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막 1:16-20, 개역)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효율성과 자신에 대한 증인 및 그의 부활 승천 후에도 복음사역의 지속성을 위해 특별히 제자들을 선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육신 하심으로 해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으로써의 사역이었으며 그럼으로 그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 제한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 순응하는 일련의 방편이자 방법론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증인이자 증거자로 삼아 복음의 사역에 역사성과 지속성을 부여코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전혀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제자들의 행보는 ‘광신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누이, 나의 동생이 직장에서 뛰쳐나가 메시야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어떻겠습니까?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일상적이었고,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배 위로 올라가 해변의 연안 가까운 곳에 배를 띄워놓고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의 모습. 그것이 그들 생계의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물고기를 낚지 말고, 사람을 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부들에게 이제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지지 말란 말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거의 미친 소리였습니다. 은행에 가서 창구직원에게 이렇게 물어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제 더 이상 은행에서 돈이나 세지 말고 나와 함께 추종자를 모읍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해서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초월성과 불가역성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습니다. 생계의 수단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수단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질 것을 예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며 그 수단과 방법은 전적으로 신적 권능으로 낚아야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뀌어진 생계수단과 방법에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낡은 그물은 바다에 던져 놓은 채 다시 거두지 않고 버려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고기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오는 신적 능력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적 매력과 방법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을 활용하실 때는 유용하지만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개입되지 않을 때는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은 무용할 뿐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 능력과 수단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였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란 생계에 적합한 방식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기 위해 낡고 닭아 구멍이 생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를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를 버렸습니다. 생계수단을 버림과 동시에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교훈을 발견케 됩니다. 그물을 던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물을 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다양한 방법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실천 되야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통제하셔야 될 문제입니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며, 다양한 마귀적 상황들이 발생하여 우리가 던진 그물에 여전히 빈틈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끌어올리다 놓쳐버리고 맙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히 그물을 던지기에 앞서 성실히 꼼꼼히 그물을 정비했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복음 전도에 앞서 성실하고 꼼꼼히 기도와 준비, 상황에 대한 다양한 방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물 구석구석에 작용해줄 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죽는 날 까지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아버지를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적인 혈육을 관계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앞에 두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애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 아비나 어미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 현재 부모님이 이 자리에 있을 지라도 예수님이 부르실 때는 그 자리를 떠나 그리스도의 일에 참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배은망덕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노부모가 병상에 누워있어 날마다 간호하는 아들이 있다할지라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는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와 부모님을 봉양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예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부모님을 봉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는 부리심을 따라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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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포

(막 1:14-15, 개역)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히면서 상황은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요한은 예비자였습니다. 이제 그의 사역이 일단락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되 곧 요한이 잡힌 후였다고 진술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행보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는 요한의 사역이 마무리됨으로써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며, 둘은 모든 것에 때와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나서야 할 시기가 오기까지 선포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사역할 때와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위대한 선포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그것만이 예수님 선포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앞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예수님은 시기적인 완성, 시기의 적절성을 강조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때가 찬 것입니다. 한편, 이 외침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창세 때 모형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이제 때가 차서 실제 사건으로 이뤄질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천국의 문을 활짝 여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의 날, 복음의 날, 천국의 날이 가까이 왔으며 때가 찼으니 반드시 복음을 믿을 것을 외쳤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복음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전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란 사실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복음의 문을 통과하는 진정한 관례를 일깨워줍니다. 복음은 그냥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은 회개를 통해 믿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일깨워줍니다. 또, 죄에 대한 자각은 깊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이끌어냅니다. 그제서야 죄인은 자신의 죄와 영원한 운명의 끔찍함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복음을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복음은 없으며, 회개 없는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복음을 통과하려는 모든 죄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언급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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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매력_2010.12.13

(삼상 25:42, 개역)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성경에서 나발은 ‘속이 좁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거부였고, 총명한 아내 아비가일을 둔 복이 많은 생을 살고 있었다. 다윗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호의를 거절했던 나발은 하나님이 쳐서 죽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단조로운 이야기의 흐름 속에 우리는 아무런 의구심을 품지 않곤 한다. 그러나 왜? 아비가일은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인 걸까? 다윗이 매력적었나? 물론, 다윗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는 골리앗을 쓰러 뜨린 용감한 장군이면서 군대장관이었고, 천부적인 감수성과 음악적 재능으로 시와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용맹함과 근육질의 몸매, 감수성까지 겸비했으니 아마 남자로써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비가일에게 청혼할 당시 다윗은 그만큼 매력적이었을까? 그는 군대장관에서 해임되었고, 왕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나 말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다윗은 끝난 사람이었다. 누가 도망자의 아내, 언제 죽을지 모를 파리 목숨 같은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을까?

다윗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한 나머지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겠지만. 그의 청혼을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다. ‘남편 죽은지가 얼마나 됐다구요...’. 더구나 그녀는 남편이 남겨 놓은 거액의 유산이 있었다. 얼마든지 편하게 남의 여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다윗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폭풍 같은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아비가일은 표면에 드러나 다윗의 수많은 단점과 장애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을 관통해 다윗의 믿음을 봤다. 비가 쏟아지는 먹구름을 넘어서면 여전히 찬란한 태양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모든 먹구름을 넘어 다윗의 견고한 중심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깊은 것을 통찰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단점을 뛰어 넘어 숨은 장점을 바라보는 능력’을 ‘아비가일식 통찰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매력’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매력을 갖고 있느냐고? 아니라면 또, 그 매력을 얻고자 달려야 하는 것이냐고.

예수님이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렸다고 했다. 그들은 이제 다른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건 미친 선택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낚는단 말인가? 보이스 피싱인가? 한편, 그들은 직감했다. 사람을 낚는 데는 더 이상 그물은 필요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적중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을 이끌어 오는 신적 권능이었다. 그들에게 매력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신적 권능이 있을 때 영혼들이 이끌려 왔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다. 밤이 맞도록 헛수고였다. 예수님이 던져보라 했을 때, 153마리가 그물을 찢기우며 딸려 올라왔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 ‘수단과 방법’의 중요성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또 묻게 된다. 그것이 결과를 위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느냐고. 수단과 방법, 매력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기억하자.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을 때는 다 무용지물이란 것을. 매력이 매력다워지는 것, 수단과 방법이 가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할 실 때 그 때 뿐이란 것을 말이다.

아비가일에게 청혼한 그 날 다윗에게 객관적인 매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섭리했다. 아비가일은 탁월한 통찰력으로 가장 중요한 매력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임을 이해했다. 우리는 어떤 매력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정작 우리는 ‘믿음의 매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전히, 그렇지만 인간적인 매력, 수단과 방법의 매력, 객관적인 매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할까? 기억하자.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 매력이 된다는 것을. 그러나 ‘믿음의 매력’은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매력이라는 것을. 다윗에게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은 아비가일을 반응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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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_2010.12.05

(눅 18:10-14, 개역)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습관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바리새인은 없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조차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현재 우리가 당면한 상황 속에서 이 바리새인과 세리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표면적인 특징은 이러하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잘 지켰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았다. 세리는 범법했으며,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실제로 경건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다음의 특징이 있다. 바리새인은 떳떳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재차 주지시켰다. 더불어 그는 세리와 같지 않는 것을 들어가며 자신을 구별시켰다. 반면, 세리는 전혀 내세울 것이 없었고, 오직 긍휼만을 구했다. 이에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편을 들어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하나님은 분명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심이 분명하지만 모든 죄보다도 교만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은 흠이 없었다.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했다. 그는 자신이 갖춘 경건을 자기 의로 삼아 세리와 구별시켜 드러냈다. 하나님은 그런 자신이 가진 경건과 능력으로 그 보다 못한 자와 구별시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오만함에 질색했다. 왜냐하면 그 의로움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약 2:4, 개역)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오늘날 바리새인은 누구일까? 우리는 바리새인을 교회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과 같고, 어떤 이들은 세리와 같다.

교회 안에서 자기와 구별시켜 상대적으로 비교우위를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
‘나는 구원 받은 지 오래 됐지만 저 형제, 자매들은 아직 얼마 안 됐잖아.’
‘나는 구원 받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이 함께 신앙생활하시지만 저 형제, 자매님들은 홀 신앙일 뿐이잖아. 나와는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아.’
‘나는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 중책을 맡아 봉사하지만 저 형제, 자매는 너무 미약해.’

반면, 세리와 같은 이들도 있다.
‘아무래도 난 아직 구원 받은 지 얼마 안 됐잖아. 나는 아직 미약해. 뭐라고 할 수 없는 처지지.’
‘저 형제, 자매님들은 부모님이 구원을 받으셨잖아. 난 혼자인데. 나와는 격이 다르지. 물러서야 할지 몰라.’

그러나 기억하자.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의 생각을 가진 자들을 정죄한다는 것을. 바리새인은 의로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어째서 그러할까?

구원을 먼저 받은 것, 구원 받은 지 오래되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준 것이다. 구원받은 부모와 구원받은 좋은 가정이 자신의 권세로 된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모두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자신의 부요함, 자신의 자랑, 자신의 상대적 비교우위로 삼아 남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그런 바리새인을 싫어하신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선상에 서야 한다.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정죄 받을 그저 죄인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모든 좋은 조건과 여건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받고, 늦게 받고, 적게 받고, 많이 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히 마음을 낮춰 적게 받은 이들에게도 동일한 낮아짐으로 다가서고 그들을 받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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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과 충돌하기_2010.11.29

비탈진 골목길에 주차된 차량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옆에 지나가던 한 아이가 급히 그 차량에 올라타서 차를 안전하게 멈춰 세웠다. 자칫 큰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서 아이의 용기와 기지가 대형사고를 막을 뻔한 것이다. 그 아이는 일순간 스타덤에 올랐다. 비록, 아이가 차를 운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는 용인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 사울의 다음 상황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삼상 13:8-14, 개역) 『[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 직전에 최고사령관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는 사무엘을 대신해 급박한 상황에서 번제를 드렸다. 그가 직면한 3대 급박한 상황이 설명되어진다. 첫째, 백성들은 사무엘의 더디옴으로 공황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둘째, 사무엘은 정한 기간 안에 오지 않고 있었다. 셋째,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믹마스 앞에 까지 몰려와 당장 전투가 벌어질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사울의 대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분초를 따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최고사령관으로써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작 문제의 원인은 사무엘이 이 다급한 상황에서 서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리셨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최고사령관으로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할 사울왕의 입장에서는 사울보다 사무엘이 훨씬 잘못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의 더디옴은 모두를 시험에 빠트린 원인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사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 및 개인적인 환경 가운데 종종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에 의지한다. 우리의 매우 잘못된 버릇이자 잘못된 습관 중의 하나는 종종 내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어떤 수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사울이 그러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환경 위에 역사하시는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절대적인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먹구름이 낀 날일지라도 비행기를 타고 그 구름 너머로 올라서면 찬란한 태양이 비취듯, 현실의 곤란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믿음으로 바라봐야 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 현재의 상황과 상태를 모면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불신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못마땅 하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종종 예외적인 상황을 서로 이해하고, 용납해줄 수 있다. 그 용기와 기지를 발견한 아이를 칭송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객관적으로 용인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에 부합된 것이 아닐 때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고 온전한 판단과 선택과 결정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옳은 판단과 결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현상을 뛰어넘어 모든 것 가운데 역사하시고, 조정하시며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다. 또한, 기다림과 순종, 겸손이 요구된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결론은 이것임을 명심해야 겠다.

(사 55:8-9,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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