없이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그 결과를 무론하고 그는 이미 죄를 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하와가 유혹에 빠졌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정녕 죽음을 갖고 올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와는 ‘어쩌면 죽을 수도 있고,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죄가 될 수도 있고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중립의 상태에서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 채 과감한 행동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죄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감수해버린 것이죠. 의심가운데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도다!’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 하기 이전에 이미 그녀는 죄가 될지도 모를 어떤 행위에 확신도 없이 손을 뻗쳤습니다.

제가 만약, 그 월드컵 응원에 있어 스스로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신념이 있었다면 그것은 저의 양심이며 저는 제 양심과 신념을 스스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저의 변명의 모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그곳에서 형제님들과 어울려 친목을 도모하며 함께 응원을 했을지 몰라도 저는 이미 제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면서 ‘이게 잘못된 것 같은데?’라는 의심가운데 무모한 행동,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신념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분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고전 10:31, 개역)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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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2011-06-2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잠 30: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잠 30:2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일이라 여겨 집니다 종이 임금된것 바보같은 이가 부자가 된것

못생기고 성질 더러운 여자가 시집잘간 것 술집 작부가 주인이 된것 등은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정석으로 살아가봤자 별 수 없는 악한 세상이라 말하는 일들입니다

우리 말에도 등굽은 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바보같은 아이가 부모에게 효도 한다 하는것입니다 그것은 모자라서 버려 두었는데 오히려 기회를 얻어 출세 하는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주위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이라 하여도 과장되지 않다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자신도 악함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러함과 같이 세상에 별볼일 없는자가 하나님의 사도가 된 일에 대하여 세상은 빈정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못믿겠다 하는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믿음이 생기지 못하도록 일을 시키실까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세상적으로 보면 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죄인들만 골라 제자 삼았다하니 세상이 깔보는것입니다

그러함에 더욱 죄를 죄되게 나타나게 하려 함임을 모릅니다

믿음이 나타남을 무색케하심을 깨닫지를 못하니 세상 기준으로 믿음을 보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네이버까페 : 겉사람과 속사람 http://cafe.naver.com/3077
 

믿음의 부재

앞서 우리는 발람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십일조에 순종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욕심’이란 것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적으로 십일조가 잘 되지 않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 1:22-25, 개역)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증거되는 믿음의 실체를 잘 다뤄주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나치게 행위의 의를 묘사하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바는 믿음의 의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행위의 의를 전혀 무시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는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는 로마서3장 31절 말씀의 구체적인 해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를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곧,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도를 실제로 행하는 자가 되는 것에 주력하고 단순히 듣고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의 독특한 증명은 ‘만약 누군가가 도를 들은 후 실행하지 않게 되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증명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도를 듣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실행하는데는 항상 어리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부분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째서 도를 듣고도 행치 않으면 자기기만에 빠진 것일까요? 무엇보다 여기서 말하는 ‘도’란 것 자체가 행함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과 사랑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행함과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에게 있어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믿음의 행위’를 가져오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도’를 계속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야기시킬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자란 것입니다.
지난 번에 얘기했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씨앗으로 묘사됩니다. 생명이 있는 씨는 반드시 심기워져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곡식을 맺는데 까지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씨는 변화를 야기시키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과 동일하게 ‘도’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과 기준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행위에 있어서도 변화를 야기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듣고도 행하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속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 들었든지, 야고보의 말처럼 듣고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제대로 들었지만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든지, 양심이 파선했든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함에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잘못된 자아에 속았기 때문에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동안 십일조에 있어 계속된 묵상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내 의무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종의 행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릇된 것을 보았지만 돌아서서는 애써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치관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릇된 마음이 듣기는 들어도 행하지는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이 상태 그대로를 방치해버렸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야고보가 이런 사람은 결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본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란 의미로 와전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만,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완전한 법과 사랑의 깊이를 충분히 숙고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를 지나칠 정도로 얕게 체험한 사람일 뿐이란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체험하는 것에 있어 표면에서만 맴돌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깊은 것을 신중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겉돌면서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딴전을 피우며 그 모양이 어떠함을 잊어버리는 경박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듣고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 사람은 듣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깊은 것을 바라보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은 떠졌고, 세밀하게 관찰하였으며 이로써 그 생각과 가치관이 차츰 실제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변화된 가치관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는 믿음은 잠깐의 흉내 또는 얕은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행하는 척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약 2:22, 개역)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다음으로 야고보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을 통해 믿음은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의미도 생각해봅시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이 구절은 믿음의 행위는 행위만으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종합해 볼 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 안에 믿음이 공존하고 믿음의 행위가 숨은 믿음의 완전함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십일조가 되지 않는 분명한 한 가지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스도를 양심으로 느끼는 그 정도는 매우 빈약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열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십일조의 부재는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에 그들은 그것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깊이 있게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들의 가치관과 물질에 대한 기준이 변화되지 못한 탓입니다. 또한, 더불어 십일조의 순종이 안 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역시 이 정의 역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린 그 의미도 재차 살펴보았습니다. 십일조에 있어 순종하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음은 그의 믿음이 그 행위 안에 공존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의 온전치 못한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만, 대체로 이러한 경향은 초신자들에게 쉽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종 이 원리는 구신자들에게도 곧잘 적용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구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신앙의 반열 안에 들어온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초신자의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이 아직 어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상은 그 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소아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린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해외토픽에 이런 사례가 소개됩니다. 나이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이르렀지만 발육상태는 여전히 초딩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런 경우를 ‘아직 어린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병입니다. 그리고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불행한 자들이며 정상적인 인간집단으로부터는 소외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기에 이러한 문제를 곧잘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영이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때가 지나도 믿음이 자리지 않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그건 치명적인 불구입니다. 그런 불구자가 그리스도인이란 범주 안에서는 세상의 불구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불구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육신적인 불구가 있었다면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불구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도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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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의 세례

(막 1:4, 개역)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보통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례전은 성찬식과 세례입니다. 특별히 세례는 구약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홍해 바다 아래로 지나온 사건, 나아만 장군의 침수 후 완치 등.

세례 요한의 세례는 가장 일반적 모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특별히,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의 세례는 어째서 ‘회개의 세례’라고 불렸을까요?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말하길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앞서 그는 물세례이자 회개의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세례는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바로,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막 1:15, 개역)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구든지 생판 처음부터 복음,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참된 복음의 씨앗은 바로 회개하는 사람의 밭 갈아진 양심 안에 심기워집니다. 세례 요한이 행한 ‘회개의 세례’는 그 자체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실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적인 세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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