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는가

(막 1:30-31, 개역)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베드로의 장모님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이 열병으로 그녀는 예수님이 친히 방문하였음에도 전혀 침상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건강한 사람이라면 방문한 손님을 환대하며 맞아들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침상에 그대로 누워 열병으로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녀의 침상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과 그녀와 접촉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말씀으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친밀하고 애정 어린 모습으로 그녀의 가냘픈 손을 꼭 쥐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녀는 일순간 열병이 떠나고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그 즉시 그녀는 마땅히 해야 할 손님에 대한 예우이자 예수님을 수종하는 일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영혼들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수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죄의 병으로 말미암아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수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병을 고침 받고, 영혼이 건강하게 된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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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2-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침상에서 일어나서 수종하는일을 고민하는
저의 모습을 반성해봅니다..이건 예우가 아니겠죠? ^^
어서 일어나서 예우를 갖추어야겠습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 1:21-24,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시작되면서 두드러지게 표출된 두 가지의 반응을 살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청중은 죽은 둣이 고요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눈빛은 반짝였습니다.

말씀이 끝날 무렵이었을까요? 청중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감탄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 분의 말씀은 마치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울부 짓는 것 같구나!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감동과 중압감이야!’ 즉각적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서기관들에게 배운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감동과 감탄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권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죽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적 권위와 권세가 버려진 마른 낙엽처럼 날려갈 뿐이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일각에선 전혀 의외의 반응이 연출되었습니다. 어떤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분노했지만, 겨우 자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기 위해 이제 오신 것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선포에 경악했습니다. 드디어 창세에 예고된 그 일이 실현되고 있는 찰나였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닫아놓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울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영원한 형벌이 예고되는 심판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그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눌림과 동시에 응어리진 공포와 분노를 토해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말 속에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외침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은 분노의 고함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소매치기범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나를 붙잡습니다. 칼을 들이밀며 인질을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버퉁칩니다. 우리는 소리칩니다. ‘왜 이러세요! 왜 나 한테 이러는 거요!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나한테 이러는 거요!’ 우리는 기겁합니다. 한 시라도 이 사람과 붙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상황은 공포스럽고 이 불쾌한 인간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길 소망할 뿐입니다. 바로 귀신에게 있어 에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절규가 무엇이라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저는 바로 이 외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자, 생명의 문입니다. 그 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멸망입니다. 예수님과 상관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에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정을 하고, 쏘아 붙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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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막 1:16-20, 개역)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효율성과 자신에 대한 증인 및 그의 부활 승천 후에도 복음사역의 지속성을 위해 특별히 제자들을 선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육신 하심으로 해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으로써의 사역이었으며 그럼으로 그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 제한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 순응하는 일련의 방편이자 방법론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증인이자 증거자로 삼아 복음의 사역에 역사성과 지속성을 부여코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전혀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제자들의 행보는 ‘광신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누이, 나의 동생이 직장에서 뛰쳐나가 메시야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어떻겠습니까?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일상적이었고,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배 위로 올라가 해변의 연안 가까운 곳에 배를 띄워놓고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의 모습. 그것이 그들 생계의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물고기를 낚지 말고, 사람을 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부들에게 이제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지지 말란 말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거의 미친 소리였습니다. 은행에 가서 창구직원에게 이렇게 물어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제 더 이상 은행에서 돈이나 세지 말고 나와 함께 추종자를 모읍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해서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초월성과 불가역성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습니다. 생계의 수단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수단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질 것을 예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며 그 수단과 방법은 전적으로 신적 권능으로 낚아야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뀌어진 생계수단과 방법에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낡은 그물은 바다에 던져 놓은 채 다시 거두지 않고 버려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고기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오는 신적 능력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적 매력과 방법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을 활용하실 때는 유용하지만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개입되지 않을 때는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은 무용할 뿐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 능력과 수단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였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란 생계에 적합한 방식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기 위해 낡고 닭아 구멍이 생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를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를 버렸습니다. 생계수단을 버림과 동시에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교훈을 발견케 됩니다. 그물을 던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물을 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다양한 방법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실천 되야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통제하셔야 될 문제입니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며, 다양한 마귀적 상황들이 발생하여 우리가 던진 그물에 여전히 빈틈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끌어올리다 놓쳐버리고 맙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히 그물을 던지기에 앞서 성실히 꼼꼼히 그물을 정비했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복음 전도에 앞서 성실하고 꼼꼼히 기도와 준비, 상황에 대한 다양한 방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물 구석구석에 작용해줄 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죽는 날 까지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아버지를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적인 혈육을 관계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앞에 두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애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 아비나 어미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 현재 부모님이 이 자리에 있을 지라도 예수님이 부르실 때는 그 자리를 떠나 그리스도의 일에 참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배은망덕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노부모가 병상에 누워있어 날마다 간호하는 아들이 있다할지라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는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와 부모님을 봉양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예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부모님을 봉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는 부리심을 따라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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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포

(막 1:14-15, 개역)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히면서 상황은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요한은 예비자였습니다. 이제 그의 사역이 일단락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되 곧 요한이 잡힌 후였다고 진술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행보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는 요한의 사역이 마무리됨으로써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며, 둘은 모든 것에 때와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나서야 할 시기가 오기까지 선포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사역할 때와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위대한 선포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그것만이 예수님 선포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앞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예수님은 시기적인 완성, 시기의 적절성을 강조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때가 찬 것입니다. 한편, 이 외침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창세 때 모형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이제 때가 차서 실제 사건으로 이뤄질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천국의 문을 활짝 여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의 날, 복음의 날, 천국의 날이 가까이 왔으며 때가 찼으니 반드시 복음을 믿을 것을 외쳤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복음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전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란 사실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복음의 문을 통과하는 진정한 관례를 일깨워줍니다. 복음은 그냥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은 회개를 통해 믿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일깨워줍니다. 또, 죄에 대한 자각은 깊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이끌어냅니다. 그제서야 죄인은 자신의 죄와 영원한 운명의 끔찍함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복음을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복음은 없으며, 회개 없는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복음을 통과하려는 모든 죄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언급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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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매력_2010.12.13

(삼상 25:42, 개역)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성경에서 나발은 ‘속이 좁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거부였고, 총명한 아내 아비가일을 둔 복이 많은 생을 살고 있었다. 다윗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호의를 거절했던 나발은 하나님이 쳐서 죽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단조로운 이야기의 흐름 속에 우리는 아무런 의구심을 품지 않곤 한다. 그러나 왜? 아비가일은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인 걸까? 다윗이 매력적었나? 물론, 다윗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는 골리앗을 쓰러 뜨린 용감한 장군이면서 군대장관이었고, 천부적인 감수성과 음악적 재능으로 시와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용맹함과 근육질의 몸매, 감수성까지 겸비했으니 아마 남자로써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비가일에게 청혼할 당시 다윗은 그만큼 매력적이었을까? 그는 군대장관에서 해임되었고, 왕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나 말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다윗은 끝난 사람이었다. 누가 도망자의 아내, 언제 죽을지 모를 파리 목숨 같은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을까?

다윗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한 나머지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겠지만. 그의 청혼을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다. ‘남편 죽은지가 얼마나 됐다구요...’. 더구나 그녀는 남편이 남겨 놓은 거액의 유산이 있었다. 얼마든지 편하게 남의 여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다윗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폭풍 같은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아비가일은 표면에 드러나 다윗의 수많은 단점과 장애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을 관통해 다윗의 믿음을 봤다. 비가 쏟아지는 먹구름을 넘어서면 여전히 찬란한 태양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모든 먹구름을 넘어 다윗의 견고한 중심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깊은 것을 통찰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단점을 뛰어 넘어 숨은 장점을 바라보는 능력’을 ‘아비가일식 통찰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매력’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매력을 갖고 있느냐고? 아니라면 또, 그 매력을 얻고자 달려야 하는 것이냐고.

예수님이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렸다고 했다. 그들은 이제 다른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건 미친 선택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낚는단 말인가? 보이스 피싱인가? 한편, 그들은 직감했다. 사람을 낚는 데는 더 이상 그물은 필요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적중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을 이끌어 오는 신적 권능이었다. 그들에게 매력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신적 권능이 있을 때 영혼들이 이끌려 왔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다. 밤이 맞도록 헛수고였다. 예수님이 던져보라 했을 때, 153마리가 그물을 찢기우며 딸려 올라왔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 ‘수단과 방법’의 중요성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또 묻게 된다. 그것이 결과를 위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느냐고. 수단과 방법, 매력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기억하자.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을 때는 다 무용지물이란 것을. 매력이 매력다워지는 것, 수단과 방법이 가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할 실 때 그 때 뿐이란 것을 말이다.

아비가일에게 청혼한 그 날 다윗에게 객관적인 매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섭리했다. 아비가일은 탁월한 통찰력으로 가장 중요한 매력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임을 이해했다. 우리는 어떤 매력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정작 우리는 ‘믿음의 매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전히, 그렇지만 인간적인 매력, 수단과 방법의 매력, 객관적인 매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할까? 기억하자.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 매력이 된다는 것을. 그러나 ‘믿음의 매력’은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매력이라는 것을. 다윗에게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은 아비가일을 반응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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